선덕여왕

신라 여왕, 군주, 통치자

num_of_likes 39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57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신라 여왕, 군주, 통치자
report
Edit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자 신라 제27대 군주입니다. 진평왕의 딸로, 성골 남자가 끊기자 화백회의의 추대로 즉위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9층 목탑 등을 건립하며 불교 진흥과 민생 안정에 힘썼습니다. 백제 및 고구려와의 전쟁 등 혼란한 시기에도 당과의 외교를 강화하고 김춘추,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비담의 난 중에 승하했으며, 그녀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가 전해집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632

[을제/을찬에게 국정 총괄 및 구휼 정책 시행]

즉위년, 을제 또는 을찬으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도록 하는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즉위한 해인 건복 49년(632년)에 을제(乙祭) 또는 을찬(乙粲)으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 태종의 모란 꽃 선물]

당 태종이 빨강, 자주, 하얀색 모란 그림과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선덕여왕은 이를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언했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는 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을 희롱한 것임을 알아차린 것으로, 그녀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배우자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선덕여왕 즉위]

신라의 제27대 여왕으로 즉위하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받았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633

[신궁 제사 및 조세 감면]

633년 정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와 군의 조세를 1년간 감면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건복 50년(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백제의 서쪽 변경 침공]

백제가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국방에 위협을 가했다.

건복 50년(633년)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634

[인평 연호 개원 및 분황사 완공]

634년 정월부터 '인평'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해에 신라의 중요한 사찰 중 하나인 분황사가 완공되었다.

즉위 3년째인 건복 51년(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635

[당으로부터 신라왕에 봉해지다]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해지며, 당과의 외교 관계를 공고히 하고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인평 2년(635년)에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영묘사 옥문지 개구리 일화 (여근곡 전투 예언)]

영묘사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우는 것을 보고, 여왕은 백제군이 여근곡에 매복해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 각간 알천과 필탄을 보내 백제 장수 우소를 무찌르게 하여, 그녀의 총명함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민심 위로 정책 시행]

이찬 수품과 용수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국정을 안정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평 2년(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636

[자장법사의 당 유학]

같은 해, 고승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는 신라 불교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인평 3년(636년)에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

정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 운영의 주요 인물로 기용했다.

인평 3년(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황룡사 법회 개최]

3월, 자신의 병을 낫게 하고자 황룡사에서 대규모 법회를 열어 불교를 통한 국난 극복 의지를 보였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여근곡 전투, 백제군 격퇴]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침입하자,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고 신라 서부 방어에 성공했다.

인평 3년(636년)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638

[고구려 칠중성 공격 격퇴]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오자, 대장군 알천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안정시켰다.

인평 5년(638년) 10월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639

[하슬라를 북소경으로 삼아 국경 방비]

북부 국경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하슬라를 북소경으로 삼고 사찬 진주를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인평 6년(639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荷瑟羅)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640

[귀족 자제 당 국자감 유학]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 국자감에 유학생으로 입학시켜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함으로써 인재 양성과 문화 교류에 힘썼다.

인평 7년(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였다.

642

[김춘추의 고구려 동맹 협상 결렬 및 구출]

김춘추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했으나 보장왕이 죽령 이북 땅 반환을 요구하며 그를 감금했다. 이에 선덕여왕이 김유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압박, 김춘추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구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였기에 그를 감금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당에 조공]

정월, 당나라에 다시 조공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했다.

인평 9년(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다.

[백제의 서쪽 40여 개 성 함락 및 당항성 공격]

백제 의자왕이 신라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하고 당과의 외교 거점인 당항성까지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등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인평 9년(642년)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唐項城)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대야성 함락과 김춘추의 고구려 동맹 요청]

백제에게 대야성을 함락당하고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죽임을 당하는 등 정세가 불리해지자, 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동맹을 요청하며 위기 타개를 모색했다.

인평 9년(642년) 8월에 백제가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다.

643

[자장법사의 황룡사 9층 목탑 건설 진언]

자장법사가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하며 불교를 통한 국난 극복과 삼국 통일의 염원을 담는 상징적 건축을 제안했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당에 토산품 조공]

정월, 당나라에 토산품을 바치며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당에 구원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당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 태종에게 거절당하며, 신라는 외교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인평 10년(643년)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644

[연개소문의 신라 공격 중단 요구 거절]

당 태종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간 영토 500리 반환을 요구하며 공격 중단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당 태종의 공격 중단 요구를 거절하였다.

[당에 재차 조공 및 당 태종의 고구려 압박]

정월, 당에 다시 조공을 바치자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며 신라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백제 공격, 7개 성 탈환]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공격, 일곱 개의 성을 빼앗으며 백제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성공했다.

인평 11년(644년)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

[당에 조공 지속]

정월, 당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며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인평 12년(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자장법사의 건의에 따라 3월에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 이는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웃 9적을 물리쳐 복속시키려는 호국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이유는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삼국사기는 64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당의 고구려 침략 지원 및 백제에 성 빼앗김]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지원했으나, 그 틈을 타 백제에게 다시 일곱 성을 빼앗기며 양면 전선의 어려움을 겪었다.

인평 12년(645년)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국정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혔다.

인평 12년(645년)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647

[비담의 난 발발]

재위 마지막 해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기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여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보내 비담에 맞서게 했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경주 월성(月城)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선덕여왕 승하]

비담의 난 중에 승하했다. 시호는 '선덕'이며, 미리 예언했던 대로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졌다.

반란 와중인 1월 8일에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679

[사천왕사 건립 (사후)]

선덕여왕 사후 문무왕 대에 이르러 그녀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이는 불경의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으로, 여왕의 예언 능력과 불심을 기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후 67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