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 (백제)

백제 국왕, 불교 군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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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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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왕, 불교 군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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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제26대 국왕인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 뛰어난 식견을 지녔습니다.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는 등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일본에 전파했습니다. 고구려에 맞서 양나라와 연대하고 신라와 동맹을 맺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한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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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

[성왕 탄생]

백제의 26대 국왕인 성왕이 웅진성에서 무령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제 25대 무령왕과 대부인의 아들로 웅진성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명농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이복 형제로 순타태자와 사아군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여러 아들 중 한 명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몇 번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기록에 없지만, 일본서기 케이타이 14년조에 위덕왕 창의 나이가 29세였다는 언급을 통해 역산한 출생 연도이다.

523

[백제 제26대 국왕 즉위]

성왕이 무령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523년 음력 5월, 무령왕에 이어 백제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본서기에는 524년 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패수에서 고구려군 격퇴]

성왕은 패수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 명으로 막아내었다.

성왕 즉위 후인 523년 음력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침입하자, 성왕은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524

[양 고조로부터 책봉]

양나라 고조와 국교를 강화하여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성왕 즉위 2년(524년), 양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며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이는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525

[신라와 수교]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며 수교 관계를 맺었다.

525년 음력 2월, 성왕은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며 수교하였다. 이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신라 동맹의 기초를 다지는 움직임이었다.

526

[웅진성 수리 및 남조·왜와 연대 강화]

웅진성을 수리하고 남조와 연대, 왜와 제휴를 꾀하며 고구려에 대한 투쟁 노선을 다졌다.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동시에 남조와 연대하고 왜와 제휴를 강화하는 등 고구려에 맞설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시기 겸익 승려가 인도에서 불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를 번역하게 하는 등 교단 정비에 힘썼다.

529

[오곡원 전투에서 고구려에 대패]

고구려 안장왕의 침입으로 북쪽 변경 혈성이 함락되고, 좌평 연모가 이끄는 3만 병사가 오곡원 전투에서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크게 패했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시켰다. 성왕은 좌평 연모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주어 오곡원 벌판에서 맞서 싸우게 했으나 패배하여 2천여 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었다.

534

[양나라에 조공]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며 대외 관계를 유지했다.

534년 봄 3월, 성왕은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며 대외 관계를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538

[사비 천도 및 국호 '남부여'로 개칭]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며 백제 중흥의 의지를 다졌다.

538년 봄, 성왕은 수도를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 현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다. 이는 백제의 부흥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백제는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540

[고구려 우산성 공격 실패]

장군 연회에게 고구려 우산성 공격을 명했으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

540년 가을 9월, 성왕은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물러섰다.

541

[양나라에 박사 및 기술자 청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모시박사, 열반경의 등의 경서 및 공장, 화사 등 기술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541년, 성왕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를 비롯하여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의 기술 전문가를 요청하여 양나라의 허락을 받았다. 이는 백제의 문화 발전과 불교 진흥에 큰 영향을 미쳤다.

548

[고구려의 독산성 공격, 신라와 연합하여 격퇴]

고구려가 예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해오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진흥왕의 군사 지원으로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548년 정월,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에게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가 밤낮으로 달려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크게 격파했다.

549

[양나라 후경의 난으로 백제 사신 억류 후 귀국]

양나라 수도에 후경의 난이 발생했음을 알지 못하고 조공을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사신들은 황폐해진 도성에 울부짖다 후경에게 잡혀 갇혔다가 난 평정 후 귀국했다.

549년 10월, 성왕은 양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에 후경(侯景)의 난이 발생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들이 도착하여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성과 대궐을 보고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 내어 울자, 후경은 크게 노하여 사신 일행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에야 비로소 백제 사신들은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50

[고구려 도살성 함락 및 금현성 포위]

장군 달기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구려 도살성을 빼앗았으나, 3월에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했다.

550년 정월, 성왕은 장군 달기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551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한강 상류 유역 점령]

고구려 내정 불안을 틈타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신라는 10개 군, 백제는 6개 군을 점령했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551년 성왕은 동맹을 맺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결과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북도까지 진출하며 세를 넓혔으나,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552

[일본에 불교 전파 및 사원 건설 지원]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석가불금동상, 불경 등을 전달하고, 사원 건설을 위한 학자와 기술자, 의사, 음악가 등을 파견하여 왜의 발전을 도왔다.

성왕은 552년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 약간, 경론 약간권을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통해 일본에 파견했으며,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였다. 또한, 사원 건설을 위해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도 교대로 파견하여 왜의 문화적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553

[신라의 한강 유역 탈취 및 백제 포위]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기고 신라에 의해 포위되었다.

553년 음력 7월,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회복했던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동맹국이었던 신라에게 빼앗겼다. 신라는 동북쪽 변경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으며 백제를 포위했다. 이는 낙동강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며 삼국의 정립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왕녀를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냄]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왕녀(소비공주)를 신라 진흥왕의 후궁으로 보냈다.

553년 음력 10월, 성왕은 왕녀를 신라의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이는 한강 유역 상실 후 신라와의 관계를 수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왕녀는 소비공주로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554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 전사]

왜와 가야의 병사를 모으고 아들 창과 함께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에서 신라군에 의해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554년, 성왕은 왜와 가야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아들 창(昌, 후일의 위덕왕)과 함께 세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관산성(현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은행리 말동산 서남쪽)에서 신라의 고간도도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군에 포위당한 아들을 구하려다 전사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554년 음력 7월, 일본서기에는 554년 음력 12월 9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왕은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비극적으로 전사하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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