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신라 국왕, 정복 군주, 불교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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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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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국왕, 정복 군주, 불교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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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4대 국왕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지소태후의 섭정을 거쳐 통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를 압도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까지 정복,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화랑도 개편과 불교 진흥으로 국력을 강화했고, 그의 발자취를 새긴 순수비들은 신라 영토 확장의 상징입니다. 진흥왕은 황금기를 설계한 위대한 정복 군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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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진흥왕 탄생]

신라 제24대 국왕 진흥왕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삼맥종 또는 심맥부입니다.

신라 제24대 국왕 진흥왕(眞興王)이 534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김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며, 불교 승려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법흥왕의 딸인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539

[울주 천전리 각석 방문]

즉위 1년 전, 6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을 방문했습니다.

6세 때였던 539년, 죽은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을 즉위하기 1년 전에 방문했다.

540

[신라 24대 국왕으로 즉위]

불과 6세의 나이로 신라 제24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어린 진흥왕을 대신하여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540년 7월, 6세의 나이로 신라 제2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1

[지소태후 섭정 시작]

보도태후의 섭정 기간이 끝나자, 어머니 지소태후가 551년까지 어린 진흥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4

[흥륜사 창건]

불교 진흥을 위한 첫걸음으로 흥륜사를 창건했습니다.

544년에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545

[거칠부에게 국사 편찬 지시]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신라의 역사를 기록할 《국사》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이듬해인 545년, 김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48

[고구려 독산성 공격 격파 지원]

백제 성왕의 구원 요청에 따라 장군 주진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독산성 공격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이 건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진흥왕은 장군 주진에게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551

[친정 시작 및 한강 상류 점령]

지소태후의 섭정이 끝나고 진흥왕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의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여 신라는 10개 군을, 백제는 6개 군을 얻었습니다. 이와 함께 연호를 '개국'으로 선포하고 팔관회를 제정했으며, 대가야 출신 우륵에게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했습니다.

551년부터 진흥왕이 친정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백제와 더불어 북진하여 고구려의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또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다. 대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

553

[황룡사 창건]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길조로 여겨 계획을 변경하여 거대한 황룡사를 창건했습니다.

553년 봄 2월,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계획을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백제의 한강 하류 탈취 및 신주 설치]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으로 대응할 수 없는 틈을 타,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고 신주를 설치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를 포위하는 전략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이라는 두 대형 생산력을 확보하며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에서 수·당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백제 왕녀와 혼인 동맹]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신라와의 화해를 시도하며 백제 성왕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습니다.

553년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

554

[관산성 전투 승리 및 백제 성왕 전사]

한강을 빼앗긴 것에 분노한 백제 성왕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 왔으나, 신라군이 크게 격파하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 2만 9천6백 명을 베는 대승을 거두며 신라의 위세를 떨쳤습니다.

554년 7월, 백제 성왕은 가량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여 비장 삼년산군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을 급히 쳐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62

[백제 침략 격퇴]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자 군사를 보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562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대가야 정복 및 순수비 건립 시작]

이사부와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완전히 복속시키며 낙동강 서쪽 지역까지 신라의 영토로 편입했습니다. 이후 새로 개척한 영토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워 신라의 국경을 확고히 했습니다.

562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564

[북제에 조공 사신 파견]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북방 세력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65

[북제로부터 '신라왕' 책봉]

북제 무성황제로부터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받아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습니다. 또한 진나라에서는 사신과 승려가 불교 경론 1천7백여 권을 보내주며 불교 진흥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565년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또한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

[진나라에 사신 파견]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566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67

[진나라에 사신 파견]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567년 봄 3월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68

[연호 '대창' 선포]

연호를 '대창'으로 바꾸었으며,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0

[진나라에 사신 파견]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570년 여름 6월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1

[진나라에 사신 파견]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외교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2

[연호 '홍제' 선포]

연호를 '홍제'로 다시 바꾸었으며,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습니다.

572년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으며,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76

[화랑도 창설 및 진흥왕 승하]

기존의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고구려와 백제 정벌의 원동력이 될 '화랑' 제도를 새롭게 창설했습니다. 같은 해 8월, 42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말년에는 법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으며, 왕비 사도왕후도 비구니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576년, 원화 제도를 만들어 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42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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