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고려 시대, 무신, 정치인, 무신정권 집권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43
정중부(1106~1179)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인으로, 문신들의 차별에 대한 깊은 불만을 품고 1170년 무신정변을 주도했습니다. 이 정변으로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경쟁자 이의방을 제거하고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살해당하며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1106
고려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인인 정중부(鄭仲夫)가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해주 정씨이며, 용모가 우람하고 얼굴빛이 백옥 같았으며, 키가 7척에 수염이 아름답고 위풍이 늠름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기록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1144
[김돈중 구타 사건]
견룡대정으로 재직 중, 재상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오병수박희를 하던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자, 정중부는 김돈중을 묶어 놓고 구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문관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견룡대정으로 재직 중이던 정중부가 오병수박희를 할 때, 왕의 측근이자 내시인 김돈중(재상 김부식의 아들)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불사르는 무례를 저질렀다. 이에 정중부는 크게 분노하여 김돈중을 묶어 놓고 구타했다. 김부식이 이 소식을 듣고 정중부를 고문하려 했으나, 왕의 비호로 처벌을 면했다. 이 사건은 정중부가 김돈중을 비롯한 문관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1170
[무신정변의 시작]
문신들의 차별 대우와 오만에 분노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이 보현원에서 의종을 수행하던 중 거사를 결행했다. 이들은 문신들을 무차별 처형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의종을 폐위시켰다.
의종 24년, 왕이 보현원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 무신 이소응이 씨름에서 지자 문신 한뢰가 그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쌓여 있던 문무 차별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호위 장병들이 문신들을 무차별 처형하며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변으로 의종은 폐위되어 거제도로 쫓겨났고, 그의 동생인 익양공 호가 명종으로 옹립되며 무신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무신정권의 시작과 권력 장악]
무신정변 성공 후, 정중부는 이의방과 함께 형식적인 공동 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나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무단정치를 단행하며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를 거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무신정변 성공 이후 정중부는 이의방과 함께 권력을 나누었지만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거두로 활동했다. 그는 무단정치를 단행하며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었고, 이후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에 오르는 등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에는 서북면 병마·판행영마병 겸 중군병마판사직을 맡았다.
1173
[김보당의 난 진압과 의종의 최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종은 이의방의 심복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명종 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장순석 등과 함께 정중부, 이의방에 반대하여 의종을 다시 세우려 거제도에서 경주로 모셔왔으나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었다. 이 반란을 빌미로 폐위되어 거제도에 유배 중이던 의종마저 이의방의 심복인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1174
[조위총의 난 진압과 이의방 제거, 최고 권력자로 등극]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거병하자, 정중부는 2년에 걸쳐 이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을 이용해 이의방을 제거하고 문하시중에 오르며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약 2년에 걸쳐 강온 양면책을 써서 조위총의 난을 잠재웠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중부는 자신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을 시켜 경쟁자 이의방을 제거하고, 스스로 문하시중에 오르며 무신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1175
[치사 요청과 명종의 반려]
정중부가 명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명종은 그에게 궤장을 하사하며 치사를 반려했다. 이는 정중부의 권력이 여전히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권력자로서 활동하던 정중부는 1175년 치사(致仕)를 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나 명종은 그에게 궤장을 하사하며 치사를 면하게 했다. 이는 당시 정중부의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정권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펴 같은 무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1179
[경대승에 의한 피살]
같은 무신인 경대승의 기습으로 정중부는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효수되어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이로써 무신정권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막을 내렸다.
1179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정중부는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피습당해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효수되어 저자거리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그는 역적으로 단죄되어 그의 가계나 족보도 실전되었다. 이 사건으로 무신정권 초기 가장 강력했던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