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고려 문신, 정치인, 섭정, 외척, 권신, 문벌귀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41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권신으로, 예종과 인종의 장인이자 외조부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두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 외척으로서 권세를 다졌습니다. 인종 즉위 후 섭정하며 반대파를 숙청하고 왕위 찬탈을 시도했으나,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뒤 척준경의 배신으로 몰락하여 영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영광 굴비의 유래가 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050
[이자겸 출생]
이자겸이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손자이자 상서좌복야 이호의 아들로 개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 경원 이씨 가문의 일원으로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자겸은 1050년 개경에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의 손자이자 상서좌복야 이호와 통의국대부인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이미 고려의 권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음서 제도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083
[음서 임용과 파직]
명문가 덕분에 음서로 합문지후에 임명되었으나, 여동생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 궁노와 간통한 사건으로 인해 관직에서 파직되어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자겸은 명문가에 태어난 덕분에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합문지후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 이호의 딸(이자겸의 여동생)인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 노비와 간통하다 발각되는 바람에 이자겸도 관직에서 쫓겨나는 등 순탄치 않은 시기를 보냈다. 이 일로 인해 헌종 재위 기간 동안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1107
[둘째 딸 예종 후궁 입궐]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후궁으로 입궐하면서 이자겸은 다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시 여진족 정벌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예종의 정략적 혼인이었습니다.
1107년 이자겸의 둘째 딸이 고려 예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이는 당시 여진족 정벌에 따른 문신들의 반발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예종은 이자겸의 딸과 혼인하여 여진정벌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자겸은 최사추의 사위였으며, 김인존의 처남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들과 연줄이 닿아있었다.
1109
[인종 출생과 이자겸의 고속 승진]
1108년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었고, 이듬해 미래의 인종을 낳으면서 이자겸은 예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참지정사, 문하평장사 등으로 고속 승진하며 권력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1108년 후궁이던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妃)가 되고 이듬해(1109년) 인종을 낳았다. 이후 이자겸은 예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려 참지정사, 상서좌복야를 거쳐 정2품 문하평장사로 승진했고, 동시에 그의 아들들도 함께 승진되었다. 그 뒤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겸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지내고, 소성군개국백에 봉작되었다.
1122
[예종 승하와 인종 옹립]
예종이 병세가 위중해지자 이자겸은 궁궐을 장악하고, 왕위를 노리던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며 유조에 따라 어린 외손자 인종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이로써 이자겸은 어린 인종의 섭정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122년 예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한 달 만에 승하하게 된다. 이자겸은 민첩하게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자 인종을 옹립한다. 예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유조에 따라 인종을 등극시키는 데 공헌했다. 어린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반대파 숙청]
인종 즉위 후 권력을 독식하기 시작한 이자겸은 예종의 아우 대방공 왕보와 신진 관료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왕위 찬탈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숙청하고 제거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인종을 추대한 공로로 양절익명공신에 책록되고 중서령 겸 영문하상서도성사에 임명된 이자겸은 어린 인종을 등에 업고 정적 제거에 착수했다. 1122년 12월,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왕보와 한안인, 문공인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을 내세워 이들을 숙청하고 대방공 왕보의 가족과 측근들을 제거, 50여 명을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다. 이로써 이자겸은 종실 세력과 신진 관료 세력이라는 주요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1124
[조선국공 책봉과 월권 행위]
인종 즉위 후 한양공에 책봉되었던 이자겸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1124년 조선국공으로 작위를 높였습니다. 그는 섭정을 수행하며 국사를 임의로 자신의 집에서 처리하고,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는 등 월권 행위와 권력 독점을 심화했습니다.
인종이 등극한 후 이자겸이 자신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특별한 예우를 받았고, 1122년 음력 10월에는 한양공으로 책봉되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이자겸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1124년 음력 7월 조선국공으로 높여 책봉되도록 만들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위세가 드높아지고 인종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섭정 역할을 수행했으나, 임의로 국사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할 때가 많아 한안인, 최거린 등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였고, 숭덕부라는 부를 설치하며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재산을 축적했다. 스스로를 국공으로 자처하며 왕태자와 대등하게 보고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했다.
1126
[인종 독살 미수]
왕권을 장악한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사택에 연금하고 왕위 찬탈을 위해 '십팔자득국' 도참설을 믿으며 인종 독살을 시도했습니다. 독이 든 떡과 독약을 보냈으나, 그의 넷째 딸인 왕비가 몰래 인종을 돕고 척준경이 배신하며 이자겸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해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했다. 그는 다시 도참설인 '십팔자득국'을 믿고 자신의 성씨인 이(李)자를 분해하면 십팔자가 된다고 말하며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렸으나 넷째 딸인 왕비의 도움으로 실패했다. 왕비는 은밀히 떡 속에 독이 들어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인종은 까마귀에게 던져주어 죽는 것을 확인했다. 이자겸이 또 독약을 보냈을 때도 딸인 왕비가 고의로 넘어뜨려 실패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드디어 왕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자겸의 난과 궁궐 장악]
1126년 2월 25일 밤, 인종의 명령으로 최탁, 오탁, 권수 등이 궁궐에 진입하여 이자겸의 사돈인 척준경의 아우와 아들을 살해하며 이자겸 제거를 시도했습니다. 이에 이자겸은 다음 날 척준경과 아들 의장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반격, 궁궐을 장악하고 인종을 위협했습니다.
1126년 2월 25일 어둠이 내릴 무렵, 인종의 명을 받은 최탁과 오탁, 권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여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내시 척순을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척준경으로 하여금 아들 의장이 거느린 현화사 승려 300여 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2월 26일 아침, 척준경이 직접 반격에 나서 궁궐을 장악했고, 이자겸은 인종에게 난을 일으킨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궁궐 대부분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죽었으며,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리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이자겸은 국왕에게 아무런 제재 조치 없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들만 제거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인종의 이자겸 제거 시도]
이자겸의 월권 행위가 심해지자 인종은 그를 제거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1126년 음력 2월, 인종의 측근 김찬과 안보린이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과 함께 이자겸 제거 계획을 세우고 인종에게 상주하여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자겸의 권력 독점과 월권 행위에 대해 어사대 등의 언관들이 비판하자, 인종은 이자겸 제거를 결심했다. 1126년 음력 2월, 인종의 측근인 내시 김찬과 안보린이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에게 이자겸과 척준경 등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고 인종에게 이를 상주하여 동의를 얻었다. 지녹연은 상장군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을 은밀히 불러 이자겸 체포 계획을 세웠다. 이는 이자겸이 먼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인종과 그 측근들이 이자겸 제거를 시도하면서 발생한 사건의 발단이었다.
[금나라와 군신관계 체결]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며 강성해지자, 고려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1126년 음력 4월, 고려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1115년 건국 후 날로 강성해진 금나라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1126년 음력 3월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을지 논의했다. 당시 대신들은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금나라의 강성함을 들어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자겸이 반대파를 숙청한 상황이라 그의 주장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고, 음력 4월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자겸의 몰락]
인종이 척준경을 회유하는 데 성공하고, 척준경이 이자겸의 아들 집사와 시비가 붙으며 이자겸과 갈등을 빚자,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결국 척준경의 군사들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압했고, 이자겸은 영광 법성포로 유배되었습니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는 척준경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때마침 이자겸의 셋째 아들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을 욕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척준경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인종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결국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바치고, 1126년 음력 5월 김향, 이공수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왔으며, 곧 영광 법성포로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들과 부하들, 두 딸도 모두 유배되거나 궐에서 쫓겨나며 이자겸의 권세는 완전히 몰락했다.
1127
[이자겸 사망과 굴비의 유래]
영광 법성포로 유배된 이자겸은 그곳에서 해풍에 말린 조기과의 생선을 맛본 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아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유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127년 1월 19일 등창으로 사망했습니다.
영광 법성포로 유배된 이자겸은 그 해 음력 12월 5일(양력 1127년 1월 19일) 등창으로 사망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말린 생선을 먹고 그 맛이 좋자 임금에게 진상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屈非)'는 의미로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오늘날 영광 굴비의 어원이 되었다.
1136
[사면복권과 추증]
인종은 이자겸이 죽은 후 1136년에 조서를 내려 그를 사면복권하고 검교 태사 한양공으로 추증했습니다. 이는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불러들이고 그의 아들들에게 양곡을 하사하는 등의 후대 조치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자겸의 몰락 후, 인종은 1129년에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불러들여 변한국대부인에 봉했다. 1136년에는 조서를 내려 이자겸을 사면복권하고 검교 태사 한양공으로 추증했다. 또한 1145년에는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양곡 6백 석을 하사하는 등, 이자겸이 인종의 후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조치들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