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

백제, 수도, 고대 도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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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5- 1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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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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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는 웅진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제의 중흥을 선포하기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습니다. 성왕은 538년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정교한 격자형 도로망과 성곽을 갖춘 동아시아 최고의 허브 도시를 구축했습니다. 122년 동안 찬란한 불교 예술과 해양 문화의 정수를 꽃피웠던 사비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으나, 오늘날 그 유적들은 백제의 섬세한 미학을 증명하며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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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

[사비 신도시 건설 착수]

성왕이 웅진의 좁고 험한 지형을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사비 지역에 계획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넓은 벌판과 강을 낀 이곳은 대규모 인구를 수용하고 수로 교통을 활용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성왕은 즉위 초기부터 웅진의 한계를 절감하고 천도를 계획했습니다. 사비는 당시 습지였으나 대대적인 배수 작업과 토목 공사를 통해 격자형 도로망을 갖춘 신도시로 거듭났습니다. 이는 백제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귀족 세력을 재편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538

[사비 천도와 남부여 선포]

백제의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공식 이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며 제2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이는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강성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538년 봄, 성왕은 왕실과 귀족, 백성들을 이끌고 사비성으로 입성했습니다.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것은 고구려에 맞서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백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541

[양나라와 외교 강화]

사비 체제를 안정시킨 성왕이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진 문물과 기술자를 초빙합니다. 이를 통해 사비의 도성 건축과 불교 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양서(梁書) 기록에 따르면 성왕은 화가와 차 박사, 불경 등을 요청하여 백제의 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이 외교적 교류는 사비성 내 사찰 건립과 기와 제조 기술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백제는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우아한 예술 양식을 확립했습니다.

545

[사비성 방어 체계 완비]

도성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나성과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을 연결하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는 평상시의 거주 기능과 비상시의 방어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사비 나성은 동아시아 도성 계획 중에서도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부소산성을 정점으로 도심 전체를 둘러싼 외곽 성벽은 총 길이가 약 6.3km에 달합니다. 이는 단순한 성벽을 넘어 도성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방어의 핵심이었습니다.

554

[위덕왕의 즉위와 사찰 건립]

부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이 즉위하여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규모 사찰들을 건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불교 정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위덕왕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출가를 고민했으나 귀족들의 만류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부여 능산리 사찰(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 등을 지어 부왕의 넋을 기렸습니다. 이 시기 사비의 불교 예술은 정점에 도달하며 일본 등 주변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전사]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해 신라와 전투를 벌이던 중 성왕이 관산성에서 기습을 받아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사비 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의 죽음은 백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성왕은 아들 창(위덕왕)을 격려하러 가던 중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생포된 후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완전히 결렬되었으며, 이후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게 됩니다. 사비의 왕실은 깊은 슬픔과 함께 정치적 격변기에 접어들었습니다.

567

[백제금동대향로 제작]

백제 문화의 정수로 손꼽히는 금동대향로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왕실의 제례를 위해 정교하게 제작됩니다. 도교와 불교 사상이 융합된 이 걸작은 사비 백제의 높은 예술 수준을 상징합니다.

능산리 사찰터 공방지에서 발견된 이 향로는 용 모양 받침, 연꽃 모양 몸체, 봉황 모양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향로에 조각된 5악사와 각종 신수들은 백제인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입니다.

577

[일본에 사신과 기술자 파견]

사비의 선진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 아스카 지역에 불경, 승려, 사찰 건축가를 파견합니다. 이는 일본 아스카 문화 형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사비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위덕왕은 경론과 율사, 선사, 비구니뿐만 아니라 불상 조각가와 기와 박사 등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이들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인 호코사(법흥사) 건립을 주도했습니다. 사비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허브로서 기능했습니다.

588

[사비 도성 내 대규모 조영]

사비성 내부의 사찰과 관청 건물을 개보수하며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 고유의 정교한 기와 제조 기술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시기에 제작된 기와들은 연꽃무늬가 더욱 세련되고 부드러운 형태로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사비의 도심은 붉은 기와지붕과 화려한 단청으로 가득 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모태가 되는 목탑들도 이 시기에 활발히 건립되었습니다.

598

[혜왕의 짧은 통치]

위덕왕의 뒤를 이어 혜왕이 즉위하였으나, 고령의 나이로 인해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사비를 다스리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수나라와 교류하며 정세를 살피는 데 주력했습니다.

혜왕은 성왕의 아들이자 위덕왕의 동생으로,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힘썼습니다. 비록 치세는 짧았으나 사비 도성의 행정 체계를 유지하고 다음 왕권으로의 평화로운 이양을 도왔습니다. 이 시기 백제는 수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599

[법왕의 살생 금지령 선포]

불교 정신을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법왕이 전국에 살생 금지령을 내리고 어구들을 불태우게 합니다. 이는 민심을 순화하고 불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법왕은 살생을 금하는 동시에 사비 내에 왕흥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며 백성의 고통을 분담하려 노력했습니다. 비록 그의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사비 백제의 불교적 이상향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600

[무왕의 즉위와 정국 안정]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무왕이 즉위하여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사비의 번영을 이끕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하며 백제의 자존심을 세웠습니다.

무왕은 즉위 후 사비의 방어력을 점검하고 적극적인 대외 확장을 꾀했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대규모 토목 사업과 사찰 건립을 병행하며 귀족들을 장악했습니다. 사비는 무왕의 치세 아래 다시금 활기를 띠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630

[사비 궁궐의 대대적 중수]

무왕이 사비의 궁궐을 화려하게 수리하며 왕실의 위엄을 과시합니다. 가뭄이 든 상황에서도 강행된 이 공사는 왕의 강력한 통제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무왕 31년 봄에 궁궐을 중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완성된 궁궐의 모습은 매우 웅장하여 사비를 찾은 사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는 사비가 단순한 수도를 넘어 백제 문화의 자부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634

[궁남지 조성]

궁궐 남쪽에 인공 호수인 궁남지를 조성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듭니다.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에서 유래한 이곳은 백제 조경 기술의 결정체입니다.

궁남지는 현존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정원입니다. 호수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신선이 사는 곳처럼 꾸몄는데, 이는 훗날 일본 정원 문화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무왕은 이곳에서 왕비와 함께 배를 타며 연회를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639

[미륵사 건립과 익산 천도 시도]

무왕이 익산 지역에 거대한 미륵사를 건립하며 사비에서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합니다. 비록 완전한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사비와 익산의 복수 수도 체제가 운영되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미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무왕은 고향인 익산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사비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비는 여전히 행정과 외교의 중심지로서 그 지위를 확고히 유지했습니다.

641

[의자왕의 즉위와 해동증자 칭호]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이 즉위합니다. 초기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해동의 증자'라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으며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사비의 백성들은 새로운 왕의 영도 아래 백제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642

[대야성 함락과 신라 압박]

의자왕이 신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며 신라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 승리는 사비 백제의 군사적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 김춘추의 사위와 딸의 죽음을 초래했고,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비의 조정은 승리에 도취했으나, 대외적으로는 국제 정세가 백제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변곡점이기도 했습니다.

655

[사비성 내 사치와 정치적 혼란]

재위 후반기에 접어든 의자왕이 정치에 소홀해지고 궁궐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연회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충신들의 간언이 무시되면서 사비의 국정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궁녀들과 함께 주색에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충과 흥수 같은 충신들이 유배되거나 감옥에 갇히면서 사비의 핵심 의사결정 체계가 마비되었다는 점입니다.

659

[도성의 불길한 징조들]

사비성 곳곳에서 여우가 들어오거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는 등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는 백제 멸망을 앞둔 민심의 동요와 불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망한다'는 글귀가 적힌 거북이가 발견되는 등 기괴한 사건들이 잇따랐습니다. 의자왕은 이를 무시하려 했으나, 사비의 거리에는 이미 전란의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는 고대 기록에서 국가 멸망을 암시하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이기도 합니다.

660

[나당연합군의 대규모 침공]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가 사비를 향해 수륙병진 공격을 시작합니다. 백제는 예상치 못한 대규모 병력의 출현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당나라 함대는 덕물도를 거쳐 기벌포로 진입했고, 신라군은 육로를 통해 황산벌로 향했습니다. 의자왕은 뒤늦게 대책을 논의했으나, 이미 적들은 사비의 턱밑까지 다다른 상태였습니다. 사비 도성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황산벌 전투와 계백의 결사대]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혈투를 벌입니다. 비록 중과부적으로 패배했으나 이들의 용맹함은 사비 사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계백은 가족들을 스스로 죽이고 전쟁터에 나갈 만큼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신라군을 네 번이나 격퇴했으나 화랑 관창 등의 희생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계백의 전사 소식은 사비성에 전해져 도성 방어 의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사비성 포위와 최후의 저항]

나당연합군이 사비 나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의자왕은 일부 군사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사비성에는 태자 융이 남아 방어전을 펼칩니다.

백제군은 나성과 부소산성을 거점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화력과 숫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성 안은 불길에 휩싸였고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사비의 찬란했던 전각들은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비성 함락과 백제 멸망]

웅진성에서 항복한 의자왕이 사비로 압송되면서 122년간 지속된 사비 시대와 백제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습니다. 승전 잔치가 벌어지는 도성에서 왕은 적장에게 술을 따르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의자왕과 왕족, 그리고 1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당나라 장안으로 끌려갔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소정방이 자신의 공로를 새겨넣는 치욕을 남겼습니다. 이로써 삼국의 한 축이었던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삼천궁녀와 낙화암의 전설]

사비성이 함락될 당시 백제의 여인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부소산성 절벽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집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절벽을 '꽃이 떨어지는 바위'라는 뜻의 낙화암이라 불렀습니다.

삼천궁녀라는 숫자는 후대의 과장이 섞여 있으나, 도성 함락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낙화암은 사비 백제의 마지막 비장미를 간직한 장소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며 그날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661

[백제 부흥군의 사비 탈환 시도]

귀실복신과 도침이 이끄는 부흥군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사비성을 포위하며 탈환을 시도합니다. 사비의 백성들은 이들에게 호응하며 다시 한번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부흥군은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한때 사비성의 외곽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내부 분열과 나당연합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결국 사비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백제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663

[백강 전투와 부흥 운동의 좌절]

백제 부흥군과 일본 지원군이 백강(금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해전을 벌였으나 궤멸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사비를 되찾으려던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400여 척의 배가 불타며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고 전해집니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했고, 남은 부흥군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었던 백제 부흥 운동은 막을 내리고 사비는 확실한 신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671

[소비군 설치와 신라의 통치]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사비 지역에 소비군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작합니다. 화려했던 수도 사비는 이제 신라의 지방 행정 단위인 '군'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옛 왕도의 상징성을 인정하면서도 철저한 감시를 병행했습니다. 사비라는 이름 대신 소비(所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도성의 화려한 건물들은 점차 퇴락하거나 신라식으로 변모해갔습니다. 수도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지역의 중심지 역할은 유지했습니다.

757

[부여군으로 명칭 변경]

통일 신라 경덕왕 시기에 전국 행정 구역 명칭을 한자식으로 개편하면서 소비군이 부여군으로 바뀝니다.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부여'라는 이름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 명칭 변경은 백제가 표방했던 '남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나라는 망했으나 지명 속에 백제의 뿌리가 남게 된 것입니다. 부여군은 웅주(현재의 공주) 아래 소속되어 금강 유역의 거점 도시로 남았습니다.

940

[고려 시대의 부여현]

고려 태조 왕건이 행정 구역을 재편하며 부여를 부여현으로 편제합니다. 사비의 옛 터전은 이제 농경과 수운이 중심인 조용한 고을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부여는 금강을 통한 물자 수송의 요충지였습니다. 도성의 흔적들은 밭 아래 묻혔으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같은 석조 유물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과거를 증언했습니다. 간간이 사비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시인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1413

[조선 시대 부여현의 정체성]

조선 태종 시기에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부여현은 공청도(충청도)에 속하게 됩니다. 유교적 통치 질서 아래에서도 백제의 고도라는 역사적 가치는 여전히 인정받았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비를 방문하여 낙화암과 조룡대를 유람하며 망국의 한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습니다. 관청 건물이 들어서고 유교 서원들이 세워졌지만, 땅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백제의 기와와 초석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비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용히 보존되었습니다.

1592

[임진왜란과 사비 유적의 수난]

임진왜란 당시 부여 지역도 전란의 피해를 입으며 남아있던 고대 건축물과 유물들이 소실되거나 훼손됩니다. 사비의 흔적을 간직한 사찰들과 비석들이 이 시기에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왜군의 이동 경로에 있던 부여는 전투와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부소산성과 주변의 유적지들이 방치되거나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전란 이후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고대 백제의 원형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1895

[부여군으로의 승격]

조선 말기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여현이 다시 부여군으로 승격됩니다. 이는 현대적인 지자체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조치였습니다.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작은 고을들을 통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고학적인 발굴이나 사비 도성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비의 진실은 아직 흙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1915

[일제강점기 유적 조사 시작]

조선총독부가 문화재 보존을 명목으로 사비 도성 유적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나, 동시에 수탈의 위협에도 노출되었습니다.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등에 대한 예비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대한 보수 작업도 이루어졌으나, 식민 사관에 입각한 왜곡된 해석이 덧씌워지기도 했습니다. 사비의 역사가 근대 고고학의 틀에서 처음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1945

[광복과 사비 연구의 주권 회복]

대한민국의 광복과 함께 사비 백제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직접 연구하고 보존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됩니다. 부여에 박물관이 세워지며 유물 관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조사 자료를 정리하고, 우리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유적 보존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사비를 지키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이는 훗날 대대적인 발굴 조사의 밑거름이 된 소중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65

[궁남지 대대적 정비]

무왕의 전설이 깃든 궁남지를 복원하고 주변을 관광지로 조성하는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됩니다. 이를 통해 잊혔던 백제 조경의 아름다움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수풀만 무성했던 연못을 준설하고 버드나무를 다시 심었습니다. 연못 가운데에 정자인 포룡정을 세워 운치를 더했습니다. 오늘날 부여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궁남지의 현대적 원형이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1971

[사비 도성 발굴 계획 수립]

정부 차원에서 사비 도성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수립합니다. 이는 단순한 발굴을 넘어 역사 도시 부여를 재건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습니다.

나성과 부소산성의 연결 구조를 확인하고, 도성 내부의 격자형 도로망을 찾기 위한 시굴 조사가 포함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수십 년간의 끈기 있는 발굴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사비는 비로소 '기록 속의 도시'에서 '실체적인 공간'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93

[백제금동대향로의 기적적 발견]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확장 공사 중 진흙 속에서 원형 그대로의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됩니다. 이는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의 성과 중 하나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향로는 진흙 덕분에 산소와 차단되어 1,300년 전의 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의 긴박함과 감동은 백제 문화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사비 백제가 지녔던 철학과 예술 수준을 전 세계에 알린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201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비 도성의 핵심 유적들이 포함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이로써 사비는 인류가 함께 보호해야 할 소중한 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정림사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이 등재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사비가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입니다. 부여는 이제 세계적인 역사 관광 도시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021

[사비 나성 동문지 확인]

지속적인 발굴 조사 끝에 사비 나성의 동문 터를 정확히 확인하고 성벽의 축조 기법을 규명합니다. 이를 통해 사비 도성의 실제 규모와 방어 체계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동문지는 성벽의 단절된 부분을 통해 문이 있었음을 입증해주었습니다. 정교한 판축 기법으로 쌓아 올린 성벽은 당시 백제의 토목 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굴된 유물들은 사비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2024

[디지털 기술로 되살아난 사비]

VR과 AR 기술을 활용하여 1,400년 전 사비 도성의 화려한 모습을 가상 현실로 완벽하게 복원합니다. 이제 방문객들은 스마트 기기를 통해 과거의 사비 거리를 직접 걷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정림사지 중문의 모습과 궁궐의 전경을 3D로 재현하여 교육적 가치를 높였습니다. 디지털 복원은 물리적 복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비는 과거의 유물에 머물지 않고 미래 기술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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