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도시, 수도, 역사 도시, 행정구역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14
평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입니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한국 전쟁 이후 재건되어 계획도시로 발전했습니다. 현대적인 건축물과 독특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관광 통제와 독특한 시민증 제도 등 사회주의 체제의 특색을 엿볼 수 있는 도시입니다.
BC 10C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검성 추정]
평양은 옛부터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부루나', '바라나'로 불렸습니다. 현재의 평양 지역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인 왕검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평양의 유구한 역사와 고대 문명과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평양은 옛부터 '부루나', '바라나'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는 평평한 땅을 의미합니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어, 평양이 한반도 고대사의 중요한 중심지였음을 시사합니다. 주변에는 낙랑, 고구려의 고분군과 선사 시대의 고인돌군 등 대규모 무덤이 분포하여 오랜 역사를 증명합니다.
427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
고구려의 장수왕은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강화하고 새로운 영토 확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평양이 고구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427년에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습니다. 이 결정은 고구려가 보다 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남쪽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적 조치였습니다. 평양 천도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당시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586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성]
고구려 평원왕 시대인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습니다. 이 시기 평양은 고구려의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서 위대한 고구려의 마지막 숨결을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고구려 평원왕이 586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래, 평양은 668년 고구려 멸망의 순간까지 약 80여 년간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평양은 대외 관계와 국방의 요충지이자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중심지였으나,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며 고구려 역사의 종말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918
[고려 시대, 제2의 수도 '서경']
고려 시대,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리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태조 왕건은 평양을 '서경'이라 칭하며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고, 여러 차례 부흥 정책을 추진하며 수도 개경 다음가는 제2의 수도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고려 시대에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리며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태조 왕건은 개경과 함께 서경을 중시하고 여러 정책을 통해 부흥시켰으며, 이는 고려 초기부터 서경이 단순한 지방 도시를 넘어 국가 운영의 핵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서경은 황폐해진 평양을 재건하고 활성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947
[고려 정종의 서경 천도 시도 좌절]
고려 정종은 도참설에 따라 서경에 성을 쌓고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귀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반발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시 고려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민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947년, 고려 정종은 도참설에 근거하여 서경(평양)에 새로운 성을 쌓고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개경의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과 백성들의 불안감을 초래했고, 결국 정종의 서경 천도 시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 그리고 민심이 정치적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1136
[묘청의 서경 천도론 좌절]
고려 인종 시기, 묘청, 정지상 등이 서경 천도론을 적극적으로 건의하며 개경의 보수 세력에 맞섰습니다. 이는 고려의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었으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반발과 민심 이탈로 인해 결국 좌절되었습니다.
1136년, 고려 인종에게 승려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이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습니다. 이들은 서경이 왕업을 일으킬 길지라고 주장하며 개경의 낡은 세력을 비판했으나, 김부식을 필두로 한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와 백성들의 지지 부족으로 인종은 천도 계획을 중단시켰습니다. 결국 묘청은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 사건은 고려 사회의 보수화와 문벌 귀족 체제의 강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300
[신돈의 평양 천도 건의]
고려 말기, 신돈은 공민왕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는 당시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개하고 새로운 개혁을 위한 시도였으나, 공민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고려 말기, 개혁 정치가인 신돈은 공민왕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폐단으로 혼란했던 개경을 벗어나 새로운 개혁의 동력을 얻으려는 의도였으나, 이 역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공민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평양이 고려 시대에도 여러 차례 천도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줍니다.
1392
[조선 시대의 관서 지방 행정 중심지]
조선 시대에도 평양은 국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평안도 감영의 소재지로서 관서 지방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북방 방어의 요충지이자 상업적으로도 발달한 중요한 도시로 기능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평양은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서의 위상을 유지했습니다. 평안도 감영의 소재지로서 관서 지방(평안도)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맡았으며, 평안 감사(觀察使)가 파견되어 이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북방 경계 방어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도 발전하여 조선 시대 평양은 번화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평양 주민들이 이에 맞서 배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쇄국 정책과 서양 열강의 침략 야욕이 충돌한 중요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1866년 8월,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이에 평양 지역의 군민(軍民)들은 강력하게 저항하여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서양 세력의 접근과 이에 대한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894
[청일전쟁의 격전지]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시, 평양은 청군과 일본군 사이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평양의 도시 기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 중, 평양은 청군과 일본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주요 전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평양성 전투는 전쟁의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평양시는 막대한 인명 및 물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평양이 단순히 한반도의 도시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896
[평안남도 소속]
조선 건양 1년(1896년), 평안도가 남북으로 분할되면서 평양은 평안남도에 소속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말기 행정 구역 개편의 일환으로, 평양의 행정적 위상에 변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1896년, 조선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평안도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분할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평양시는 평안남도의 감영 소재지가 되면서, 평안남도의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의 행정 구역 변화는 근대적인 지방 통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1901
[평양신학교 개교 및 최초 목사 배출]
1901년부터 평양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 신학교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며, 기독교 확산과 교육의 중심지로서 평양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1901년 평양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즉 평양신학교가 개교했습니다. 이 신학교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를 배출하는 등 근대 기독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며,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 신자가 크게 확산되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의 상업 문화와 능력 중시 풍조가 기독교 수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1902
[고종의 서경 육성 계획 좌절]
대한제국 고종은 평양을 서경으로 육성하고자 하여 풍경궁을 설치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이 좌절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902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평양을 다시 서경으로 육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풍경궁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평양의 역사적 중요성을 되살리고, 제국의 또 다른 중심지로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고종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이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1913
[일제에 의한 평양 '부' 지정]
일제 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일제가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행정 구역 개편의 일환으로, 평양의 행정적 지위를 변화시켰습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평양을 부(府)로 지정하여 일제 식민 통치 하의 행정 구역 체계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평양이 식민 지배를 위한 주요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함께 평양은 근대적인 도시 시설이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1914
[평양부 영역 축소 및 대동군 분리]
1914년, 조선총독부는 평양부의 영역을 시가지 일대로 축소하고, 교외 지역을 대동군으로 분리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효율적인 도시 관리를 위한 조치였으며, 평양의 도시 경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14년에 조선총독부는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평양부의 영역을 시가지 중심으로 축소했습니다. 평양부의 교외 지역은 대동군으로 분리되어 농촌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는 도시와 농촌의 행정적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일제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평양의 도시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1920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 시작]
192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의 일환인 물산장려운동이 평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국산품 애용을 통해 민족 산업을 육성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20년, 민족 지도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산품을 애용하여 민족 자본을 육성하고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려는 이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며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경제적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평양은 이러한 민족 운동의 중요한 발상지 중 하나였습니다.
1923
[평양 최초의 전차 노선 개통]
평양에 전차 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으며, 이는 평양 시내 대중교통 체계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개통 첫날에만 1만 5천 명의 승객이 이용할 정도로 시민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1923년 5월 20일, 평양에 최초의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평양 인구 10만 명에게 현대적인 대중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개통 첫날 1만 5천 명이라는 엄청난 승객 수를 기록하며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전차의 도입은 평양의 근대 도시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인프라 구축이었습니다.
[대동교 개통 및 전차 노선 연장]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대동교가 개통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의 동서 지역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으며, 대동교를 지나는 전차 노선도 함께 개설되어 도시의 교통 편의를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1923년 11월 30일, 대동강을 건너는 대동교가 개통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평양의 강좌(江左)와 강우(江右)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 인프라였으며, 이와 함께 대동교를 지나는 전차 노선도 개설되어 시민들의 이동 편의를 크게 증진시켰습니다. 대동교의 개통은 평양의 도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31
[평양 반중·반화교 폭동]
만보산 사건의 여파로 평양에서 반중·반화교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동은 극심한 양상을 띠어 중국인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 실종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31년 7월 5일과 6일, 만주 만보산 사건의 여파로 평양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극심한 충돌인 반중·반화교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동으로 인해 수백 명의 중국인들이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의 이간질 정책과 당시 복잡한 사회상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역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38
[평양부 영역 확장]
대동군에 속했던 대동강면, 서천면, 추을미면이 평양부에 편입되면서 평양의 영역이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외연을 넓히고 행정 구역을 재조정하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1938년, 일제는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대동군의 대동강면, 서천면, 추을미면을 평양부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로써 평양부의 행정 구역이 확장되어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이 근대적인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변화 중 하나입니다.
1946
[평양특별시로 승격]
광복 후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군정이 들어섰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부를 평안남도에서 분리하여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을 포함하는 '평양특별시'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는 평양이 북한의 행정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광복 후 1946년 9월 1일, 38선 이북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하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평양특별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때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게 되었으며, 이는 평양이 북한 지역의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8
[소련군 한반도 철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같은 해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남북한 각각의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같은 해 소련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이는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이 종료되고, 남북한이 각기 다른 체제로 독립적인 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평양은 이 시기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수도로서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1950
[북한 수뇌부의 평양 철수 준비]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뇌부와 주요 기관의 평양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세의 역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움직임이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성공적으로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수뇌부와 주요 정부 기관, 노동당, 부대 등을 평양에서 후퇴시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초기의 전세가 북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중대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북한군의 평양 후퇴작전 전개]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본격적인 평양 후퇴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북한 정권이 일시적으로 평양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피난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0월 9일부터 평양에서 주요 세력의 본격적인 후퇴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이 작전은 북한 정권이 평양을 방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잠시 수도를 포기하며 전력을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평양은 곧 UN군에 의해 수복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의 평양 수복]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수복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연합군이 북진하여 북한의 수도를 점령한 중요한 군사적 성과였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수복했습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UN군의 북진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평양을 수복한 UN군은 한반도 통일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내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급변하게 됩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한국 전쟁 개입]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UN군의 진격을 막아섰습니다.
1950년 10월 24일 온정리 전투를 기점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UN군의 압도적인 북진에 맞서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북한과 중국의 연합 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UN군은 큰 타격을 입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평양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한 국군의 평양 철수]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남한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는 평양이 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1차 공세 이후, 1950년 11월 26일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면서 UN군과 남한 국군은 큰 압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12월 4일 남한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평양은 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평양의 지배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북한의 평양 재입성]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에 힘입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양으로 재입성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평양의 주인이 다시 바뀌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북한 정권이 수도를 되찾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1950년 12월 6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공세에 힘입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양으로 다시 입성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북한이 수도 평양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가 다시 수복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북한 정권에게는 큰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평양은 전쟁의 격변 속에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1952
[평양직할시로 행정 구역 변경]
북한의 행정 구역 체계가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되면서 평양은 '평양직할시'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전쟁 중에도 도시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려는 북한 당국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1952년 8월 1일, 한국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북한은 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했습니다. 이 개편의 일환으로 평양은 '평양직할시'로 변경되어,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이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전쟁 중에도 효율적인 행정 체계 구축을 시도하려는 북한 당국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1956
[만경대구역, 서성구역 신설]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이 신설되어 평양의 행정 구역이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전쟁 이후 도시 재건 및 확장에 따른 행정적 조치였습니다.
1956년, 평양시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이 새로 신설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도시 재건과 인구 증가에 발맞춰 행정 구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평양은 현대적인 도시 형태를 갖추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7
[신도시 건설 추진 및 도시 구획 재정비]
인구 증가에 따라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평양은 본평양, 서평양, 동평양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도시 확장과 다양한 건축물 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1967년부터 평양에서는 인구 증가에 대응하여 대규모 신도시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양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본평양(강 좌측 중심부), 서평양(강 서쪽), 동평양(강 동쪽)으로 구획이 나뉘며 체계적인 도시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이 사회주의 계획도시로서 면모를 갖추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72
[평양특별시로 재승격 및 공식 수도 지정]
평양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적인 수도가 되면서 '평양특별시'로 재승격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의 국가적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한 사건입니다.
1972년 1월 1일, 평양은 임시수도에서 벗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수도로 지정되며 '평양특별시'로 재승격되었습니다. 이로써 평양은 명실상부한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3
[평양 지하철도 개통]
평양 지하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서울보다 1년 빠른 개통으로, 평양 지하철은 전시에는 방공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땅 속 깊이 건설된 것이 특징입니다.
1973년, 평양 지하철도가 개통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서울의 지하철 개통보다 1년 빠른 것이었으며, 평양 지하철은 단순한 교통 수단을 넘어 전시에는 시민들을 위한 방공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땅 속 깊이 건설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2개 노선으로 시작하여 현재 3개 노선을 운영 중입니다.
2006
[평양직할시로 재격하]
평양특별시가 '평양직할시'로 다시 격하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는 행정 구역 체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1월 1일, 평양의 행정적 지위가 '평양특별시'에서 '평양직할시'로 다시 격하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19개 구역과 4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행정 구역의 변화는 북한 내부의 정책적 판단과 행정 효율성 증대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평양의 행정적 위상이 유동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10
[평양 일부 행정 구역 황해북도로 이관]
평양에 속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의 행정 구역이 크게 축소되는 변화였습니다.
2010년 1월 1일, 평양직할시에 속해 있던 중화군, 상원군, 승호구역과 강남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평양의 면적이 크게 줄어들고 인구도 감소하는 등 행정 구역에 대규모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평양의 자급자족 체제를 강화하거나 도시의 인구밀도를 조절하려는 의도로 분석됩니다.
2011
[강남군 평양직할시로 재편입]
전년에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던 강남군이 다시 평양직할시로 재편입되었습니다. 이는 행정 구역 조정이 유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11년 1월 1일, 전년에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던 강남군이 다시 평양직할시로 재편입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평양시의 행정 구역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중앙 정부의 도시 운영 계획에 따라 지방 행정 구역이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강남군 재편입으로 평양의 면적은 다소 회복되었습니다.
2013
[평안남도 평양시로 재차 격하]
평양직할시가 '평안남도 평양시'로 다시 격하되었고, 구 자강도 향산군 묘향산구역이 평안남도 평양시 모란봉구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평양의 행정적 지위가 또다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013년 9월 9일, 평양직할시가 '평안남도 평양시'로 재차 격하되는 행정 구역 개편이 단행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구 자강도 향산군 묘향산구역이 평안남도 평양시 모란봉구역으로 편입되는 등, 주변 지역과의 행정적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평양의 지위와 관할 구역이 북한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18
[방현동 평안남도 평양시 편입]
구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이 평안남도 평양시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평양의 행정 구역에 다시 한번 변화가 생겼습니다.
2018년 2월 10일, 구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이 평안남도 평양시에 편입되는 행정 구역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평양이 도농통합형 도시를 추구하며, 시가지와 농지 면적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북한 당국의 도시 계획 방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양은 전체 토지 중 농지 면적이 과반을 차지하여 농산물의 자급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