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고대 행정 구역, 중국 군현, 한반도 고대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12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반도 북부에 설치한 중국 군현입니다. 약 420년간 존속하며 한반도 및 만주 일대 민족들과 교류하고 대립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사군 중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최종적으로 축출되었습니다. 그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BC 2C
[위만조선 멸망 및 낙랑군 설치]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낙랑, 진번, 임둔의 세 군을 설치하여 직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사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원전 108년(원봉 3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무제는 위만조선의 영내에 낙랑·진번·임둔 3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현도군을 추가로 설치하여 직할 통치 하에 두었다.
BC 1C
[진번·임둔 폐지 및 낙랑군 편입]
한나라 무제가 설치했던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고, 그 영역이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낙랑군의 관할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기원전 82년(시원 5년), 진번·임둔을 폐지하여 각기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시켰다.
[현도군 일부 현 낙랑군 편입]
토착민들의 반발로 현도군이 이전되면서, 현도군 및 구 임둔군의 일부 현들이 낙랑군에 편입되어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최종적으로 낙랑군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5년에는 토착민들의 반발로 현도군이 집안 방면(국내, 환도 지역)으로 이치되었다. 이때 현도군·구 임둔군의 일부 현들이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25
[낙랑군 왕조의 반란]
신나라 말 혼란기에 낙랑군에서 토착민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살해하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습니다. 이는 중국 본토의 혼란이 낙랑군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25년에는 낙랑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라고 칭하였다.
30
[후한의 낙랑군 수복 및 동부도위 폐지]
후한 광무제가 왕준을 파견하여 낙랑의 호족과 합세해 왕조의 반란을 진압하고 낙랑군을 수복했습니다. 이때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영동 7현이 포기되면서 낙랑군의 영역이 축소되었습니다.
후한이 건국되고 광무제가 군벌들을 제압하는 가운데 30년에 왕준(王遵)을 파견하여 낙랑의 호족 왕굉(王閎) 등과 합세, 왕조를 죽이고 낙랑군을 수복하였다. 이때 후한은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영동 7현을 포기하였다.
180
[공손탁의 낙랑군 지배 시작]
2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낙랑군까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와 삼한의 성장은 낙랑군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2세기 후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공손도)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및 한(韓)이 강성하여 낙랑군은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204
[대방군 설치]
공손강이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유민의 유출을 막고 낙랑·대방군의 쇠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대한 중국의 통치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손강은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아 낙랑·대방군의 쇠퇴를 막았다.
238
[위나라의 낙랑·대방군 평정]
위나라 명제가 사마의로 하여금 공손연을 토벌할 때 유흔과 선우사를 보내 낙랑군과 대방군도 평정했습니다. 이로써 낙랑군은 다시 중국 본토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위 (삼국)나라가 건국된 후 238년 조예 명제가 사마의로 하여금 공손연을 토벌할 때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낙랑·대방도 평정하였다.
304
[오호십육국시대 혼란과 낙랑군의 종속화]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군벌 장통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국 본토의 통제력 약화를 보여줍니다.
304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 군현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고 군벌 장통(張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13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을 공격하여 2천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고, 군벌 장통은 일부 민호를 이끌고 요동의 모용씨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420여 년 만에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313년에 미천왕이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장통이 일부 민호를 이끌고 요동의 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낙랑군은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