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광역시, 대한민국 도시, 항구 도시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7:04
부산광역시는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해양(항구) 도시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삼한 시대 거칠산국 등 부족국가에서 시작해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쳤다. 개항 이후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한국 전쟁 임시 수도로서 급성장하며 직할시, 광역시로 승격했다. 현재는 해상 무역과 물류, 관광, 문화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BC 9k
부산 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50
[삼한시대 부족국가 형성]
삼한 시대에 동래 일대에 거칠산국, 기장 일대에 장산국과 내산국, 서면 일대에 가락국 등 다양한 부족국가들이 부산 지역에 존재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나 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이, 기장, 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이나 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90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400
내물마립간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백제,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했다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패망하자 부산 전역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이 되고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이 되었다.
757
[거칠산군, 동래군으로 개칭]
경덕왕의 행정개편으로 거칠산군이 양주 소속의 동래군으로 바뀌고, 대증현은 동평현으로 개명되어 동래군 관할이 되었다.
남북국 시대인 757년 경덕왕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거칠산군은 양주(현재 양산시) 소속의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개명되어 기장현(機張)과 함께 동래군의 관할현이 되었다.
1018
고려 시대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울주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1397
1397년 동래군에 진이 설치되었다.
1405
[동래현 독립 및 행정구역 재편]
조선 시대에 울주의 속현이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인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425
['동래부산포' 명칭 첫 등장]
《경상도지리지》에 '동래부산포'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여러 문헌에 등장하며 부산의 옛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경상도지리지》(1425년) ,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년) 따위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부산포는 “부자 富”를 썼다.
1431
《태종실록》(1431년)에 '''富山'''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년) ,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년) 따위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부산포는 “부자 富”를 썼다.
1470
['釜山' 지명 첫 등장]
《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한자 표기가 처음으로 나타나며, 이는 '富山'과 혼용되다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의 성종실록에 '''釜山'''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두가지 표기가 같이 쓰였다. 그러나 이후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 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547
동래는 1547년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다.
1592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 해전 대승]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해전에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어 해상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월 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
1876
1876년 조일수호조약에 의해 조선이 강제 개항되었을 때,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되었고,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1877
[부산구거류지약조 체결 및 일본 영향력 확대]
부산구거류지약조 체결로 일본이 부산에 관리관을 파견하며 일본인 거류지를 조성하고 통상 사무를 관장, 부산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부산은 1877년 1월 《부산구거류지약조》의 체결로 일본이 일본인들의 보호관리 및 통상사무의 관장을 위해 관리관을 파견하면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880
[일본 영사관 설치 및 거류지 확대]
일본이 부산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일본인 거류지를 확장하며, 부산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 통치 교두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880년, 일본은 영사관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일본 거류지를 사실상의 일본 영토처럼 만들어 버렸다. 일본은 일본인 가구가 200여 호밖에 안 되던 때부터 장기적으로 도로망을 계획하고 가옥 구조를 규제했으며, 1880년대에 일본은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까지 모두 마치고 식민 통치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부산은 개항 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일본의 도시처럼 변했고 소수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도시로 되어갔다.
1895
[동래부 동래군으로 개편]
조선 말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부가 동래군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는 근대 부산의 행정 체계 변화의 일부였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동래부(東萊府) 동래군이 되었고, 이듬해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부산항이 무역항으로 정비되면서 항구도시로써 발전하게 된다.
1905
[경부선 개통 및 부산역 개업]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부산역이 문을 열면서 부산은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하며 도시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1905년에는 경부선이 개통함과 함께 부산역이 개업했다.
1914
[부산부와 동래군 분할]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부가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할되었고, 기장군이 동래군에 편입되며 지역 행정 체계가 재편되었다.
일제강점기 1914년 4월 1일에 부산부(釜山府)는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할되었고 동시에 외곽의 기장군이 동래군으로 편입되었다.
1925
[경상남도청 부산 이전]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 아미동으로 이전하며 부산이 영남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5년 4월 1일에는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 아미동으로 이전되었다.
1936
1936년 동래군 서면(현 부산진구 일대)과 사하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2년 동래군 동래읍(현 동래구), 사하면, 남면, 그리고 북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2
[동래읍 등 부산부 추가 편입]
동래군 동래읍과 사하면, 남면, 북면 일부가 부산부에 추가로 편입되며 부산의 도시 확장 및 행정구역 재편이 계속되었다.
1936년 동래군 서면(현 부산진구 일대)과 사하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2년 동래군 동래읍(현 동래구), 사하면, 남면, 그리고 북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
1949년 8월 15일 부(府)를 시(시)로 개칭하면서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1950
[한국 전쟁 임시 수도 역할]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이 함락되자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어 전국의 피난민들이 모여드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많은 피란민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했고,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 관할에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칭이 '부산직할시'가 아니라 그냥 '부산시'였고, 단지 정부 직할이기 때문에 앞에 경상남도만 붙지 않았을 뿐이었으며, 198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부산직할시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당시의 신문 기사 등을 살펴보면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라는 명칭도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직할시'이기는 하였으나 '부산직할시'는 아닌 과도기의 명칭으로, 이 시기를 부산직할시로 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경상남도 산하 시절과 정부 직할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앞에 '정부 직할'을 괄호 병기하여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하는 추세이다.
1963
[정부 직할 부산시 승격]
부산이 경상남도 관할에서 정부 직할시로 승격하며 행정적 독립성을 확보하고 도시 발전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많은 피란민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했고,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 관할에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칭이 '부산직할시'가 아니라 그냥 '부산시'였고, 단지 정부 직할이기 때문에 앞에 경상남도만 붙지 않았을 뿐이었으며, 198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부산직할시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당시의 신문 기사 등을 살펴보면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라는 명칭도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직할시'이기는 하였으나 '부산직할시'는 아닌 과도기의 명칭으로, 이 시기를 부산직할시로 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경상남도 산하 시절과 정부 직할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앞에 '정부 직할'을 괄호 병기하여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하는 추세이다.
1978
[김해군 일부 부산시 편입]
김해군 대저읍과 명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부산의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도시 규모가 더욱 커졌다.
1978년 2월 15일 낙동강 서쪽의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었다.
1981
['부산직할시' 공식 명칭 사용]
지방행정법 개정을 통해 '부산직할시'라는 명칭을 법령상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도시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졌다.
1981년 4월 4일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 개정으로 법령상 공식적으로 '부산직할시'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
1989
[김해군 녹산면, 가락면 강서구 편입]
김해군 녹산면과 가락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며 부산의 서부 지역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89년 1월 1일 김해군 녹산면, 가락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1995
[기장군 신설 및 부산 편입]
양산군 기장읍, 장안읍 등 5개 면이 부산에 편입되어 기장군이 신설되었고, 부산의 행정 구역이 동부로 대폭 확장되었다.
1995년 양산군 기장읍, 장안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이 부산으로 편입되어 기장군이 신설되었다.
[부산직할시, 부산광역시로 개칭]
지방자치법 재개정으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일괄 개칭됨에 따라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바뀌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1994년 12월 20일 지방자치법이 재개정됨에 따라 1995년 1월 1일자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일괄 개칭되어 부산직할시에서 부산광역시로 개칭되었다.
1996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시작]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어 부산이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국제적인 문화 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96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를 열었다.
1999
[시청사 연제구 이전]
부산 시청사가 중구에서 연제구로 이전하며 법원, 검찰청 등 주요 관공서도 함께 이전, 도시의 새로운 행정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1999년에 시청사가 중구에서 연제구로 이전하였고, 시청 주변으로 법원·검찰청 등의 관공서도 이전하였다.
2002
[FIFA 월드컵 및 아시안 게임 개최]
부산에서 FIFA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국제적인 스포츠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2002년 FIFA 월드컵, 2002년 아시안 게임이 열렸고, 2005년 11월 18일에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2005
[APEC 정상회담 개최]
부산에서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하고 글로벌 협력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2002년 FIFA 월드컵, 2002년 아시안 게임이 열렸고, 2005년 11월 18일에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