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 수난사

미술박물관, 국립 박물관,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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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14- 12: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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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수난사는 문화유산 보존을 둘러싼 거대한 투쟁의 축소판이다. 국가 권력의 약탈로 태동하여 개인의 절도, 이념적 공격, 조직적 범죄의 표적이 되기까지, 루브르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였고, 견고한 요새인 동시에 끊임없이 공격받는 목표물이었다. 그 역사는 정적인 영광이 아닌, 위기를 통해 보안과 정체성을 재정립해 온 역동적 갈등의 기록이다. 이 영원한 대결의 상대는 단지 도둑이나 파괴자뿐만이 아니라, 안일함과 변화하는 시대의 가치관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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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

[나폴레옹의 '위대한 박물관' 건립을 위한 약탈]

프랑스 혁명 정부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독일, 스페인 등 점령지에서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약탈하여 루브르(당시 '나폴레옹 박물관')로 이송했다. 이는 루브르 컬렉션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동시에 약탈 문화재라는 원죄를 남겼다. 이 사건은 국가 주도의 문화유산 탈취에 대한 국제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품 약탈은 단순한 전리품 획득을 넘어선, 국가적 자부심과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고도로 조직된 프로젝트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예술품을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고향'인 공화국 프랑스에서 만인이 향유하게 한다는 계몽주의적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수사는 군사적 정복 행위에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 과정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나폴레옹은 군대와 함께 예술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commissaires)를 파견하여 점령지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선별하도록 했다.

특히 패전국에게 강요된 평화 조약에는 예술품 양도를 명시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1797년 교황청과 맺은 톨렌티노 조약이 대표적인 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고대 로마의 걸작 조각상인 '아폴로 벨베데레', '라오콘 군상' 등을 합법적인 형태로 탈취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1802년 루브르(1803년 '나폴레옹 박물관'으로 개칭)의 관장으로 임명된 도미니크-비방 드농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눈'이라 불린 그는 직접 군대를 따라다니며 유럽 전역의 예술품을 선별했다. 그의 지휘 아래 루브르는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 안트베르펜에서 온 루벤스의 작품들, 그리고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약탈한 수천 점의 걸작들로 채워졌다.

1815

[나폴레옹 약탈품 반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하자,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루브르로 보내졌던 많은 예술품들이 원래 고국으로 반환되었다.

이 시기에 박물관장이 일부 작품을 지하실에 빼돌려 돌아가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907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도난 조각상]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비서였던 제리 피에레가 루브르에서 고대 이베리아 두상 여러 점을 훔쳤다. 이 조각상들은 당시 무명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팔렸고, 피카소는 이 조각상의 원시적인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했다. 이 사건은 당시 루브르의 허술한 보안 실태와 함께, 박물관의 유물이 어떻게 아방가르드 예술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기묘한 연결고리를 드러냈다.

20세기 초 루브르의 보안은 상상 이상으로 허술했다. 당시 많은 유물들은 별도의 잠금장치나 유리 진열장 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경보 시스템도 전무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비서였던 오노레-조제프 제리 피에레는 1907년 3월경, 외투 속에 작은 이베리아 석조 두상들을 숨겨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이 도난은 너무나 손쉬웠기에 한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피에레는 훔친 두상 중 최소 두 점을 단돈 50프랑에 파블로 피카소에게 팔았다. 당시 피카소는 서구 고전주의의 전통에서 벗어날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하고 있었고, 루브르 전시에서 보았던 이베리아 조각의 원시적이고 강렬한 형태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는 도난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조각상들을 구매했으며, 그 형태를 자신의 혁신적인 작품에 직접적으로 차용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바꾼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각지고 단순화된 표현은 명백히 이베리아 두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기묘한 사건은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보상금을 노린 피에레가 신문사에 자신의 절도 행각을 제보했고, 이로 인해 경찰은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를 '모나리자'를 훔칠 만한 고도의 예술품 절도단의 일원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체포된 두 사람은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조각상들을 센 강에 버리려 했으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법정에서 피카소는 울면서 아폴리네르를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했다. 결국 판사는 이들의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사건을 기각했지만, 이 경험은 두 예술가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911

[잡역부 페루자에 의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

루브르의 전직 잡역부였던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가 박물관 휴관일에 숨어들어가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났다. 다음 날 그림이 없어진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아무도 도난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모나리자는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2년간의 추적 끝에 페루자가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팔려다 검거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연관사건

루브르 역사상 최악의 굴욕으로 기록된 이 사건의 범인은 박물관의 보안 시스템을 훤히 꿰뚫고 있던 전직 잡역부 빈첸초 페루자였다. 그는 이전에 '모나리자'의 보호 유리를 설치하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페루자는 나폴레옹이 '모나리자'를 약탈해왔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그림을 조국 이탈리아로 되돌려 놓겠다는 애국심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그림을 팔아 보상금을 챙기려 한 정황으로 보아 금전적 동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범행은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박물관 휴관일에 이루어졌다. 페루자는 전날 밤 박물관의 작은 벽장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원용 흰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살롱 카레가 비어 있는 틈을 타 그림을 벽에서 떼어낸 뒤, 비상계단에서 액자와 유리를 분리하고 그림만 외투 속에 숨겨 유유히 빠져나갔다. 당시 관장이 "'모나리자'를 훔치는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호언장담했을 정도로 , 박물관의 보안은 기술적 대비보다는 제도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림이 사라진 사실은 다음 날 한 화가가 모작을 위해 박물관을 찾았을 때 비로소 발견되었다.

1914

[모나리자 귀환]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에서 잠시 순회 전시된 후, 1914년 1월 영웅처럼 루브르로 귀환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그림 한 점의 도난이 아니라, '부재'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을 신화로 만드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였다. 

1939

[나치 약탈에 맞선 '예술품 구출' 대작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당시 프랑스 국립박물관장이었던 자크 조자르는 나치의 예술품 약탈을 예견하고 박물관을 폐쇄한 뒤, 3일 밤낮에 걸쳐 4,000여 점의 주요 소장품을 비밀리에 프랑스 전역의 성(城)과 안전가옥으로 대피시켰다. '모나리자'는 앰뷸런스에 실려 옮겨지는 등, 치밀한 계획과 헌신적인 직원들의 노력으로 인류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이 작전은 루브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항의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루브르는 텅 비어 있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 국립박물관 총책임자였던 자크 조자르의 선견지명과 결단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1938년부터 이미 루브르 소장품의 비밀 대피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939년 8월 25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임박하자 조자르는 '수리'를 명목으로 루브르를 3일간 폐쇄했다. 그 후 3일 밤낮 동안 박물관 직원, 미술학도, 심지어 인근 백화점 직원까지 동원되어 약 4,000점의 예술품을 포장하는 대작전이 펼쳐졌다. 작품들은 중요도에 따라 색깔로 구분된 표식이 붙은 1,862개의 나무 상자에 담겼다. '모나리자'의 상자에는 가장 높은 등급을 의미하는 붉은 원 세 개가 그려졌다.
대피 과정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총 203대의 트럭, 구급차, 개인 차량 등이 동원되었다. '모나리자'는 항온·항습 기능이 유지되는 구급차에 실려 이송되었고, '사모트라케의 니케'나 '메두사호의 뗏목'과 같은 거대한 작품들은 특수 장비와 치밀한 경로 계획을 통해 옮겨졌다. 작품들은 우선 루아르 계곡의 샹보르 성을 비롯한 프랑스 전역 70여 곳의 고성, 수도원 등 안전한 장소로 분산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조자르와 그의 팀은 나치와 비시 협력 정부의 눈을 피해 작품들을 여러 차례 다른 은신처로 옮기는 등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심지어 연합군이 실수로 은신처를 폭격하지 않도록 비밀리에 좌표를 전달했고, BBC 방송은 "모나리자가 미소 짓고 있다(La Joconde a le sourire)"는 암호 방송으로 정보 수신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관료적 시스템 내부에서 이루어진 조용한 저항은, 무력 항쟁만큼이나 효과적인 영웅적 행위였다. 약탈을 목적으로 파리를 점령한 나치군이 마주한 것은 텅 빈 액자들뿐이었고, 이 위대한 작전 덕분에 루브르의 핵심 소장품들은 단 하나도 잃지 않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약탈로 시작된 루브르의 역사가 인류 보편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제도적 구원을 이룬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56

[모나리자  물리적 공격 시작]

이 해에 '모나리자'는 두 차례의 심각한 물리적 손상을 입었다. 먼저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서 전시되던 중 한 관람객이 던진 황산 용액에 그림 하단부가 훼손되었다. 같은 해 12월 30일, 루브르에서는 볼리비아 출신의 우고 운하가 비예가스가 던진 돌에 맞아 보호 유리가 깨지고 그림의 왼쪽 팔꿈치 부분 물감이 떨어져 나갔다. 이 두 사건은 '모나리자'를 보호하기 위한 영구적인 유리 케이스 설치를 촉발했으며, 이후 이는 방탄유리로 강화되었다.

1998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세브르의 길' 도난]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작은 풍경화 '세브르의 길(Le Chemin de Sèvres)'이 액자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범인은 그림만 도려내어 달아났으며,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수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 외에도 루브르의 다른 작품들이 여전히 도난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박물관 보안의 지속적인 과제를 상기시킨다.

'모나리자'의 드라마틱한 역사에 가려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8년의 도난 사건은 루브르 보안의 또 다른 취약점을 드러냈다. 도난당한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인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작은 풍경화 '세브르의 길'이었다.
범인은 일요일 관람 시간 중에 액자에서 캔버스만 예리하게 도려내는 대담한 수법을 사용했다. 사건 발생 후 박물관 측은 즉시 출구를 봉쇄하고 3시간에 걸쳐 관람객들을 수색했으나, 범인은 이미 그림을 숨겨 빠져나간 뒤였다. 작품의 크기가 작아 숨기기 용이했던 점이 범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사건은 2025년 보석 도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루브르에서 일어난 마지막 절도 사건이었다. 당시 루브르 관장이었던 피에르 로젠버그는 박물관의 보안이 "취약하다"고 인정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보안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강화 조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25년이 넘도록 이 그림은 회수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박물관 보안의 딜레마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계적인 슈퍼스타 작품인 '모나리자'에 보안 역량이 집중되는 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여전히 높은 가치를 지닌 수많은 다른 작품들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과 기억 역시 선택적이어서, 회수되지 않은 코로의 작품은 잊혀진 사건으로 남은 반면, 극적으로 회수된 '모나리자'는 신화가 되었다. 이는 박물관의 서사가 소수의 상징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다른 중요한 손실들이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2025

[아폴론 갤러리 보석 도난]

4인조 전문 절도단이 건설 노동자로 위장하고 가구 운반용 리프트(사다리차)를 이용해 박물관 2층 아폴론 갤러리 창문을 뚫고 침입했다. 이들은 경비원을 위협하고 단 4분 만에 나폴레옹 시대의 왕실 보석 8점을 훔쳐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했다. 1911년 '모나리자' 도난 이후 루브르가 겪은 최악의 도난 사건으로, 노후화된 CCTV와 보안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나며 관장이 사임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4인조 절도단은 고도로 조직된 계획에 따라 대담한 범행을 실행했다. 건설 노동자 복장을 한 이들은 파리에서 흔히 사용되는 가구 운반용 외부 리프트(monte-meuble)를 이용해 아폴론 갤러리의 1층 발코니로 접근했다.
절단기로 창문을 뚫고 갤러리 내부로 진입한 이들은 전동 공구로 경비원을 위협하며 두 개의 유리 진열장을 부수었다. 침입부터 탈출까지 걸린 시간은 총 8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실제 박물관 내부에 머문 시간은 4분에 불과했다. 이들은 나폴레옹의 황후 마리 루이즈에게 선물된 에메랄드 목걸이와 오르탕스 왕비의 사파이어 세트 등 프랑스 왕실 보석 8점을 훔쳐 대기하던 스쿠터를 타고 도주했다. 도주 과정에서 외제니 황후의 왕관을 떨어뜨려 손상된 채로 회수되었다. 피해액은 약 8,800만 유로로 추산되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이 사건은 루브르 보안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를 드러냈다. 로랑스 데 카르 관장은 프랑스 상원 청문회에서 "끔찍한 실패"를 인정하며 사임했다. 구체적인 보안 허점으로는 침입 지점을 촬영하지 못한 노후화된 CCTV, 그리고 최근 보안 감사에서 권고된 사항들이 완전히 이행되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 노동조합은 지속적인 보안 인력 감축이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1911년의 '모나리자' 도난이 내부인의 허술한 범행이었다면, 2025년의 보석 도난은 외부 전문 조직에 의한 기술적, 기반 시설적 허점의 공략이었다. 이는 박물관 보안 위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과거의 교훈이 새로운 형태의 취약점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훔친 보석들은 원형 그대로 시장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범인들이 보석을 해체하여 원석과 귀금속 형태로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예술품 절도가 단순한 재판매 목적을 넘어, 문화유산의 영구적인 파괴를 초래할 수 있는 현대적 범죄의 위험성을 시사한다.

[루브르 관장, 보안 실패 인정 및 대책 발표]

프랑스 왕실 보석 도난 사건 이후, 로랑스 데 카르 루브르 관장은 상원에 출석해 박물관 내 경찰서 설치를 요청했다. 그는 노후화된 CCTV 등 보안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며 만성적인 투자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문화부 장관과 대통령이 이를 반려하며 보안 강화를 촉구했다.

사건 발생 3일 후인 10월 22일, 로랑스 데 카르 관장은 상원 현안 질의에 출석하여 "끔찍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경보 시스템은 정상 작동했고 직원들도 신속히 대응했으나, "도둑들의 침입을 충분히 미리 포착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보안 허점으로 일부에만 설치된 노후화된 CCTV와, 침입이 발생한 아폴론 갤러리 발코니를 촬영하지 못한 카메라 문제를 거론하며 "장비와 인프라에 대한 만성적인 투자 부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데 카르 관장은 내무부에 박물관 내 경찰서 설치 검토를 요청하고, 단기적으로는 건물 근처 차량 주차를 막는 제한 장치 설치 등을 제안했다. 그는 사건 당일 라시다 다티 문화부 장관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역시 "견디시라"며 개보수 추진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노조 또한 관장의 사퇴보다는 예산 확보를 통한 재발 방지를 요구했으며, 마크롱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보안 강화 조치 가속화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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