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1200년 육식 금지 역사
일본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2-03- 11:25:43
일본의 1200년 육식 금지 역사는 단순한 종교적 금기가 아닌,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화한 정교한 사회 통제 시스템이었다. 고대에는 농경 사회 유지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고, 중세에는 공공연한 비밀과 편법으로 유지된 문화적 규범이었으며, 근대에는 국가적 생존과 정체성 재편을 위해 극적으로 해체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돈가스, 스키야키, 와규의 탄생은 서구의 충격을 일본 고유의 미학으로 재창조해낸 ‘전통의 발명’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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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무 천황, 최초의 육식금지령 반포]
덴무 천황이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계율을 근거로 '육식금지 조서'를 발표했다. 이 조서는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5가지 동물의 식용을 금지하며 일본 육식 금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농번기인 4월부터 9월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등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선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스카 시대, 중앙집권적 율령 국가 체제를 확립하던 덴무 천황에게 불교는 강력한 통치 이념이었다. 그는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명분으로 내세워 육식을 금지하는 조서를 반포했다. 그러나 조서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읽을 수 있다.
첫째, 금지된 동물 목록은 의도적으로 선별되었다. 야생 멧돼지나 사슴 등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짐승은 제외된 반면, 소와 말처럼 농경 사회의 핵심 동력인 가축이 포함되었다. 이는 당시 국가의 세금 기반이었던 쌀 생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필수 노동력인 농경용 가축을 보호하려는 경제적 목적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둘째, 금지 기간이 4월부터 9월까지로 한정된 점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 시기는 벼농사의 파종부터 수확까지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농번기로, 노동력 손실을 막는 것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결국 덴무 천황의 육식금지령은 종교적 권위를 빌려 핵심 국가 자산(가축)을 보호하고, 쌀 중심의 농경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고도의 정책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짐승의 고기는 더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700
['약식'과 은어 문화의 정착]
에도 시대에 이르러 육식 금지는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았으나, 사람들은 '약으로 먹는다'는 의미의 '야쿠구이(薬食い)'라는 편법을 통해 암암리에 고기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멧돼지를 '산고래', 사슴고기를 '단풍'이라 부르는 등 다양한 은어가 탄생했다. 이는 공식적인 금기와 사적인 욕망 사이의 타협이 만들어낸 독특한 식문화였다.
1200년에 걸친 금기 속에서 일본인들은 육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정교한 편법과 사회적 약속을 통해 욕망을 해소하는 길을 찾았다. 그 중심에는 '쿠스리구이(薬食い)', 즉 '약으로 먹는다'는 명분이 있었다. 멧돼지 고기는 오장에 좋고, 사슴고기는 산후조리에 효능이 있다는 식의 속설이 퍼지면서 고기 섭취는 '치료 행위'로 둔갑했다.
이러한 이중적 문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창의적인 은어들이 고안되었다. 멧돼지는 산에서 나는 고래라는 뜻의 '야마쿠지라(山鯨)' 또는 그 모양을 빗댄 '보탄(牡丹, 모란)'으로 불렸다. 사슴고기는 붉은 살색 때문에 '모미지(紅葉, 단풍)'라는 시적인 이름으로 통했다. 토끼는 가금류처럼 '와(羽)'라는 조수사로 세어 식용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도 했다. 이러한 은어를 사용하는 고기 전문점 '모몬지야(ももんじい屋)'가 성업했으며, 1858년의 우키요에(浮世絵)에도 '야마쿠지라' 간판이 등장할 정도로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육식 문화는 계층과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사무라이 계급은 매사냥(鷹狩り)을 통해 얻은 새나 토끼를 즐겼고, 일부 지역에서는 육식이 일상이었다. 특히 농업에 불리했던 사쓰마(현 가고시마) 지역은 돼지고기 문화가 발달했으며,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는 네덜란드 상인 등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고기 요리가 정착해 있었다. 이는 육식 금지가 중앙 권력의 영향력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는, 엄격한 법률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규범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1853
[흑선 내항, '고기=국력' 인식의 싹]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黒船)의 등장은 일본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일본인들은 서양인들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기술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건장한 체격에 주목했다. 이는 '서양인의 강인함은 육식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싹트게 했고, 고기는 점차 '부국강병(富国強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서양 세력과의 조우는 일본의 가치관을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이전까지 '더러움(穢れ)'의 상징이었던 육식은 이제 국가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자원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서양인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비롯된 신체적 열등감이었다. 일본 지도층과 지식인들은 서양의 힘의 원천을 탐구했고, 그 해답 중 하나를 식생활, 즉 육식에서 찾았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주도한 인물은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였다. 그는 1870년 '육식지설(肉食之説)'을 통해 "지금 우리나라 국민은 육식을 하지 않아 허약하며, 이는 곧 국가적 손실"이라고 주장하며 육식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의 주장은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큰 설득력을 얻었다. 강한 군대와 산업을 위해서는 건강한 국민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영양이 풍부한 고기를 섭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초기에는 문화적 충격도 컸다. 1863년 유럽으로 향하던 일본 사절단은 배에서 카레를 손으로 먹는 인도인을 보고 "지극히 더러운 인물"이라고 기록하는 등, 다른 식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감 속에서 육식은 더 이상 종교나 도덕의 문제가 아닌, 생존과 근대화를 위한 지정학적, 생물학적 과제로 변모했다. 이는 메이지 천황의 결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1872
[메이지 천황, 1200년의 금기를 깨다]
메이지 천황이 궁중 만찬회에서 공식적으로 쇠고기를 시식했다. 이 사건은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1200년간 이어져 온 육식 금기가 사실상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선언이 되었다. 이는 국민 체격 향상을 통한 부국강병과 서양과의 외교적 필요성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육식 해금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선 국민적 저항을 최소화하고 변화에 정당성을 부여할 강력한 상징이 필요했다. 그 해답은 바로 천황이었다. 덴무 천황이 시작한 금기를 메이지 천황이 직접 깨뜨리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1872년 1월 24일, 메이지 천황은 정부 고위 관료들과 함께한 궁중 만찬에서 쇠고기를 맛보았다. 이 소식은 "천황께서 이제부터 고기를 드시기로 하셨다"는 내용으로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는 일본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 상징적 사건을 통해 '육식은 문명개화의 상징'이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이는 서양 외교 사절단을 접대할 때 육류 요리가 필수적이라는 현실적인 외교 문제 해결과도 맞닿아 있었다.
[육식 반대, 황거(皇居) 습격 사건 발생]
천황의 육식 선언에 반발한 10명의 어용 수행자(御嶽行者)들이 황거에 난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육식은 신이 머무는 곳을 더럽히는 행위"라며 전통 질서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이 시도는 근위병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고, 4명이 사살되고 5명이 체포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메이지 천황의 육식 선언은 약 25일 만에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1872년 2월 18일, 흰 옷을 입은 10명의 어용 수행자들이 "육식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며 황거(당시 궁성)에 침입을 시도했다. 이들은 천황에게 육식 금지를 비롯한 전통으로의 회귀를 직접 탄원하려 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폭력도 불사할 계획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짐승의 고기는 부정한 것이며, 이를 먹으면 몸과 마음이 더러워진다"는 수백 년간 뿌리내린 '케가레(穢れ)' 사상에 기반했다. 이들에게 천황의 육식은 국가 전체를 더럽히는 신성모독 행위로 비쳤다. 하지만 근대화를 향한 정부의 의지는 단호했다. 근위병들은 즉각 발포했고, 그 결과 4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5명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이었으며, 동시에 구시대적 가치관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신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1877
[규나베 열풍, 새로운 식문화의 상징]
천황의 육식과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에 힘입어 쇠고기 전골 요리인 '규나베(牛鍋)'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점차 '문명개화의 맛'에 빠져들었다. 불과 5년 만에 도쿄 시내에만 규나베 식당이 550개를 넘어설 정도로, 규나베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대중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와 달랐다. 오랜 금기로 인해 "쇠고기는 더럽다"는 인식이 강해, 새로 생긴 규나베 가게 앞을 코를 막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정부의 지속적인 홍보와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대중의 인식은 놀랍도록 빠르게 변했다.
특히 된장이나 간장 기반의 달콤짭짤한 양념으로 쇠고기를 끓여 먹는 규나베는 일본인의 입맛에 잘 맞았다. '규나베를 먹지 않으면 개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규나베는 단순히 음식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 결과, 1877년에는 도쿄에만 550곳이 넘는 규나베 식당이 생겨나는 등 대중화에 성공했다. 이는 최고 권력자의 상징적 행위와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결합될 때, 얼마나 빠르고 극적으로 문화적 금기가 해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1929
['돈가스'의 탄생: 서양 요리의 완벽한 일본화]
서양의 '커틀릿(Cutlet)'이 일본에 들어와 독자적인 진화를 거듭한 끝에 '돈가스'가 탄생했다. 도쿄 우에노의 '폰치켄(ポンチ軒)'에서 두툼한 돼지고기를 튀김처럼 튀겨내고, 밥과 된장국, 잘게 썬 양배추를 곁들여 파는 현재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이는 서양 요리를 일본의 식사 문화에 완벽하게 편입시킨 '발명'이었다.
육식 해금 이후, 일본은 서양 요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방식대로 재창조했다. 돈가스는 그 대표적인 예다. 돈가스의 원형은 프랑스 요리 '코틀레트(côtelette)'로, 얇게 저민 쇠고기나 송아지고기를 버터에 구워내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일본에 '가쓰레쓰'로 소개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을 계기로 가격이 저렴한 돼지고기를 사용한 '포크 가쓰레쓰'가 등장했다.
결정적인 변화는 1929년, 궁내성 요리사 출신인 시마다 신지로(島田信二郎)가 우에노에 연 '폰치켄'에서 일어났다. 그는 얇은 고기를 버터에 굽는 대신, 두툼한 돼지고기를 덴푸라처럼 많은 기름에 튀겨냈다. 또한 젓가락으로 먹기 편하도록 미리 잘라서 제공했으며, 잘게 썬 양배추와 밥, 미소시루를 함께 내는 '정식(定食)' 형태를 고안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서양의 조리법을 일본의 식사 방식과 미각에 맞춰 완전히 새로운 요리로 재탄생시킨 혁신이었다.
1944
['와규'의 탄생: 실패를 딛고 이룬 품종 개량]
메이지 정부는 쇠고기 수요 증가에 맞춰 1900년부터 외국 소와 재래종을 교배하는 품종 개량을 시작했으나, 이는 오히려 재래종의 장점을 잃는 실패로 이어졌다. 이후 순수 혈통을 보존하고 개량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고, 1944년 마침내 '흑모화종(黒毛和種)'을 공식 품종으로 인정했다. 이 과정은 오늘날 세계 최고급 육우로 평가받는 와규(和牛)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돈가스, 스키야키 등 새로운 요리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원재료인 쇠고기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더 크고 고기 생산량이 많은 소를 만들기 위해 1900년부터 외국 품종과의 교배를 장려했다. 하지만 이는 성질이 거칠고 일본의 사육 환경에 맞지 않는 잡종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고, 오히려 재래종이 가진 우수한 육질의 유전자를 희석시키는 위기를 초래했다.
이러한 실패를 교훈 삼아 1912년부터는 외래종과의 교배를 중단하고, 우수한 재래종 혈통을 선발하고 고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효고현의 다지마 소(但馬牛)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39년에 태어난 전설적인 씨수소 '다지리호(田尻号)'는 현대 흑모화종의 99.9%가 그의 후손일 정도로 와규의 혈통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44년, '흑모화종'이 공식 품종으로 인정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와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되, 결국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발전시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낸 일본 근대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1952
['샤부샤부' 명명, 전후 새로운 미식의 등장]
중국의 양고기 요리 '솬양러우(涮羊肉)'에서 영감을 얻어 일본식 쇠고기 요리로 개발되었다. 1952년 오사카의 '스에히로(スエヒロ)' 본점에서 끓는 육수에 고기를 흔들어 익히는 모습과 소리를 따 '샤부샤부'라는 이름을 붙여 상표 등록했다. 이는 스키야키와는 다른, 담백한 맛을 선호하는 새로운 수요를 충족시키며 일본의 대표적인 고기 요리로 자리 잡았다.
샤부샤부는 일본의 3대 고기 요리 중 가장 늦게 탄생했다. 그 기원은 중국 베이징의 양고기 훠궈 요리인 '솬양러우'에 있다. 이를 일본에 맞게 변형한 것이 시작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양고기 대신 쇠고기를 사용하고, 강한 향신료 대신 다시마를 우린 담백한 국물을 기반으로 했다.
이 '쇠고기 미즈타키(牛肉の水炊き)'는 1947년 교토에서 처음 상품화되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52년, 오사카의 식당 '에이라쿠초 스에히로 본점(永楽町スエヒロ本店)'에서 종업원이 물수건을 헹구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샤부샤부'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고기를 육수에 담가 흔드는 소리와 동작을 표현한 의성어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스키야키보다 더 담백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샤부샤부는 전후 일본인의 새로운 미식 수요를 파고들며 국민 요리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