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관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22:15:04
황보관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캐넌 슈터'로 기억되는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K리그 신인상, 20-20클럽 가입, 월드컵 득점 등 화려한 선수 경력을 보냈습니다. 일본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선수, 코치, 감독, 프런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J리그 GM 교육을 이수했습니다. 국내 복귀 후 FC 서울 감독을 거쳐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등 주요 행정직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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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대구침산초등학교, 계성중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87
서울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1988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황보관은 1988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여 프로 축구 선수로 데뷔했다.
1988 시즌 7골 5도움을 올리며 활약했고, 그 해 K리그 신인상과 K리그 베스트 11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8년 5월 21일 대우 로얄즈와의 경기에서 K리그 데뷔골을 기록했으며, 이 시즌 7골 5도움을 올렸다.
1988년 12월 11일 1988년 AFC 아시안컵 이란과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1989
1989년 유공 코끼리 소속으로 K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90
[1990 FIFA 월드컵 캐넌슛 득점]
이탈리아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스페인전에서 시속 114km/h의 캐넌슛으로 득점하며 화제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팀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1990년 FIFA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이탈리아 우디네에서 열린 예선 2차전 스페인전에서 골키퍼를 꼼짝 못하게 하는 시속 114km/h의 강력한 캐넌슛으로 득점을 기록했다. 이 득점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이 대회에서 기록한 유일한 득점이었다.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축구 대회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1994
[K리그 준우승 및 리그컵 우승]
유공 코끼리 소속으로 K리그 준우승과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K리그 베스트 11에 다시 한번 선정되었다.
1994년 유공 코끼리 소속으로 K리그 준우승과 리그컵 우승을 경험했으며, 개인적으로는 1988년에 이어 다시 한번 K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K리그 20-20클럽 가입]
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K리그 통산 7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4년 8월 6일 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K리그 통산 7번째로 20득점-20도움을 기록하는 20-20클럽에 가입하며 K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95
1995년 일본 J리그의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하여 해외 무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96
1996년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이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
1998년 시즌 도중 프로 축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1999
[지도자 경력 시작]
은퇴 후 대한민국 U-20 대표팀 트레이너를 거쳐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99년 대한민국 U-20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은 뒤, 오이타 트리니타 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000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오이타 트리니타 유스 팀 감독으로 활동하며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도왔다.
2004
유스팀 감독으로서의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4년 오이타 트리니타의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2005
2005년 요한 베르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오이타 트리니타의 감독으로 승격하여 팀을 이끌게 되었다.
감독 취임 후 성적 부진으로 인해 9개월 만에 해임되었으며,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의 유소년 육성부장을 거쳐 부사장 및 이사로 일하며 프런트 행정가로 활동했다.
감독 취임 후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열린 통영컵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며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다.
2008
2008년 오이타 트리니타가 J리그컵에서 우승하자, 우승컵을 갖고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9
[한국인 최초 J리그 GM 교육 이수]
오이타 트리니타 구단 부사장으로 재직 중 J리그에서 주관하는 제너럴 매니저 교육을 한국인 최초로 이수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9년 오이타 트리니타 구단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J리그에서 주관하는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 교육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수하며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강화했다.
2010
오이타 트리니타가 2009년 경영난 속에 J리그 디비전 2(2부 리그)로 강등된 후, 2010년에 감독직에 다시 복귀하여 팀을 재건하려 했다.
2부 리그에서도 15위에 그치는 성적 부진을 겪으며 2010년 11월 30일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 12월 28일 넬루 빙가다 감독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직을 맡아 K리그 무대에 복귀했다.
2011
[FC 서울 감독 사임]
리그에서 1승 3무 3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둔 후 117일 만에 FC 서울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최용수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2011년 4월 26일 K리그에서 1승 3무 3패라는 성적 부진으로 인해 감독 부임 117일 만에 FC 서울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최용수에게 감독직을 인계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부임]
FC 서울 감독 사임 후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으로 부름을 받아 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FC 서울 감독직 사임 후 2011년 5월 25일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으로 임명되며 행정가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2011년 11월 9일 이회택 위원장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2014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이후 기술위원장직을 이용수에게 넘겨주고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7
[공금 횡령 혐의 입건 및 무혐의 처분]
대한축구협회 공금 횡령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17년 9월 14일 대한축구협회 공금 횡령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이후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