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성

조선 시대 인물, 문신, 관료, 정치인, 군인,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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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수양대군의 핵심 측근이었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의 정난공신 및 좌익공신에 책록되며 권력을 얻었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여진족 토벌 등 군사적 공도 세웠으나,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여 횡포를 부리고 재물을 탐하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세조의 비호로 치죄를 면했으나, 사후에는 사림파로부터 포악한 인물로 지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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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홍윤성 출생]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우성, 자는 수옹이었으며 후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懷仁)이며, 초명은 우성(禹成)이고 자는 수옹(守翁)이었으나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1440

[수양대군과의 인연]

세종 때 음서 제도를 통해 군관으로 관직을 시작했으며, 한강 제주정에서 수양대군과 활쏘기를 겨루다 인연을 맺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세종 때 음보로 출사하여 군관이 되었다. 일찍이 한강 제주정에서 수양대군과 활쏘기를 겨루다가 그와 가까워져 수양대군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1450

[문과 급제 및 관직 시작]

공주 토포군관과 교도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공주 토포군관을 거쳐 교도(敎導)로 재직 중 1450년(세종 3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司僕寺)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시주부에 올랐다.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1

[진서 찬술 참여]

한성부참군과 통례문봉례랑에 임명되었으며, 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찬술하던 진서 작업에 좌랑으로 참여했다.

1451년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다.

1452

[수양대군 집권 건의]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어린 왕을 대신해 집권할 것을 건의했으며, 권람을 모사로 천거하여 수양대군이 신숙주, 정인지 등 주요 인물을 얻는 데 기여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며 수양대군에게 집권을 건의하였다. 그는 단종의 나이가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權擥)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인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해 다시 신숙주, 정인지 등을 얻게 된다.

1453

[계유정난 공신 책록]

수양대군을 도와 황보 인, 김종서 등 원로대신을 살해하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 2등관에 책록되었다.

1453년 수양 대군을 옹위하여 정난의 공을 세우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동참하였으며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제거하는 등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 2등관(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二等管)이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판관에 승진되고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455년 초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1455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 책록]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되었고,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수충위사동덕 좌익공신 3등관에 책록되었으며 참판으로 승진하고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1455년(단종 3년)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세조 즉위 직후 성주군 월항에 있는 세종의 왕자들의 태실비 중 세조의 태봉비문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다. 그해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수충위사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 佐翼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이어 참판에 승진,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1457

[외교 및 지방관 활동]

도진무를 거쳐 문무과 초시를 주관했고,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 판서와 경상우도 절제사를 역임했다.

1457년(세조 3) 도진무(都鎭撫)를 거쳐, 문무과의 초시를 주관하였다. 1457년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해 다시 예조 판서, 경상우도 절제사를 거쳐 1459년(세조 5)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다녀왔다.

1460

[여진족 토벌 및 승진]

모린위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대장 신숙주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고 돌아왔으며,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다시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1460년 모린위(毛憐衛)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자 대장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으로 출정, 이를 토벌하고 돌아와 숭정대부로 승진했으며, 다시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

1467

[우의정 임명 및 여진족 토벌]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건주위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우의정이 되고,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68

[원상으로 정무 수습]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의 한 사람으로 국정을 수습하고 정사를 처리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阮相)의 한 사람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정사를 수습하였다.

1469

[좌의정 및 영의정 역임]

예종 2년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고, 사은사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1469년(예종 2) 의정부 좌의정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곧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 사망 후 성종 옹립 기여]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서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원상의 한 사람으로 혼란을 수습했으며, 왕위 계승 시 성종(자을산군 혈)을 지지했다.

1469년(예종 2년)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다시 원상의 한사람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자 후보자를 낙점할 때 의경세자의 차남 성종(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

1471

[좌리공신 책록 및 부원군 진봉]

성종을 지지하고 구성군을 숙청한 공로로 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인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지지하고 구성군(龜城君)을 숙청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의 호를 받고,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75

[홍윤성 사망]

병으로 사망했으며,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위평이었다.

만년에는 충청도 부여로 낙향하여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1475년 병으로 죽었다. 사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敬屯里) 정수터(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산56-1 경수터)에 안장되었다. 위평(威平)의 시호(諡號)가 추서되었다. 후에 계실 고령김씨는 그의 묘소 앞에 매장되었다. 신도비문은 김수온(金守溫)이 지었다.

1480

[사림파의 지탄]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포악하고 권력을 남용한 인물로 지탄받았으며, 저서와 작품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그의 묘소와 비문도 방치되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포악무도한 인물이며 권력남용을 이유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들은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실, 실전되었다. 묘소는 방치되었고,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며,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 후에 신도비와 묘비, 부인의 묘비 등을 다시 세웠다.

2003

2003 사후 528년

[묘소 장명등 도난]

홍윤성의 묘소 앞에 있던 장명등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3년에는 홍윤성의 묘소 앞 장명등이 도난되는 수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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