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원
조선 문신, 외척, 정치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27:05
조선 후기 문신이자 외척으로, 인조의 삼녀 장렬왕후 조씨의 아버지이다. 음서로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인조반정 후 관직에 복귀하여 직산현감 등 지방관으로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 딸이 왕비로 간택된 후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청렴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존경받았으며,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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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
영사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이자 호조판서 조존성의 아들인 조창원이 태어났다.
1592
10세의 조창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조존성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함께 생활하며 난리 속에서 가족을 보필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1601
아버지의 덕으로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나섰으며, 별좌를 세 번, 의금부도사를 한 번 지냈다. 당시 정치 혼란으로 적극적인 활동은 주저했다.
1612
30여 세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615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신경희의 옥사에 아버지 조존성이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자, 조창원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보살폈다.
1623
[인조반정 후 관직 복귀]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형조좌랑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했으며, 당시 혼란했던 형옥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다.
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형조 좌랑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였다. 당시 형벌 관련 사건들이 번다했으나, 공평하고 관대하게 처리하여 새 왕의 정치를 도왔다.
1631
[직산현감으로 치적 쌓음]
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유랑민을 돌아오게 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고 뛰어난 치적을 세웠다.
직산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위무하여 도망갔던 유랑민들이 모두 돌아왔다. 수년이 지나자 정치가 안정되고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1638
[삼녀, 장렬왕후로 간택]
인조의 왕비를 뽑는 삼간택에서 그의 삼녀가 최종 간택되어 차기 왕비(장렬왕후)로 정해졌다.
인조 16년 10월 26일, 인조의 왕비를 뽑는 삼간택에서 조창원의 삼녀가 최종 간선되어 차기 왕비로 정해졌다.
딸이 왕비로 최종 간선된 후, 명호가 정해진 11월 1일 영돈녕부사 한원부원군에 봉작되었으며, 그의 부인 최씨 또한 완산부부인에 봉해졌다. 이로써 국구(왕의 장인)의 지위에 올랐다.
1646
인조 24년 2월 30일,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국구로서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1663
현종 4년 10월 25일, 부인 완산부부인 최씨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창원의 묘를 본적인 양주에서 금천 땅으로 이장하여 부인과 합장했다.
1668
현종 9년, 왕명에 의해 조창원 부부의 묘소가 용인 동침동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1900
[묘소 마지막 이장 (위치 미상)]
고종 37년에 새로 조성되는 능의 해자 구역에 무덤이 있어 다시 이장되었으나, 이후 정확한 묘소 위치는 현재까지 미상이다.
고종 37년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해자 구역 내에 있던 조창원 부처의 무덤이 다시 이장되었다. 하지만 이후의 정확한 묘소 위치에 대한 정보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