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후한)
군웅, 종교 지도자, 종교 왕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24:22
장로는 후한 말 혼란기에 오두미도 교단을 이끌며 독자적인 종교 왕국을 세운 인물입니다. 한중 지역을 30여 년간 통치하며 제정일치의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했으나, 결국 조조의 공격에 항복하여 그의 세력에 편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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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조부인 장릉이 서천(西川) 지방에서 오두미도교를 창시했습니다. 장릉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장형이, 장형이 죽은 후 장릉의 손자 장로가 오두미도를 이끌게 됩니다. 이는 장로가 훗날 한중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종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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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미도 계승 및 유언 수하 편입]
조부 장릉, 아버지 장형에 이어 오두미도의 3대 교주가 되었고, 유언에게 독의사마로 임명받아 장수와 함께 한중태수 소고를 공격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장릉, 장형의 뒤를 이어 오두미도의 3대 장천사(張天師)가 된 장로는 후한의 익주목 유언(劉焉)에게 독의사마로 임명되었습니다. 유언의 지시로 별부사마 장수(張脩)와 함께 한중태수 소고(蘇固)를 공격하며 한중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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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제거 및 한중 지배력 강화]
별부사마 장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흡수했습니다. 유언의 명으로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을 끊고 한 조정의 사자를 살해하며 한중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유언의 수하로 한중을 공격한 후, 장로는 돌연 장수를 죽이고 그의 무리를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했습니다. 이후 유언의 명에 따라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을 끊어 한 조정과의 연결을 단절시키고, 파견된 사자까지 살해하며 한중 지역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을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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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독립 및 종교 왕국 건설]
유언 사후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잇자 장로는 그를 따르지 않고 한중에서 독립을 선포, 한중의 이름을 한녕으로 바꾸었습니다. 스스로 '사군'이라 칭하며 한중과 파에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독자적인 종교 왕국을 세웠습니다.
유언이 죽고 유장이 익주목의 자리를 이어받자, 장로는 유장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한중에서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유장은 장로의 어머니와 식구들을 모조리 죽이며 보복했고, 방희 등을 파견하여 장로를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장로는 한중의 이름을 한녕으로 바꾸고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며 오두미도 교단을 기반으로 한중과 파 일대에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좨주들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고 의사(義舍)를 설치하는 등 독특한 통치 방식을 시행했습니다.
200
[한녕왕 추대 거부]
백성들이 땅에서 옥으로 된 인장을 얻자 사람들이 장로를 한녕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염포의 반대 의견을 따라 이를 거부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로가 한중에서 종교 왕국을 다스리던 중, 백성들이 땅에서 옥으로 된 인장(印章)을 얻게 되자 사람들은 이를 길조로 여기며 장로를 한녕왕으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는 그의 참모 염포(閻圃)의 반대 의견을 따라 왕위 추대를 거부하며 자신의 겸양을 보였습니다.
211
[조조의 토벌 시도와 서량 군벌의 반란]
조조가 종요를 보내 자신을 토벌하려 하자, 서량의 군벌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동관에서 싸웠으나 패퇴했습니다. 이때 관서 지역 수만 가구가 장로에게로 피난 왔습니다.
조조는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종요(鍾繇)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서량(西凉)의 군벌인 한수(韓遂)와 마초(馬超)는 조조가 자신들을 먼저 토벌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동관(潼關)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했습니다. 이 혼란을 틈타 관서(關西) 지역의 수만 가구가 장로가 다스리는 한중으로 피난을 왔고, 패잔병인 정은(程銀), 후선(候選), 이감(李堪), 마초 등도 장로에게 의탁했습니다.
212
[마초와의 협력과 결별]
조조와의 전투에서 패한 마초가 한중으로 의탁해 오자, 그를 도강좨주로 임명하고 딸을 시집보내려 하는 등 협력했으나, 결국 마초는 장로에게 실망하고 유비에게 귀순했습니다.
조조에게 패한 마초가 장로에게 의탁해 오자, 장로는 그를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임명하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며 협력을 모색했습니다. 마초의 요청을 받아 병사를 주어 양주(凉州)를 회복하게 했으나 큰 이득이 없었고, 마초는 장로가 함께 큰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장로를 떠나 유비(劉備)에게 귀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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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한중 침공]
조조의 대규모 한중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생 장위와 장수 양앙이 양평관에서 수만 명을 이끌고 저항했지만, 결국 양평관이 함락되며 장로군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조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한중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장로는 항복하려 했으나, 그의 아우 장위(張衛)와 장수 양앙(楊昻)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陽平關)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양평관이 함락되면서 장로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고 위기에 빠졌습니다.
[조조에게 항복 및 후한 대우]
조조의 공격에 저항하다가 마침내 조조에게 항복했습니다. 항복 직전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지 않아 조조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고, 진남장군과 낭중후에 봉해지는 등 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양평관이 함락된 후, 장로는 염포의 의견에 따라 파중(巴中)으로 후퇴하며 항전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계속된 압박에 결국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이때 장로는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소유라며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지 않고 떠났는데,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장로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조조는 사람을 보내 장로를 위로하고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했으며, 낭중후(閬中侯)로 삼아 식읍 만 호를 주고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에 봉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베풀었습니다. 장로의 딸은 조조의 아들 조우(曹宇)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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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죽음]
조조에게 항복한 이듬해인 건안 21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원후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훗날 감로 4년(259년) 물난리로 관이 열렸을 때 썩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한 이듬해인 건안(建安) 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후 원후(原侯)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장부(張富)가 뒤를 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기록으로는, 그의 시신이 훗날 위(魏)나라 감로(甘露) 4년(259년)에 물난리로 관이 열렸을 때 썩지 않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