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 (낭야왕)

황족, 군왕, 지방관, 군인, 반란 주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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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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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 군왕, 지방관, 군인, 반란 주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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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황족이자 낭야군왕으로, 당 태종의 손자이자 월경왕 이정의 장남입니다.• 측천무후의 황실 탄압에 맞서 아버지 이정 등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반란은 실패로 끝나 688년 전투 중 피살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716년에 이르러서야 관작과 황족 지위를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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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

[당 고종 사망 및 측천무후 섭정 시작]

당 고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당 중종이 즉위했으나, 실권은 황후 무조(훗날 측천무후)의 손에 넘어가 섭정을 시작했다.

683년 당 고종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철이 당 중종으로 즉위했으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고종의 아내 무조가 태후로서 섭정을 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684

[측천무후, 당 중종 폐위 및 황실 불안 고조]

무조가 독립의 기미를 보인 중종을 폐위하고 동복아우인 예왕 이단으로 교체했으며, 자신과 무씨 가문의 지위를 높여 이씨 황족들이 무조의 이씨 몰살 계획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684년 봄, 황태후 무조는 독립의 기미를 보이던 당 중종을 폐위하고 예왕 이단으로 교체했으며, 무씨 가문의 지위를 높여 나갔다. 이에 당나라 황실인 농서 이씨 가문은 무조가 당나라를 타도하고 자신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688

[낭야왕 이충, 측천무후에 맞서 반란 시작]

측천무후의 이씨 황실 탄압에 불안감을 느낀 낭야왕 이충이 박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황족들에게 동참을 촉구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정 외 다른 왕들은 준비가 덜 되어 동참하지 않아 반란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황태후 무조가 이씨 황실을 몰살할 것을 의심했던 낭야왕 이충은 688년 9월 16일, 박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장사 소덕종 등을 모병했다. 그는 이원가, 이원궤, 이령기, 아버지 이정, 숙부 이신 등에게도 군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오직 이정만이 동참하고 다른 왕들은 준비 부족으로 망설여 반란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충의 반란, 측천무후에게 보고되다]

이충의 반란 소식이 무조에게 보고되자, 무조는 좌금오위 장군 구신적을 토벌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이충을 공격하게 했다.

688년 9월 20일, 이충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무조가 있는 장안에 도착했다. 무조는 좌금오위 장군 구신적을 청평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이충을 공격하게 했다.

[이충, 반란 실패와 비극적 죽음]

이충은 5,000명의 병력을 모아 황하를 건너 제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무수현 공격 중 바람이 바뀌어 사기가 저하되고 부장의 반역 발언으로 병사들이 흩어졌다. 결국 그는 본부가 있던 박주성으로 도망쳤으나,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며 반란 7일 만에 패망했다.

이충은 5,0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황하를 건너 제주를 공격할 준비를 하며 먼저 무수현을 공격했다. 무수성을 방어하던 현령 마현소에 대항하여 남문 방화를 시도했으나 바람이 갑자기 북쪽으로 바뀌어 실패하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박주 현승 동현적의 반역 발언 후 병사들이 흩어져, 이충은 결국 본부가 있던 박주성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688년 9월 22일, 성문에 도착했을 때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손에 살해당하며 반란 7일 만에 패망했다.

[이충 반란 후 황실 대숙청과 훼씨 개칭]

이충의 목은 낙양 대궐 아래 효수되었고, 구신적은 박주 관리와 주민 1,000여 가구를 학살했다. 이충의 아버지 이정 등 반란에 연루된 황족들은 자살하거나 자결을 강요받았으며, 대부분 몰살당하고 성씨가 훼씨로 개칭되는 등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충이 살해된 후 그의 목은 신도 낙양의 대궐 아래 효수되었다. 구신적은 박주에 도착해 복종을 표시한 관리들마저 참살하고 현지 관헌 가구 1,000여 개를 파멸시켰다. 한편, 이충의 아버지 이정은 막내아들 이규, 사위 배수덕과 함께 자살했으며, 그들의 목도 낙양에 내걸렸다. 무조는 혹리 주흥에게 수사를 맡겨 이원가, 이령기, 이선 등 다른 황족들에게 자결을 협박했고, 그들의 가족은 대부분 몰살당하고 당나라 황실 호적에서 제명되었으며 성씨가 훼씨로 개칭되었다.

690

[측천무후, 당나라 찬탈 및 주나라 건국]

측천무후가 당 예종으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당나라를 가로채 자신만의 왕조인 주나라를 세웠다.

영창 원년(690년), 황태후 무조는 당 예종으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당나라를 가로채고, 그녀 자신만의 왕조인 주나라를 세웠다.

705

[측천무후 퇴위와 이정·이충 지위 회복 (불완전)]

신룡 원년(705년), 측천무후가 제위에서 물러나고 당 중종이 다시 복위했다. 중종은 이정·이충 부자의 사후 성씨와 황족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외사촌 무삼사 등의 반대로 관작은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

신룡 원년(705년), 측천무후가 제위에서 물러나고 당 중종이 다시 제위에 복귀했다. 중종은 이정·이충 부자의 사후 성씨와 황족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지만, 외사촌이자 심복인 무삼사와 후궁 상관완아의 반대로 관작은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

716

[이정·이충 관작 완전 회복 및 개장]

당 현종 연간인 개원 4년(716년)에 이르러서야 이정·이충 부자의 관작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당 현종 연간인 개원 4년(716년)에 이르러서야 이정과 이충 부자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라는 조서가 내려져 그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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