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영

학생 운동가, 인권 운동가, 노동 운동가, 정당인, 강사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8:49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학생 운동가, 인권 운동가, 노동 운동가, 정당인, 강사
report
Edit

원희영은 1973년에 태어나 2009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이자 동성애자 및 노동 인권 운동가, 정당인입니다. 강경대 사건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창립 멤버이자 민주노동당의 핵심 당원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뇌종양 투병 중에도 인권과 정의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며 대한민국 인권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원희영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73

[원희영 탄생]

서울 동대문구에서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 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습니다.

원희영은 1973년 3월 12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병마를 앓았습니다. 동대문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 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습니다.

1991

[강경대 사건 계기로 시민운동 투신]

고등학교 재학 중 강경대 학생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큰 충격을 받고 시민운동에 투신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시민 및 인권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원희영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91년, 강경대 학생의 죽음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시민,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스테로이드제 부작용으로 알레르기, 발작 등 크고 작은 병에 시달렸습니다.

1993

[사회주의 단체 활동]

대학 입학 후 노래패 활동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주의자로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국가보안법 때문에 비합법조직으로 쫓기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993년 대학 입학 후,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하였으며, 사회주의 단체에도 가입하여 국제사회주의자로써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국가보안법 때문에 비합법조직, 이적단체로 쫓겼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994

[대학 중퇴 및 사회 활동]

대학을 중퇴한 뒤 서울로 올라와 백화점 판매직 직원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노동 운동가로서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4년 대학을 중퇴하고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이후 백화점 판매직 직원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997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 창립 참여]

양지용, 정욜, 임태훈 등과 함께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이 단체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으로, 초기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97년 9월 9일 양지용, 정욜, 임태훈 등과 함께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 창립에 참여하였습니다.

1998

[동성애자인권연대 창립 멤버 활동]

대한민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핵심 단체인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의 창립 멤버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동인련 소식지팀과 상담센터준비팀에서 활약하며 '레즈비언 활동가들의 큰언니'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1998년 8월 1일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상담센터 준비팀원과 소식지팀장으로 활동하며, 레즈비언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큰언니'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2000

[퀵 서비스 배달원으로 생계 유지]

교육자가 꿈이었으나 생활비 조달을 위해 퀵 서비스 및 택배 배달원으로 취직하여 2003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인권 운동과 정당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교육자가 꿈이었던 원희영은 2000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퀵 서비스 회사의 배달원, 택배 배달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이후 2003년까지 서울 시내의 퀵 서비스 및 택배 배달원으로 활동했으나 교통사고 등의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창당 참여]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고 서울 성동구지구당 창립에도 기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민노당 정치실천단원, 여성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진보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과 민노당 서울 성동구지구당 창립에 참여하고, 민주노동당 당 정치실천단 단원, 당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민노당 정치실천단원으로 각종 파업현장에 참여, 연대농성하였습니다.

2001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사무차장 활동]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사무차장으로 활동하며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01년 전국보험모집인노동조합 사무차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2002

[민주노동당 지구당 운영위원 활동]

민주노동당 서울특별시 광진을 지구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와 정당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서울특별시 광진을 지구당 운영위원이었습니다.

[오태양 병역 거부 지지 활동]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하고 홍보하는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발족식'에 참석하여 인권 운동가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습니다.

2002년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2002년 2월 4일 오전 11시 서울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한홍구, 효림스님, 오태양 등의 주최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발족식 및 기자회견'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원 및 1554명의 인권,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 및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1000인 선언'에 동참, 서명하였습니다.

[전지윤 석방 운동 동참]

민주노동당원 전지윤 씨가 연행·구속되자 그의 석방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2002년 5월 7일 경기도 보안수사대가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정책국장이자 민주노동당원인 전지윤 씨를 연행ㆍ구속하자, 그의 석방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2003

[논술·논리학 강사 활동 시작]

생계를 위해 논술 학원 및 종합보습학원, 대학에서 논술 및 논리학 강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꿈꿨던 교육자의 길을 잠시나마 걷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생계를 위해 일부 논술학원과 종합보습학원, 대학의 논술, 논리학 강사로 출강하였습니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참여]

정욜, 육우당 등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여하여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2003년 2월 정욜, 육우당 등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NEIS 중단 요구 선언 참여]

네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 중단 요구 각계각층 1000인 선언에 서명하고 반대 성명 발표에 참여하여 교육 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를 전달했습니다.

2003년 4월 17일 네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 중단 요구 각계각층 1000인 선언에 서명하였습니다. 'NEIS 중단' 각계각층 1천인 선언문이 작성되자 반대 성명 발표에 참석하였습니다.

2004

[제2회 인권학교에서 '성 소수자와 인권' 강의]

동성애자인권연대 소식지팀장으로 제2회 인권학교의 강사로 초빙되어 2월 2일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는 성 소수자 인권 증진에 기여하는 교육 활동의 일환이었습니다.

2004년 1월부터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에 다시 참여했으며, 1월 11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소식지팀장으로 제2회 인권학교의 강사로 초빙되었습니다. 1월 11일부터 2월 3일까지 열린 인권학교에서 그는 2월 2일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노동권' 강연]

인권운동사랑방의 '열린 성소수자 상담, 어떻게 시작할까?' 강연회에 참여하여 '노동권'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습니다.

2004년 10월 인권운동사랑방의 '열린 성소수자 상담, 어떻게 시작할까?'라는 주제의 강연회에 '노동권'을 주제로 강연하였습니다.

2005

[뇌종양 투병 시작]

뇌종양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으며,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인권 및 사회 운동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05년 뇌종양으로 투병,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퇴원하였습니다.

[제2회 인권학교에서 '성 소수자와 인권' 재강의]

한국인권행동 주관 제2회 인권학교의 연사로 참여하여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이전에 진행했던 강의와 유사한 내용으로 다시 한번 성 소수자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2005년 1월 11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인권행동 주관 제2회 인권학교의 연사로 참여,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습니다.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 강사 활동]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성소수자인권상담센터가 주관한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의 강사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전문 상담원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2005년 6월 9일부터 7월 24일까지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성소수자인권상담센터의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의 강사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2006

[국제공동반전행동 참여]

서울역 광장에서 개최된 3.19 국제공동반전행동 및 미국의 이라크 침략 규탄 집회에 참여하여 국제 평화와 반전 운동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2006년 3월 19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광장에서 개최된 3.19 국제공동반전행동 및 미국의 이라크 침략 규탄 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2008

[뇌종양 말기 진단]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으나 곧 퇴원했습니다. 투병 중에도 사회 운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2008년 5월 초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곧 퇴원하였습니다.

[광우병 촛불집회 지지]

뇌종양 투병 중에도 광우병 촛불집회 지지 인권운동가 모임에 참여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2008년 5월 29일 광우병 촛불집회 지지 인권운동가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2009

[의식불명 및 병원 이송]

일시적인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성 바오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병원 암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2009년 1월 6일 잠시 의식불명상태에 있던 중 동대문구 전농동 성 바오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병원 암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이동]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퇴원, 성 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후송되어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병원 암 병동에서는 치료가 어렵다 하여 2009년 1월 8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여 동대문구 전농동 성 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원희영 사망]

스테로이드제 부작용 및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새벽 0시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성 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망했습니다. 동거인과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이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원희영은 2009년 3월 12일 새벽 0시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성 바오로 병원 호스피스 병동 사랑3실에서 스테로이드제 부작용 및 뇌종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동거중인 동성애자 및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벽제화장터에서 화장]

경기도 고양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유골은 가족에게 인수되어 모처에 뿌려졌습니다. 동인련 회원들과 동거인에게는 유골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시신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관동대학교 일산 명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가, 3월 14일 오전 8시 30분경 경기도 고양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되었습니다. 유골은 발인날 오후 가족이 인수하였으며 동생에 의해 모처에 뿌려졌으나, 동인련 회원 및 동거녀 A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