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작가)
예술가, 배우, 극작가, 작사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8:30
일제강점기 다방면에서 활약한 예술인, 왕평. 연극, 영화, 대중가요를 넘나들며 배우, 극작가, 작사가로 활동. 특히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 노랫말을 쓰고, 인기 극반과 영화에 출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30대 초반 요절했으나, 짧고 굵은 활동으로 한국 대중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왕평 (작가)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08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잠시 청송군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성장 과정은 불분명하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철의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1931
[극작가 및 배우 활동 시작]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배우로서도 예명 왕평을 사용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현철의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배웠고, 1930년대 초부터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 시기부터 본명 이응호로는 작가 활동을, 예명 왕평으로는 배우 활동을 하며 다방면에서 재능을 선보였다.
1932
[포리돌레코드 문예부장 역임]
포리돌레코드 조선 지점 설립에 참여하여 문예부장을 맡았으며,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인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 등 대중가요 작사가로서 대표작을 탄생시켰다.
1932년 포리돌레코드 조선 지점 설립에 깊이 관여하여 문예부장직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로 평가받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와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 등 다수의 인기 대중가요의 작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1933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 발표]
8장으로 발매되며 큰 인기를 얻은 극반 '항구의 일야'를 발표하고 직접 주연을 맡아 다재다능한 면모를 과시했다.
1933년부터 여러 장으로 나누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의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아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작가 및 배우로서의 역량을 동시에 보여준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37
일제 강점기 말기 성봉영화원 소속으로 영화 '나그네'(1937년)와 '군용열차'(1938년)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풍채 좋은 외모를 바탕으로 영화 속에서 듬직한 오빠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1940
[젊은 나이에 요절]
연극 '남매'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며, 당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4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던 중 갑작스럽게 무대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재다능한 예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대 예술계와 대중에게 큰 안타까움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