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화 (명나라)
명나라 정치인, 재상, 문장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6:49
명나라 헌종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관직을 지낸 명재상입니다. 12세에 향시, 19세에 진사에 급제하며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고, 황태자의 스승을 역임했습니다. 내각 수보로서 무종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종 즉위를 주도하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헌종실록, 효종실록 등 주요 서적 편찬에 참여하는 등 학문적 업적도 남겼습니다.
1459
양정화는 1459년(천순 3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양춘은 호광제학첨사를 역임한 바 있다.
1471
양정화는 12세에 향시(鄉試)를 통과했다.
1478
1478년(성화 14년) 19세에 진사(進士)가 되어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에 임명되었다.
1489
1489년(홍치 2년)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에 임명되었다.
1491
1491년(홍치 4년) 헌종실록(憲宗實錄)의 편수(編修)에 참여하였고 이후에 시독(侍讀)에 임명되었다.
1500
좌춘방좌중윤에 임명되어 명 효종 시기에 황태자 주후조(朱厚照)의 스승이 되었다.
1502
1502년(홍치 15년) 대명회전(大明會典)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좌춘방대학사(左春坊大學士)에 임명되었다.
1507
1507년(정덕 2년) 양정화는 내각(內閣)에 들어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임명되었다. 유근(劉瑾)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남경이부좌시랑(南京吏部左侍郎)으로 좌천되었다.
1507년 5월, 남경호부상서(南京戶部尚書)에 임명되었다.
1507년 8월, 양정화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에 임명되어 조정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1508
1508년(정덕 3년) 유근이 대명회전 속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여 양정화와 대학사 이동양의 봉록을 2급 깎았으나, 얼마 뒤 효종실록의 편수과정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원래의 봉록을 회복하였다.
1509
1509년(정덕 4년) 양정화는 이부상서 겸 무영전대학사(吏部尚書兼武英殿大學士)에 임명되었다.
1510
유근(劉瑾)이 주살된 이후 소보겸태자태부(少傅兼太子太傅) 근신전대학사(謹身殿大學士)에 임명되었다.
1512
1512년(정덕 7년) 내각 수보(首輔)에 임명되었다.
1515
1515년 음력 3월, 양정화는 명나라 내각대학사 수보 직책에서 물러났다.
1521
[무종 사후 국정 장악 및 세종 즉위 주도]
무종 사망 후 강빈 등을 제거하고 세종 즉위 과정을 주도하며 37일간 국정을 장악, 무종의 악습을 철폐하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1521년(정덕 16년) 무종이 사망한 뒤 양정화는 강빈 등을 제거하고 무종의 종형제인 주후총(명 세종)이 제위를 잇게 되는 과정을 맡아 처리하였다. 주후총이 북경에 도착하기 전까지 37일 동안 조정의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였으며 무종이 남긴 악습을 철폐하여 조정 내외로부터 명성을 떨쳤다.
1524
1524년 음력 2월, 양정화는 명나라 내각대학사 수보로 복귀했다.
1524년(가정 3년) 음력 5월, 대례의(大禮議)의 문제로 세종과 충돌이 심해지자 양정화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28
1528년(가정 7년) 삭직(削職)되어 평민의 신분이 되었다.
1529
1529년(가정 8년) 양정화는 고향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567
명 목종 시기에 양정화는 복원되어 태보(太保)에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