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피살 사건

정치 사건, 암살 사건,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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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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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피살 사건은 해방 직후인 1945년 발생한 비극적인 정치 암살 사건입니다.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서울 자택에서 자객 한현우 등의 피습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송진우는 미군정과의 협력과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주장했으나, 이를 신탁통치 찬성으로 오해한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김구가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이 사건은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좌우익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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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송진우, 임시정부 간담회에서 갈등 중재]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한 간담회에서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국내 인사 친일파' 발언에 대해 신익희를 설득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임정의 친일파 숙청론이 잠잠해지게 합니다. 이는 송진우 측과 중경 임시정부 측 간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에 대한 갈등을 보여주었습니다.

1945년 12월 중순, 송진우는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환국 환영 준비회를 겸한 간담회를 서울 관수동 국일관에서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고 발언하여 좌석이 싸움판으로 변했습니다. 이에 송진우는 신익희를 설득하며, 임시정부가 국내 국민들의 지지 없이는 설 수 없음을 강조하고 친일파 숙청 문제에 대한 신중론을 펼쳐 갈등을 가라앉혔습니다. 이 사건은 송진우 측과 중경 임시정부 측 간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등에 대한 갈등이 적지 않았음을 드러냈습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삼상회의에서 조선의 미·소 양측에 의한 5개년 신탁통치가 결정됩니다. 이 결정은 해방 직후 한반도에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며, 송진우 피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1945년 12월 27일,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동하여 한반도에 대한 미소 양측의 5개년 신탁통치를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해방 직후 자주독립을 열망하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혼란을 가져왔으며,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적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 신탁통치 불가피론 주장]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및 우파 회의에서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지만 미군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시는 공산당에게 유리할 뿐이라며 당분간의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1945년 12월 29일 저녁 10시부터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우파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되 그 방법은 직선적이고 감정적이기보다는 신중하고 합리적이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미군정을 타도하자는 강한 여론 속에서도 송진우는 미군정을 무조건 적대시하다가는 상대방에게 유리한 일만 할 것이라며 당분간의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는 미군정이 최소 2년 동안 주둔해야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송진우, 경교장에서 김구와 신탁통치 문제 논의]

송진우가 김구의 경교장을 찾아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만,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송진우의 입장과 임시정부의 반탁 운동에 대한 김구의 입장 차이로 마찰을 빚었습니다. 송진우는 5개년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며 미국의 후견 기간을 주장했습니다.

1945년 12월 29일 저녁, 송진우는 김구의 경교장을 방문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김구와 만났습니다. 송진우는 미군정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신중한 대응을 할 것을 주장하며, 5개년간의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송진우의 주장을 신탁통치 찬성으로 받아들여 양측 간에 견해 차이가 발생하고 마찰을 빚었습니다.

[송진우, 자택에서 자객에게 피살]

김구 등 임시정부 측과의 면담이 새벽 4시에 끝난 지 두 시간 후,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의 자객에게 피습당해 암살됩니다. 자객들이 쏜 13발의 탄환 중 6발이 송진우의 얼굴, 심장, 복부, 하관절 등을 관통했습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당시 34세), 유근배(21세) 등을 포함한 6명의 자객에게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습니다. 자객들이 쏜 13발의 탄환 중 6발이 명중하여 송진우는 얼굴에 1발, 심장에 1발, 복부에 3발, 하관절에 1발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암살범들에게 총을 건네준 사람은 전백이라는 해운회사 사장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군정 사령관 존 하지를 비롯해 여러 인물이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1946

[한현우, 재판에서 송진우 암살 동기 진술]

재판정에 선 한현우는 송진우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하여 둘 다 죽이려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가 자신들을 애국자라고 칭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인 송건호는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송진우 암살 사건 재판정에서 주범 한현우는 송진우를 살해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는 '좌익에서는 여운형, 우익에서는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어 여운형을 먼저 죽이려 했으나, 여운형이 자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자 차마 죽이지 못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현우는 또한 이승만과 김구가 자신들의 거사를 애국적인 행위로 칭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인 송건호는 한현우를 국수적 민족주의 광신자로 평가했으며, 그는 평안남도 출신의 월남 청년으로 민족주의 광신자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 사령관,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 지목 및 경고]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습니다. 이는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와 미군정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습니다. 이에 1946년 1월 1일, 하지는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엄중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미군정 주요 인사들은 김구를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송진우 암살범 검거 작전 개시]

송진우 암살 사건 발생 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수사를 진행한 결과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던 김일수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일수와 정종칠을 검거하여 취조를 개시했습니다.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하자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사건 수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2월 13일, 장택상은 송진우의 전 경호원이었던 김일수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미군 스톤 부장의 양해를 얻어 미군과 경찰관들을 동원, 김일수와 정종칠을 검거하고 취조를 시작했습니다. 취조 결과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던 백남석, 김의현, 신동운, 박민석, 유근배 등이 1945년 11월 말경 경호원에서 물러난 사실과 김의현이 암살범에 대해 알고 있다는 단서를 확보했습니다.

[송진우 암살 주범 한현우 및 유근배 체포]

경찰의 끈질긴 수사 끝에 송진우 암살의 주요 공범인 유근배가 인천 화평동에서 체포되었고, 같은 날 밤 주범인 한현우도 서울 신당동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로써 송진우 피살 사건의 직접적인 범인들이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1946년 4월 8일, 송진우 암살 사건의 범인 검거에 박차를 가하던 경찰은 인천 화평동에 숨어있던 유근배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날 밤 10시 20분에는 암살의 주범으로 지목되던 한현우도 서울 신당동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앞서 양자 송영수와 하인들이 추격하여 한현우와 유근배를 일차적으로 검거했으나 이후 수사를 통해 나머지 공범 4명과 함께 주요 범인들이 모두 체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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