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조선 시대 인물, 개화파, 정치인, 사상가, 기업인, 친일파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13:18
조선 말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자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꿈꾼 인물입니다. 그는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하며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오랜 기간 일본에서 망명했습니다. 귀국 후 태극기 도안에 기여하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과 일본 귀족으로서의 활동으로 해방 후 비판받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1861
[개화파 영수의 탄생과 성장]
생원 박원양과 전의 이씨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 반남 박씨 가문 출신으로, 북학파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의 문하생이 되어 개화사상을 배우며 급진개화파 동지들과 교류했습니다.
1861년, 박영효는 생원 박원양과 전의 이씨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광해군 시절 의금부 판사를 지냈던 박동량의 후손으로, 200여 년간 노론 집권기에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박지원, 박규수, 박정양 등도 같은 일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 박영교를 따라 당시 홍문관 제학이던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었고, 박규수와 유대치에게서 새로운 문물 정보와 개화사상을 배웠습니다. 주자학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며 개화의 시대적 요구를 깨달았으며, 어윤중, 김옥균, 김윤식,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동문수학들과 함께 후일 개화당을 결성했습니다. 또한 수석 역관 오경석으로부터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청나라 및 외국의 개화 서적을 접하며 개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1872
[철종의 부마로 간택되다]
11세의 나이로 철종의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의 부마로 간택되어 금릉위에 봉작되고 상보국숭록대부 품계를 받아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혼인 3개월 만에 옹주와 사별하며 후사를 잇지 못했습니다.
1872년 (고종 9년) 음력 4월, 11세의 박영효는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고종의 사촌인 영혜옹주의 부마로 간택되었습니다. 스승 박규수와 수원부 유수 신석희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습니다. 옹주와의 혼인으로 그는 금릉위(錦陵尉)의 봉작과 상보국숭록대부 품계를 받고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는 고종의 친형 이재면의 품계보다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원양은 공조판서에 올랐고, 조부 박제당은 숭정대부 겸 의정부 좌찬성에, 증조부 박해수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3개월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고 3년상을 지켜야 했으며, 당시 부마의 재혼과 축첩이 불법이었기에 후사를 잇지 못했습니다. 후에 고종의 특별 배려로 궁녀 몇 사람이 하사되어 서자, 서녀를 얻게 됩니다.
[영혜옹주와 사별하다]
영혜옹주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마는 재혼과 축첩이 불법이라 후사를 잇지 못했으나, 후에 고종의 특별 배려로 궁녀들에게서 자녀를 얻게 됩니다.
영혜옹주와의 혼인 이후 3개월 만에 옹주와 사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 부마는 재혼과 축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박영효는 후사를 잇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고종은 특별한 배려로 궁녀 몇 사람을 박영효에게 하사하여, 이들을 통해 서자와 서녀를 얻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1878
[관료 생활의 시작]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혜민서 제조와 판의금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1878년 4월, 박영효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1879년에는 혜민서 제조에 임명되었고,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올랐습니다. 1881년 8월에는 다시 혜민서 제조가 되었다가 곧이어 판의금부사에 재임명되는 등 여러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1882
[태극기의 원형을 재도안하다]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던 중 배 안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의 4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는데, 이것이 현재 태극기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태극기를 도안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882년 (고종 19년)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과 비공식 사절인 민영익, 김옥균 등을 대동하고 배편으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도일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의 4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후에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일본 도쿄에 체류하며 일본 정부 고관을 만나 협상을 진행하고 강화도 조약의 일부 내용을 정정하는 협상을 타결지었으며, 병사, 재무, 흥산 등의 개화 상황을 시찰하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883
[한성부판윤 임명과 개혁 좌절]
일본 시찰 후 귀국했으나 수구파의 정권 장악으로 개혁 추진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대신직에서 제외된 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인력거를 보급하고 치도국, 경순국, 박문국 등의 개혁안을 추진했으나 민태호 등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일본 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 김병시, 김병국 중심의 수구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개혁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 정책을 펴는 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천거되었습니다. 1883년 2월 6일 (1882년 음력 12월 19일)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들여와 조선에 보급했습니다. 한성부에 치도국(도로 확장 및 정비), 경순국(경찰·치안), 박문국(인쇄 홍보)의 3국을 신설하여 행정업무, 경찰·치안업무, 인쇄 홍보업무를 분장하게 하고 서양 양복과 색깔 있는 옷의 장려 등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민태호, 김병시 등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고 그의 개혁안도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신문국 설치를 통한 신식 신문 창간을 계획했으나 자금 조달 문제로 실패했습니다.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
개혁 추진이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유학자들의 탄핵을 받아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신문사 창간 계획을 추진했으나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성부판윤 재임 중 개혁안이 수구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유학자들로부터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습니다. 결국 1883년 4월 19일 (음력 3월 17일)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신문사 창간 계획은 계속 추진했지만, 광주부 유수로 발령받으면서 신문 발간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성순보 창간에 기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과 자문을 받아 신문 발행을 계획했던 것이 마침내 한성순보로 창간되었습니다.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 등을 필진으로 위촉하여 개화사상 전파에 힘썼습니다.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어사로서 정조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다시 비난 여론에 부딪혀 그해 12월 광주유수직마저 사퇴하고 재야로 물러앉았습니다.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와 꾸준히 연락하며 그의 지원과 자문으로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고, 이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 (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로 창간되었습니다.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 등을 필진으로 위촉하여 개화 사상 전파와 개혁 여론 조성에 주력했습니다. 한성부판윤으로 있을 때부터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등 개화당 요인들과 만나 개혁 방안을 협의했습니다.
1884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고종 부부를 유폐하고 정국을 장악했지만,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84년 (고종 21년) 초, 조선 주둔 청나라 부대가 청·프 전쟁에 증원되면서 이 때가 호기라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부추김과 일본군의 지원 약속을 믿고, 박영효는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함께 12월 4일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 낙성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고종 부부를 경우궁에 유폐한 뒤 정국을 장악했습니다. 박영효는 친군전후영사 겸 좌포장을 맡아 군과 치안 장악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외척 민씨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실패로 인해 형 박영교는 청군에 살해당하고, 아버지 박원양은 투옥 후 아사했으며, 어머니 전의 이씨는 살해당하는 등 가족들이 큰 희생을 겪었습니다. 박영효 자신은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도움으로 김옥균,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 등 일행 9명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가 망명객들의 안전을 위해 박영효에게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1885
[일본 망명 생활 시작]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지내다가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망명 중 자객의 위협에 시달리며 은신 생활을 했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피했습니다. 윤치호와 김옥균은 중국으로 건너갔고,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1885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 그는 개혁의 실패와 동지들의 희생에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한편으로 조선에서 보낸 자객을 피하기 위해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 하에 은신하며 지냈습니다.
1888
['건백서' 개혁 상소]
메이지 학원 영어과를 졸업하고 '건백서'라 불리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상소문에서 봉건적 신분제도 철폐와 근대적 법치국가 확립을 통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습니다.
일본 망명 생활 중 박영효는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 학원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1888년 메이지 학원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로 건너가 미국 교회에 출석하며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습니다. 같은 해 (고종 25년) 초 일본에 체류하던 그는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 또는 '개화상소'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3년간의 추적 끝에 편지 주소지를 알아낸 수구파 대신들이 1892년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으나, 일본 정부 측의 정보 탐지로 피신하여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습니다.
1893
[친린의숙 설립 및 운영]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후원을 받아 유학생들의 기숙사 겸 학교인 친린의숙을 설립하여 경영했습니다. 자객들의 위협으로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교육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1893년,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후원금과 협조를 얻어 교포 학생 교육 지원을 목적으로 유학생들의 기숙사 겸 학교인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하여 경영했습니다. 자객들의 출몰로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는 조선에 있던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한편, 후쿠자와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금 지원 외에도 직접 노동과 고국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후원금을 조달하며 친린의숙을 운영했습니다.
1894
[갑오개혁을 재주도하다]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귀국 후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제2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김홍집과 갈등하다 실각시킨 뒤 총리대신서리가 되어 2차 갑오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왕실과 외부의 연락을 차단하려는 시도 등으로 고종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명성황후 암살 음모 관련자로 지목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94년 (고종 31년) 7월,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그해 8월 귀국했습니다. 12월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으며, 일본의 후원과 압력으로 귀국한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인 개혁을 펼치려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습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2차 갑오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의 개혁을 추진하며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 구미식 행정 채택을 주장했습니다. 이 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조선 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고,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당했습니다. 1894년 11월 금릉위의 작위를 돌려받았습니다. 1895년 3월에는 김학우 암살 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체포하고 고문을 가해 여론의 악화를 초래했습니다. 1895년 (고종 32년) 7월 초, 그는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감행해야 화근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길준이 그의 계획을 고종에게 밀고하면서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반역 음모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주선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95
[명성황후 암살 시도와 재망명]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발각되어 반역 음모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으로 다시 망명길에 오르며 기나긴 망명 은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895년 (고종 32년) 7월 초, 박영효는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개화 이후 고종은 일본의 견제를 받고 군국기무처가 독단적으로 움직여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군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와 결탁하려 했고,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습니다. 그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감행해야 화근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해 일본에 병력을 요청했습니다.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뜻을 알렸으나, 유길준은 곧바로 박영효의 왕비 암살 계획을 고종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누설된 것을 안 박영효는 양복으로 바꿔 입고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용산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주했으며, 신응희, 이규완 등 그의 일당도 함께 도주했습니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으로 도쿄 구석의 판자촌에 은거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00
[고종 양위 쿠데타 계획]
일본 망명 중 고종황제를 양위시키고 의친왕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계속 좌절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 체류 중이던 1900년 (광무 7년) 7월, 고베에서 이승린, 이조현, 김창한 등을 불러모아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했습니다. 그는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황제를 양위시킨 뒤 의친왕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국내에 있던 한규설, 윤치호, 윤석준 등에게 자금 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했지만 의금부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정계 복귀 공작과 고종 폐위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일본인 경호원을 고용한 뒤 은거 생활을 했습니다. 1904년 3월 고종이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망명자 중 요인 추방을 제의하여 박영효도 지명되었으나 일본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4월 고종이 주한일본국공사관에 박영효 등 14명의 망명자 추방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송환을 거절했습니다.
1907
[귀국과 고종 양위 반대]
긴 망명 생활 끝에 고종의 특사 조칙으로 사면을 받고 정식으로 귀국했습니다.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고, 헤이그 밀사 사건 후 고종 양위 압력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완용 일파의 탄핵을 받아 곤장 80대 형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는 등 고난을 겪었습니다.
1905년 11월 일본 체류 중 을사늑약 소식을 접했고, 1907년 오랜 망명 끝에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정박했습니다. 6월 7일 한성으로 올라가 궁내부 일본인 고문 가토 마스오와 접촉하고, 먼 일족인 박제순 등과 교류했습니다.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6월 13일 고종의 특사 조칙으로 사면을 받고 정식으로 귀국했으며, 금릉위에 복작되었습니다. 그해 7월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바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전임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 후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습니다. 남정철, 이도재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며 양위파와 갈등했습니다. 그해 8월 황태자의 대리 진하행례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이완용 일파의 탄핵을 받고 남정철, 이도재 등과 함께 곤장 80대의 형을 받았습니다. 하인이나 노비 대신 직접 형을 당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1907년 7월에는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일본의 개화파 인사들 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설치된 한일동지회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1907년 7월 29일 궁내부대신에서 면직되었고, 8월 23일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경무청에 구금당했다가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되었습니다. 1908년 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 상경은 금지되었습니다.
1909
[신궁봉경회 총재 추대와 육지 상륙 실패]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서울 상경이 금지된 상태에서 이준용이 세운 신궁봉경회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나 경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10년 비밀리에 육지 상륙을 기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했습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 상경이 금지되었고, 1909년 6월 이준용이 세운 신궁봉경회의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성부로 돌아올 수 없었고 사람을 보내 경성 주변의 정세를 파악했습니다. 1910년 비밀리에 육지 상륙을 기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같은 해 8월 경상남도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 병합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910
[한일 병합 후 친일 행보]
한일 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받고 일본이 만든 조선 귀족에 편입되었습니다. 은사공채금을 받았고, 이후 기업 및 은행 활동에 전념하며 친일 단체 활동,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 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습니다. 이는 그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0년 8월 경상남도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 병합 소식을 접했습니다. 체념한 그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후 후작 작위를 받고 일본이 자신들의 귀족인 화족과 구별해 만든 조선 귀족에 편입되었습니다. 1911년 2월 은사공채금 23만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정치 활동보다는 기업과 은행, 토지 매입 등의 활동에 전념했으며, 조선은행의 주요 주주였습니다. 독립운동 참여나 자금 요청을 거절하며 경제적 실력 양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각종 정치 행사에는 소극적이거나 불참하기도 했지만, 1913년부터 중추원 부찬의와 찬의 제안을 거절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 직책 요청을 받아들여 1921년 4월 중추원 고문에 선임되었고, 1926년에는 중추원 찬의에 선출되었으며 이완용 사망 후 중추원 부의장직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1932년 12월에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는 등 친일 행위로 일관했습니다. 이 때문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1911
[친일 단체 활동 시작]
조선귀족들의 친목 단체인 조양구락부유지회 창립 발기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문예구락부 회장과 조선귀족회 회장에 오르는 등 일제강점기 친일 단체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1911년 박영효는 조선귀족들의 친목 단체인 조양구락부유지회 창립 발기인이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문, 교양, 문자, 고전 등의 보급과 간행을 목적으로 하는 문예구락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는 조선귀족회 회장에 올랐습니다. 1912년 1월 이문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2월에는 권업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회사 성립 후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9월에는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에 귀족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1913
[기업 및 산업 활동 전념]
조선무역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조선임업조합 보식원의 발기인 겸 조합장이 되는 등 여러 기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조선경편철도회사 설립 발기인으로도 참여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1913년 4월 박영효는 조선무역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녹지 조림과 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바로 보식원의 조합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동래-대구 간 철도 건설을 위해 민자 유치를 계획하자, 7월 그는 지사들과 함께 조선경편철도회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1915년 1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성지부에서 활동했고, 5월에는 자신의 사저 750원을 물산공진회에 기부했습니다. 9월에는 박람회 명예고문에 위촉되었습니다.
1918
[은행 이사 및 고종 비문 작성]
조선은행 이사에 피선되었고, 이후 조선귀족회 회장직을 사퇴한 뒤 조선식산은행 이사가 되었습니다. 1919년 고종 사망 시 국장 고문 겸 석비전면서사원에 임명되어 고종의 비문을 작성했습니다.
1918년, 박영효는 조선은행 이사에 피선되었습니다. 같은 해 5월 조선귀족회 회장직을 사퇴했고, 10월에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되었습니다.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국장 고문 겸 석비전면서사원에 임명되어 고종의 비문을 작성했습니다.
1919
[3·1 운동 참여 거부와 친일단체 관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 서명 요청을 실패할 것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진압 및 해체 촉구 담화 작성 의뢰도 거절했으나, 이후 문화통치에 따라 친일단체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실패할 것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에게 3·1 운동의 진압이나 해체를 촉구하는 담화나 서신 작성을 의뢰했으나 역시 거절했습니다. 그 뒤 3·1 운동 후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력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5월 경성방직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 설립과 함께 경방의 초대 사장이 되었고, 6월에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1919년 12월 조선경제회 회장, 1920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20
[동아일보 초대 사장 역임]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노동대회 총재 선출로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물이 되면서 6월 사장직을 사퇴했습니다.
1920년부터 박영효는 민립대학 기성회, 조선인 민영 병원 설립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1920년 4월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초빙되었으며, 그 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5월에는 노동대회 총재에 선출되었는데, 이 일로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6월에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이어서 조선산업은행 발기인으로 창립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920년 10월 경성부 사립피병원 창립기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병원 설립 기성회 조직 후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21년 2월 신민공사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출되었고, 3월에는 사회단체인 사민회 총재와 유민회 총재에 위촉되었습니다. 유민회는 3.1 운동 이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 단체였습니다.
1921
[중추원 고문직 수락과 사회 활동]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추원고문에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산림회, 범태평양협회 등 여러 사회단체 고문 및 회장직을 역임하며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1년 4월, 박영효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추원고문에 선임되었습니다. 6월에는 공직을 맡게 되면서 산림회원으로 활동이 불가능했지만 조선산림회 고문에 위촉되고 명예회원이 되었습니다. 1921년 7월 조선인 임시 산업대회의 위원장으로 행사를 주관했고, 9월에는 범태평양 협회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10월에는 경성도시조사계획조사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11월에는 경성부에서 개최된 조선불교대회의 고문으로도 위촉되었습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장례위원이 되었고, 바로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식을 주관했습니다. 4월에는 제1회 조선미술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1923년 4월 제2회, 24년 4월 제3회, 25년 제4회 미술심사위원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습니다. 1922년 4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이 된 뒤, 6월 사회단체인 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장이 되었습니다.
1922
[중추원 고문 사퇴와 관동 대지진 대처]
중추원고문직을 사퇴하고 야인이 되어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조선협회 고문이 되는 등 잠시 주체적인 활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관동 대지진 시 조선인에 대한 여론 악화 수습에 노력했습니다.
1922년 9월, 박영효는 중추원고문직을 사퇴하고 야인이 되어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사회단체인 조선협회 고문이 되었으며, 조선문제 간신회 간사가 되었습니다. 1922년 10월 조선흥업은행 창립발기인으로, 11월에는 조선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1923년 1월 고학생구제방법연구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이후 조선서적인쇄사의 주주가 되었습니다. 1923년 5월 범태평양조선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9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 내 조선인들에 대한 인심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설득과 담화 호소 등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1923년 9월 관동진재의연금모집조성회를 조직, 관동 대지진으로 희생된 일본인들의 위문과 구호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본 내 악화된 조선인에 대한 여론 악화를 수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0월에는 간토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교부되는 일본 정부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조선예산불감축운동을 주관했습니다.
1924
[일선동조론 동조와 협력]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동조론에 호응하며 동민회의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하는 등 일제에 대한 협력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후 조선사문학회 회장, 경성흥산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일선 동조론에 대해 허위사실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박영효는 192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에 동조하게 됩니다.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동조론에 호응하며 동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곧 동민회 고문에 추대되었습니다. 5월에는 조선구제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11월에는 조선사문학회(유교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25년 불교연합단체인 조선불교단이 설립되자 고문에 위촉되었습니다. 6월에는 경성흥산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12월에는 정3위에 승서되어 다시 관직에 나갔습니다.
1926
[중추원 부의장직 수락]
중추원 찬의에 선출되고 순종 국장식 장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완용 사망 후 추도사를 낭독하고 중추원 부의장직 제의를 수락하는 등 일제에 대한 협력 행보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926년 박영효는 다시 중추원 찬의에 선출되었으며, 3월 교육협성회 고문에 추대되었습니다. 4월에는 순종이 붕어하자 순종 국장식 장의위원이 되고, 5월에는 장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습니다. 7월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취체역에 선출되었습니다. 10월 조선문헌협회에 후원금을 내고 특별찬조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경성방송국 JODK 취체역에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해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했고, 이어서 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의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해 말 다시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1927년 1월 일본 천황 다이쇼의 장례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임명되어 일본 도쿄에 다녀왔으며, 3월 귀국하여 조선농업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28
[일제 통치 협력의 정점]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위원회 위원, 조선박람회 총재,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조선비행학교 창립위원장 등 일제강점기 주요 직책과 친일 단체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28년 2월, 박영효는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위원회 위원, 조선귀족 편입 심사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달 조선박람회 경성협찬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9월에는 조선박람회 총재가 되었습니다. 6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조선비행학교 창립 위원회 위원 및 7월에는 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7월 왕공족심의위원회 심의관에 임명되고, 8월 조선금융제도조사회 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같은 달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유유아 심사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11월에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첩인 박씨를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건너가 즉위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대례기념장을 특별히 받았습니다. 1929년 1월 광영산업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고문에 위촉되었습니다. 5월에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8월 의주광산회사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었습니다. 9월에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단체인 창복회에 가입, 동회의 이사로 피선되었습니다. 10월 이토 히로부미 20주기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했고, 11월 조선산업주식회사 사장,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습니다.
1932
[최초의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며 일제 통치 체제 내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습니다. 이후 조선신궁봉찬회 고문,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 등 친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30년 5월 사단법인 조선공업회 고문이 되고, 6월 화순무연탄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어 운영했으며, 9월 조선임산공업주식회사 대표취체역이 되었습니다. 10월 조선식산은행 이사직을 사퇴하면서 동시에 조선식산은행 고문에 위촉되었고,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 본부 고문에 추대되었습니다. 1931년 11월 만몽재주 동포후원회 고문,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에 추대되고, 12월 조선공민교육회 회장에 선임되었습니다. 1932년 3월 조선간이생명보험 사업 자문위원회 위원, 4월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5월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부총재가 되고, 6월에는 공자의 도를 되살리고 신학(기독교)을 배척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유림단체 대성원에 가입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7월 신흥만몽박람회 명예부총재가 되었습니다. 1932년 12월, 박영효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달 조선나예방협회 발기인, 이듬해인 1933년 7월 중앙진흥협회 발기인이 됐고 8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고문 위촉, 10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으로 발족 후 고문에 임명됐습니다. 10월에는 경성부에서 당시 불교계가 연 이토 히로부미 25주기 추도재에 참석했습니다.
1935
[손녀 박찬주와 이우의 결혼 주선]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와 일본 왕실·귀족과의 결혼이 논란이 되자, 타협안으로 자신의 손녀 박찬주를 추천하여 이우와 결혼시켰습니다. 이는 왕실과의 사돈 관계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 재단법인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됐고, 7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자문위원회 고문, 11월 일만면화협회 조선지회 고문이 됐습니다. 1935년 10월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상건설회 발기인이 됐습니다. 미남 왕족으로 알려진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일본 왕실, 귀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의친왕도 일본 며느리 불가론을 주장하자, 박영효는 타협안으로 자신의 손녀 박찬주를 추천했습니다. 또는 이우 공이 이미 그의 손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습니다.
1939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 속에 사망하다]
후작이자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일본 귀족 서열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후 작위는 장손 박찬범에게 계승되었으며, 광복 후 친일 행적으로 지탄받아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1937년 4월 박영효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이사 겸임이었고, 10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피선됐습니다. 1938년 4월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발기인이 됐고, 10월에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은퇴하며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습니다. 1939년 금강산 협회 이사를, 2월에는 경성부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에 추대됐고, 4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고문에 선임됐으며, 7월 조선귀족회 통상총회 이사로 선출됐습니다. 1939년 9월 21일, 박영효는 후작·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일본 귀족 서열 정 2위 훈 1등으로 향년 78세에 사망했습니다. 사후 작위는 장손 박찬범에게 계승되었습니다. 1939년 11월 일본의 사회단체 흑룡회가 선정한 일한합방 조선측 유공자 추도회에서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과 함께 합병 공로자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그의 친일 행적은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묘소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원래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묘는 손자 박찬범이 묘터를 팔아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한 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습니다. 1962년 계몽,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감안되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으로 선정될 뻔했으나, 일제강점기에 후작을 받고 조선총독부에서 제수한 중추원과 관직을 역임한 점이 감안되어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