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전투

전쟁, 전투, 유럽 역사,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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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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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 최대 규모의 전투로 불리는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의 결과는 나폴레옹 프랑스의 라인강 동부 지배권을 소멸시켰고, 나폴레옹을 엘바섬으로 유배 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국민 전투'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는 약 5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참여하여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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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

[유럽 최대 규모의 전투 개시]

라이프치히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 19만 명과 연합군 33만 명 이상이 대치하며, 남쪽과 북쪽 방면에서 연합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양측은 약 2,500문 이상의 대포를 동원하는 대규모 교전을 벌였습니다. 초기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프랑스군이 반격하며 격전이 이어졌습니다.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전투의 막이 올랐습니다. 남쪽에서 7만 8천 명의 연합군이, 북쪽에서 5만 4천 명의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남쪽에서 주력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연합군은 초기에 우위를 점하는 듯했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연합군의 전열을 붕괴시키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이날 여러 거점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습니다.

[모케른 전투: 북부 전선 연합군 승리]

전투 북쪽 방면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러시아 및 프로이센 연합군과 마르몽 원수의 프랑스 제6군단이 모케른에서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요새화된 거점을 두고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7,000명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를 내며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며 북쪽 전황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10월 16일 밤늦게까지 이어진 모케른 전투는 북부 전황의 판도를 결정했습니다. 블뤼허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마르몽 원수의 프랑스 제6군단을 공격했습니다. 모케른은 장원, 성,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등 요새화된 지형이었고, 프랑스군은 벽에 설치된 총안에서 사격을 가했습니다. 격렬한 공방 끝에 프랑스군은 7,000명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연합군이 승리하며 모케른을 점령했습니다.

[작센군 배신과 나폴레옹의 퇴각 결정]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프랑스군에 소속되어 있던 5,400명의 작센 출신 병사들이 연합군으로 배신하여 합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전세를 뒤집기 어렵다고 판단,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엘스터 강을 건너 라이프치히에서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18일 전투 중,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장 레이니에의 프랑스 제7군단 소속 5,400명의 작센 출신 병사들이 프랑스군을 배신하고 연합군에 합류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8일 밤부터 19일 새벽 사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엘스터 강을 건너 라이프치히에서 퇴각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패배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연합군 대규모 증원군 합류, 전력 불균형 심화]

전투 이틀째, 연합군은 스웨덴의 칼 요한 왕세자와 러시아의 폰 베니히센 장군이 이끄는 14만 5천 명의 대규모 지원군을 받아 병력이 크게 증강되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은 1만 4천 명의 지원병만 얻어 전력 격차가 더욱 벌어졌습니다. 이로써 연합군은 다음 날 총공세에 필요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0월 17일, 라이프치히 전투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양측의 전력 증강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연합군은 스웨덴 왕세자 칼 요한과 러시아의 폰 베니히센 장군이 지휘하는 14만 5천 명에 달하는 막강한 지원 부대를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은 겨우 1만 4천 명의 지원병을 얻는 데 그쳤고, 이는 다음 날 전투에 임하는 양측의 병력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엘스터 강 다리 폭파 사고, 프랑스군 치명적 피해]

프랑스군이 퇴각하던 중, 엘스터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프랑스군이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폴란드 출신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는 강을 건너다 익사하는 등 프랑스군은 퇴각 과정에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9일 정오 무렵, 프랑스군이 엘스터 강을 건너 퇴각하던 중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령이 퇴각 작전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너무 일찍 다리를 폭파시킨 것입니다. 이 폭발로 인해 강을 건너던 수천 명의 프랑스군이 사망하고, 후방에 남아있던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특히 프랑스군 후위를 지키던 용감한 폴란드인 사령관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원수는 이 사고로 강을 건너다 익사했고, 자크 마크도날 원수 역시 간신히 목숨만 건졌습니다. 이 사고는 프랑스군의 피해를 더욱 키웠습니다.

[연합군의 전면 총공격, 프랑스군 후퇴 시작]

연합군은 북쪽의 칼 요한 왕세자와 블뤼허 원수, 남쪽의 바클라이 드 톨리와 폰 베니히센 장군, 그리고 서쪽의 규레이 장군이 이끄는 병력으로 전 방면에서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9시간이 넘는 격전 끝에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돌파를 막아냈지만, 서서히 라이프치히 시내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며 전세가 기울었습니다.

10월 18일, 연합군은 전날 증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라이프치히 전역에서 대규모 총공세를 감행했습니다. 북쪽에서는 스웨덴의 칼 요한 왕세자와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가, 남쪽에서는 러시아의 바클라이 드 톨리, 베니히센 장군과 오스트리아의 폰 헤센-함부르크 공이 공격을 지휘했습니다. 서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규레이 장군이 주도했습니다. 9시간이 넘는 치열한 사투 끝에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돌파를 저지했지만, 결국 라이프치히 시내 쪽으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이 바하우를 접수하고, 오스트리아군이 뤼스니치히를 점령하는 등 연합군이 주요 거점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연합군의 최종 승리, 나폴레옹의 몰락 시작]

라이프치히 전투는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총 3만 8천 명의 사상자와 3만 명의 포로를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연합군도 5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 승리로 프랑스 제국의 라인강 동쪽 지배권이 소멸되었고, 나폴레옹은 결국 황위에서 물러나 엘바섬으로 유배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0월 19일, 라이프치히 전투는 연합군의 최종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측은 3만 8천 명의 사상자와 3만 명의 포로를 포함해 총 8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325문의 포와 28개의 군기를 나포당했습니다. 연합군 역시 총 36만 2천 명의 병력 중 약 5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 제국의 라인강 동쪽 지배권이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대프랑스 동맹이 1814년 프랑스를 공격하는 발판이 되었고, 결국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위를 포기하고 엘바섬으로 유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시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91미터 높이의 푈커슐라흐트덴크말(Völkerschlachtdenkmal)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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