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교회

독일 개신교, 저항 운동, 기독교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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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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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교회는 1934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대항하여 설립된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입니다. 나치 이념에 동조하며 '하나의 제국교회'를 만들려 한 '게르만기독교'에 반대하며 교회의 독립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특히 1934년 《바르멘 선언》을 통해 국가의 교회 간섭은 잘못이며, 하나님 말씀만이 복종의 대상임을 선언했습니다. 이들의 저항은 종종 박해로 이어졌고, 마르틴 니묄러,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많은 지도자들이 수용소에 투옥되거나 순교했습니다. 고백교회는 나치 시대 독일 기독교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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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

신성 로마제국에서 '지배자의 종교가 피지배자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리가 수립되었으며, 가톨릭과 루터교만이 공식적으로 보장받았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면서 신성 로마제국 전반에 걸쳐 'cuius regio, eius religio' 원리가 적용되었다. 이는 영주가 자신의 종교를 영민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으나, 모든 소유와 함께 이주할 권리(ius emigrandi)도 보장했다. 다만, 이 화의는 가톨릭과 루터교만을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칼뱅주의는 배제했다.

1613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개종]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루터교에서 칼뱅주의로 개종했으나, 당시 칼뱅주의는 인정받지 못해 지배자의 종교 원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1613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루터교에서 칼뱅주의로 개종하였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칼뱅주의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지배자의 종교가 피지배자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리(cuius regio, eius religio)를 행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한 명의 군주 아래에서 둘 이상의 교파가 허용되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648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칼뱅주의 인정]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칼뱅주의도 '지배자의 종교가 피지배자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리의 보장 범위에 포함되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배제되었던 칼뱅주의를 'cuius regio, eius religio' 원리가 보장하는 범위에 포함시켜, 독일 내 종교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69

[북독일 연방의 비종교화 권리 제정]

북독일 연방이 비종교화에 대한 권리를 제정하여 모든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허용함으로써, 개인의 종교적 자유가 확대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1869년에 비종교화에 대한 권리를 제정하여 모든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허용했다. 이는 개인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강화하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8

[호프만 장관의 세속주의 정책 시도]

독립사회민주당의 아돌프 호프만이 장관으로 임명되어 교회 재산 몰수 등 급진적인 세속주의 정책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시위로 사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혼란기인 1918년, 공격적인 세속주의자였던 아돌프 호프만이 독립사회민주당에 의해 프로이센 교육 및 공적 예배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교회에 대한 정부 지원금 삭감, 교회 재산 몰수, 대학 신학 과정 삭제, 학교 기도 및 의무적 종교 교육 금지 등 급진적인 세속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의 격렬한 시위로 인해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이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논쟁을 촉발했다.

1922

[독일 개신교 교회 연합(EKD) 형성]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독일 개신교 교회 연합(EKD)이 28개의 지방 교회 연합 형태로 형성되어, 독일 개신교의 지역적 자율성을 확립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인 1922년, 독일 개신교 교회 연합(EKD)이 국가 경계와 유사한 28개의 지방 교회(Landeskirchen)들로 이루어지며 형성되었다. 이 연합 체제는 독일 개신교의 광범위한 지역적 자율성을 보장했고, 신학 및 교회 조직에 관한 갈등을 해결하고 토론하는 국가 교회 의회 또한 큰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1931

[게르만기독교 운동 발전]

나치즘을 지지하는 개신교인들의 단체인 게르만기독교 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하며, 나치 정권의 목표에 부합하는 '하나의 통합된 제국교회'를 주장했다.

바이마르 시대 후기인 1931년, 광적인 나치 개신교인들의 그룹인 게르만기독교 운동이 발전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빌헬름 2세 퇴위 이후의 사회정치적 긴장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되었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고취하고 구약을 경시하는 등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개신교회들을 나치 정권의 '국민(Volk) 정신과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에 부합하는 하나의 통합된 제국교회(Reichskirche)로 조직화하는 목표에 공감했다.

1933

[아리아인 조항에 대한 비상 연맹 형성]

나치 정권의 아리아인 조항에 반대하여 마르틴 니묄러 주도로 목사들의 비상 연맹이 형성되었다. 이는 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국가 간섭에 저항하는 움직임의 시초가 되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도입한 아리아인 조항(유대인 혈통의 공직자 배제)은 일부 성직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 목사들의 비상 연맹(Pfarrernotbund)이 결성되었으며, 이 연맹은 유대인 혈통의 성직자들을 지지하고, 교회의 고백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에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개종한 유대인과 그 후손들도 기독교 교리에 따라 교회의 완전한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연맹의 저항은 처음에는 반유대주의 자체보다는 정권의 교회 간섭에 대한 반발에 중점을 두었다. 이 연맹은 고백교회 형성의 핵심적인 전초가 되었다.

[베를린 스포르트팔라스트 게르만기독교 집회]

베를린 스포르트팔라스트에서 게르만기독교 집회가 열려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연합을 선포하고 구약 성서 제거, 유대인 신자 축출 등 극단적인 친나치 주장을 펼쳤다. 이는 오히려 많은 개신교인들의 반발을 사 고백교회 결성 촉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33년 11월 13일, 베를린 스포르트팔라스트에서 게르만기독교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 집회에서는 나치 만자문이 곳곳에 걸린 채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연합이 선포되었으며, 연사들은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목사 제거, 유대인 혈통 신자 축출, 아리아인 조항의 교회 전반 적용, 구약 성서 제거, 비게르만적 요소 제거, 예수에 대한 '영웅적' 해석 수용 등 극단적인 친나치 주장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적인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많은 개신교인들이 국가가 교회의 신학적 핵심까지 간섭하려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이는 고백교회가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1934

[루트비히 뮐러의 교회 탄압]

독일 복음주의 교회(DEK) 수장 루트비히 뮐러는 고백교회에 가담한 목사들을 해고하고 지방 교회의 수장들을 퇴임시키는 등 강압적인 조치로 고백교회의 단결을 촉진했다.

1934년, 독일 복음주의 교회(DEK)의 수장이었던 루트비히 뮐러는 비상 연맹에 가담한 목사들을 해고하거나 전직시켰고, 4월에는 뷔르템베르크 교회의 테오필 뷔름 주교와 바바리아 교회의 한스 마이저 주교를 강제로 퇴임시켰다. 이들이 속한 교회 의회가 DEK 합병을 계속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뮐러와 DEK의 이러한 공격성은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고백교회가 조직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강력하게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르멘 신학선언 발표]

바르멘에서 고백교회 의회가 열려 칼 바르트가 작성한 《바르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국가의 교회 통제는 교리적으로 틀렸음을 천명하며, 어떤 국가도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한계를 갖는다고 명시했다.

1934년 5월, 바르멘에서 고백교회 의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마르틴 니묄러를 비롯한 고백교회 목사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작성한 역사적인 《바르멘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은 독일 교회가 국가의 기관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며, 교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핵심 내용은 어떤 국가도, 심지어 전체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고백교회가 나치의 승인을 받은 제국교회(Reichskirche)를 이교적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이후 독일에는 공식적인 제국교회와 스스로를 참된 교회라고 여긴 고백교회라는 두 종류의 개신교 교회가 실질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교회부 신설 및 한스 케를 임명]

히틀러는 교회 문제에 직접 개입하여 뮐러의 권한을 박탈하고 교회부를 신설해 한스 케를을 임명하며 국가와 교회의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1934년 가을, 히틀러는 루트비히 뮐러의 정치적 무감각과 게르만기독교의 스포르트팔라스트 집회 실패로 인한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교회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 그는 바바리아 교회의 마이저와 뷔르템베르크 교회의 뷔름 주교를 가택연금하고, 뮐러의 권한을 박탈했으며, 강제적 일체화(Gleichschaltung)를 잠정 중단했다. 대신 교회부(Church Affairs)라는 이름의 제국 부처를 신설하고 자신의 변호사 친구인 한스 케를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로써 교회투쟁(Kirchenkampf)은 교회 내부의 갈등을 넘어 국가와 교회의 대결 구도로 전환되었다. 케를은 뮐러보다 온건하고 정치적으로 능숙하게 조정을 시도하려 했다.

1935

[루트비히 뮐러의 사임]

개신교 교회 통합에 실패하고 교회 내 반란을 초래한 책임을 지고 독일 복음주의 교회(DEK) 수장 루트비히 뮐러가 불명예스럽게 사임했다.

1935년 말, 독일 개신교 교회의 통합에 실패하고 교회 내 반란을 야기한 책임을 지고 루트비히 뮐러는 다소 불명예스럽게 사임하게 되었다. 그의 퇴임은 히틀러 정권이 교회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있어 초기 단계의 실패를 의미했다.

1936

[고백교회의 히틀러에게 제안서 제출]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 고백교회가 히틀러에게 정권의 반기독교적 경향과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고 교회 문제 간섭 중단을 요구하는 단호한 제안서를 보냈다.

1936년 5월,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 고백교회는 히틀러에게 예의바르면서도 단호한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 제안서에는 정권의 반기독교적 경향에 대한 저항, 정권의 반유대주의 비판, 그리고 개신교 교회의 내부 문제에 대한 정권의 간섭 중단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비판은 나치 정권의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1937

[고백교회 여성 지도자들의 유대인 대변 노력]

베를린 고백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인 마르가 모이젤, 엘리자베스 슈미츠, 게르트루트 스타에벤이 교회가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유대인들을 대변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마르틴 니묄러가 시무했던 베를린 교구의 부제 마르가 모이젤과 두 명의 여성 지도자 엘리자베스 슈미츠, 게르트루트 스타에벤은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에 대항하여 교회가 침묵하지 말고 유대인들을 대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모이젤은 "기독교 교회들의 침묵에 대한 가장 열정적이고 직설적인 저항"을 보여주었지만, 이들의 노력은 고백교회 내부에서도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고백교회 저항의 한계와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마르틴 니묄러 등 고백교회 지도자 체포 및 수용소행]

나치 정권은 고백교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마르틴 니묄러를 비롯한 수백 명의 반대 목사들을 체포하고 수용소로 보냈다.

1937년 마르틴 니묄러가 체포되고, 이후 나치 정권은 고백교회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하인리히 그뤼버 등 수백 명의 반대 목사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 이로 인해 고백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당하는 고난을 겪었으며, 이는 고백교회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니묄러와 그뤼버는 살아남았으나,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빌헬름 쵤너 감독의 사임]

나치의 교회 탄압책과 수감 목사 면회 금지 조치에 반발하여 화해 위원회 위원장 빌헬름 쵤너 감독이 사임했다.

나치 정권의 탄압이 심화되면서 반대하는 목사 수백 명이 체포되고 고백교회의 자금 몰수 및 헌금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특히 게슈타포가 수감된 목사들에 대한 면회를 금지하자, 화해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은퇴한 베스트팔렌의 빌헬름 쵤너 감독은 이를 참을 수 없었고, 결국 1937년 2월 12일에 사임했다. 이는 나치 정권과 교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교회부 장관의 '국가사회주의=기독교' 선언]

교회부 장관 한스 케를이 "적극적 기독교는 국가사회주의"라고 발표하며 교회를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종속시키려는 정권의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빌헬름 쵤너 감독의 사임 이튿날인 1937년 2월 13일, 교회부 장관 한스 케를은 충격적인 발표를 통해 교회에 대한 나치 정권의 적의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는 "적극적 기독교(Positives Christentum)는 국가사회주의이며, 국가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총통이 "새로운 계시의 전조"라고까지 언급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닌 나치 당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고 강변함으로써, 교회를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완전히 종속시키려는 정권의 노골적인 의도를 보여주었다.

1943

[전쟁 중 유대인 은신 및 위조 문서 지원]

전쟁 중 고백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위조 신분증 및 통장을 제작하여 도왔으나, 이로 인해 프란츠 카우프만은 총살당하고 헬레네 야콥스는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에서 고백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나치 정권의 유대인 박해에 맞서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비밀리에 숨겨주었다. 또한 비밀 회동을 통해 신분증이나 통장을 기부받아 위조 과정을 거쳐 지하의 유대인들에게 전달, 그들이 합법적인 베를린 시민처럼 통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인도적인 지원 활동에 가담한 혐의로 프란츠 카우프만은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으며, 헬레네 야콥스는 투옥되는 등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고백교회 내부의 적극적인 저항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45

[디트리히 본회퍼 교수형]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테겔 감옥, 부헨발트 수용소를 거쳐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교했다.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저명한 신학자이자 고백교회 소속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처음에는 테겔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후, 결국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순교는 고백교회와 기독교 저항 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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