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 (1891년)
예술가, 연극인, 평론가, 기업인,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02:13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폭넓게 활동한 대한민국의 다재다능한 예술인이다. 신극 운동의 선구자로, 잡지 《개벽》의 학예부장으로서 연극 이론과 평론을 정립하고 '신파극-신극' 논쟁을 주도했다.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여 연극인 양성에 힘썼으며, 극장 경영과 야담 운동에도 투신하는 등 다방면에서 한국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1
1891년 조선 경상도 부산에서 본명 현희운(玄僖運)으로 태어났으며, 연주 현씨(延州) 본관이다. 유아기 일부를 경상도 대구에서 보낸 적이 있으며, 주로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1904
14세 시절인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별세하여 귀국했고,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0
[메이지 대학에서 연극 공부 및 신극 운동 관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와 메이지 대학 법과에서 수학하며 신극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극 공부를 시작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와 메이지 대학 법과에서 수학했다. 메이지 대학 재학 중 신극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극 공부를 시작하며 조선적인 연극 구현의 뜻을 품게 되었다.
1917
조선적인 연극을 구현하겠다는 뜻을 품고 1917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연극학교를 잠시 운영하며 연극인으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919
1919년에 귀국한 후, 연극을 비롯한 문학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예술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20
[잡지 '개벽' 학예부장으로 문학이론 및 평론 발표]
창간된 잡지 《개벽》의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며 연극 중심의 문학 이론과 평론을 발표하며 신극 운동의 이론적 정식화에 기여했다.
1920년에 창간된 잡지 《개벽》의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희곡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비평 문화가 없던 풍토에서 연극을 중심으로 다수의 문학 이론과 문학 평론을 발표하여 연극 장르 소개와 신극 운동의 이론적 정식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부터 3년 동안 가장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21
1921년, 일본 신파극 도입의 선구자 이기세와 '신파극-신극' 논쟁을 벌였다. 이는 당시 연극계의 중요한 이론적 논쟁 중 하나였으며, 현철은 또한 유명 희곡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 및 번안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1924
[한국 근대예술사에서 중요한 조선배우학교 설립]
한국 근대예술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한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여 연극 배우를 양성했다.
중국 상하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에도 연예강습소(1920년경)와 예술학원(1922년)을 설립했다. 특히 1924년에 세운 조선배우학교는 연극과 영화 분야의 배우를 양성하며 한국 근대예술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으며, 박제행, 복혜숙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 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나, 현철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연극인 양성 사업에 주력했다.
1927
[영화계 진출 및 '숙영낭자전' 기획]
조선물산장려회 영화선전부 주임으로 재직하며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고, 1928년에는 단성사와 합작으로 영화 《숙영낭자전》을 기획했다.
연극인 양성 작업을 통해 차츰 영화계와 관련을 맺게 되었고, 1927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영화선전부 주임으로 재직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아울러 조선배우학교가 제작과 캐스팅을 맡는 조건으로 단성사와 합작하여 1928년 영화 《숙영낭자전》이 기획되었다.
1928
[조선극장 경영 참여]
비슷한 시기에 조선극장 경영에 참여하여 공연 기획과 극장 경영을 시작했으나, 계획을 온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
1927년~1928년경 조선극장 경영에도 참여하여 공연 기획과 극장 경영을 시작했다. 이 극장 안에 연예학교를 설치하고, 매주 토요일 예술선전일 강연 개최, 전문 월간지 발간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극장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이 계획들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1935
[야담 운동에 투신]
1930년대 중반부터 야담에 큰 관심을 갖고 야담대회 개최, 야담동호회 조직 등 야담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야담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유명 야담가들과 함께 야담대회를 개최하고 야담동호회를 조직하는 등 야담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이는 연극이나 영화 같은 집단 예술에서 느낀 한계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60
[서울시 문화위원회 연극분과위원장 역임]
광복 이후 1960년대에 서울시 문화위원회 연극분과위원장을 지내는 등 연극계에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만큼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광복 이후에도 연극계에 남아 있었으며, 1960년대에는 서울시 문화위원회 연극분과위원장을 지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으나, 일제강점기와 같은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5
1965년 3월 19일, 75세를 일기로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군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