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 (1209년)
고려 시대, 무신정권, 권신, 정치가, 승려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00:51
최우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무신정권의 제3대 집권자가 된 인물이다.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하며 강경한 대몽 외교를 펼쳤다. 권력 강화를 위해 많은 정적을 살상했으나, 민생 안정 노력으로 일부 지지를 얻기도 했다.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다 1257년 독살되며 그 죽음과 함께 무신정권 몰락의 서막을 알렸다.
1209
[최항 출생]
최우의 서자로 창기 서련방의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우봉이다. 처음 이름은 최만전이었고, 승려 시절 법명은 법우였다.
최우의 서자로 창기 서련방의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최항 본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120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이며, 처음 이름은 만전이라고 불렀다.
1248
[승려에서 환속, 개명 및 관직 진출]
송광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최항은 아버지 최우가 병이 들자 환속하여 '항'으로 개명했다. 이후 음서 제도를 통해 관직에 올랐다.
처음 송광사에서 형인 만종과 함께 승려가 되어 쌍봉사 주지로 있다가 고종 35년에 아버지 최우가 병이들자 속세에 돌아와 항으로 개명하였다. 임익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에게 예를 익혔으며, 당시 고려 시대에 부나 조부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품계를 받을 수 있었던 '음서제도'로 관직에 올랐다.
1249
[무신정권 실권 장악 및 교정별감 취임]
아버지 최우가 사망하자 정권을 인수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가 되었고, 병부상서를 거쳐 동서북면을 총괄하는 교정별감에 취임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1249년 최우가 죽은 뒤에 정권을 인수하여 은청광록대부로 승진 추밀원부사가 되었다가,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을 거쳐 병부상서가 되어 동북면병마사를 겸하였다. 이어 동서북면을 총괄하는 교정별감에 취임한다. 이 시점부터 1257년까지 8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정적 김미 제거 및 김경손 유배]
자신을 제거하려 모의한 김약선의 아들 김미를 삭방출가시키고, 이를 밀고했으나 화를 면치 못한 김경손 장군을 백령도로 유배 보내며 정적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시기심이 많아 1249년 김약선의 아들이자 김경손의 조카인 김미는 최항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경손에게 밀지를 보내 최항을 제거할 것을 상의 및 모의하였으나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김경손은 최항에게 이를 밀고하여 용서를 구했지만 최항은 김미를 삭방출가시키고 김경손 장군을 백령도에 유배보냈다.
1250
[정적 숙청 및 무고 남용]
전추밀원부사 주숙과 장군 김효정 등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였다. 무고를 맹신하여 조사 없이 엄벌에 처하는 등 무자비한 권력 강화를 이어갔다.
1250년 전추밀원부사 주숙 등을 죽였으며, 무고를 듣고도 사람을 시켜 조사하지 않고 이를 맹신하였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잘 믿어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고하는 자에게도 상을 주고 무고를 받은 자는 가차없이 추국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1250년 음력 3월에는 주숙·장군 김효정 등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였으며, 장군 최종필, 나주 부사 이균 등을 귀양 보냈다.
1251
[계모 독살 및 대규모 정적 숙청]
자신의 계모 대씨를 독살하고, 그 일당인 민희와 김경손을 유배지에서 죽였다. 최환, 김안, 정홍유를 유배시키고 참지정사 정안을 죽이는 등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1251년 계모 대씨를 독살하고, 그 일당인 추밀원지사 민희와 추밀원부사 김경손을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죽였다. 이어 좌승선 최환,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등을 유배시키고, 참지정사 정안을 죽였다.
1252
[몽골 사신 친영 요구 거부]
몽골 사신 다가 등이 고종에게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에서 친히 맞이할 것을 요구했으나, 최항은 이를 거부하고 종실 신안공 전을 대리로 보내 몽골의 요구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1252년 몽골의 사신 다가 등이 들어오는데,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로 올라와 친히 사신을 맞으라고 요구하자 모든 신하들이 다 그대로 시행하기를 결의하였으나, 최항이 홀로 이를 거부하고 대리로 신안공 전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1252년에는 몽골에서 파견된 사신 다가 등이 왕의 출륙 친영을 요구해 오자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종실인 신안공 왕전을 보내어 대신 몽골 사신들을 대면하게 하는 등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 강경책을 썼다.
1253
[몽골의 재침략과 문하시중 임명]
몽골은 최항의 사신 친영 거부를 빌미로 고려를 침입했고, 고종에게 강화 환도를 독촉했다. 이 와중에 최항은 문하시중에 오르며 최고위직에 올랐다.
1253년 몽골은 이를 빌미로 야굴과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종에게 강화에서 환도하기를 독촉하여 침입하자 영녕공 준 등이 태자를 보내어 몽골군을 무마시키자고 건의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1253년 문하시중에 올랐다.
1256
1256년 제중강민공신에 봉해졌으며, 중서령감수국사로 재직 중이었다.
1257
[최항 독살 사망]
제3대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집권자로 8년간 재위했으며,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독살되어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무신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257년 제3대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로 재위 8년,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로 독살되어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무신정권은 몰락하게 된다.
1963
[최항 묘지석 및 유물 발견]
강화도 송해면 야산에서 최항의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묘소 근처에서 국보 133호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가 출토되었다.
1963년 강화도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의 야산에서 최항 묘지석이 발견되고, 그의 묘소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가 출토되었다. 국보 13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