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어진
조선시대 미술품, 초상화, 문화유산
최근 수정 시각 : 2026-01-25- 17:40:08
- 조선시대 철종의 유일한 구군복 어진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149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861년 당대 최고 화원인 이한철과 조중묵 등이 도사하여 제작.- 1954년 부산 용두산공원 대화재로 일부가 소실되는 피해를 겪었지만,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채색과 정세한 무늬 표현 등 조선시대 어진 도사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1861
[어진 제작의 명령]
철종 재위 12년에 국왕의 모습을 남기기 위한 어진 제작이 공식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통치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예술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세도 정치의 한복판에서도 어진 제작은 엄격한 예법에 따라 거행되었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국왕의 생전 모습을 화폭에 담아 보존함으로써 왕조의 영속성을 기원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철종은 자신의 어진이 후대에 전해질 것을 고려하여 제작 과정 전반을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이 사업을 위해 궁중의 기록화와 초상화에 능통한 화원들이 전국에서 차출되어 한곳에 모였습니다.
[당대 최고 화원들의 소집]
도사화원으로 이한철과 조중구가 발탁되어 제작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인물 묘사와 채색 기법에서 당대 독보적인 기량을 보유한 화가들이었습니다. 어용 화사들의 긴밀한 협력으로 철종의 외양적 특징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신까지 포착했습니다.
이한철은 조선 후기 초상화의 거장으로 꼽히며 왕실의 무한한 신뢰를 받던 도화서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조중구 역시 정교한 필치로 명성이 높았으며, 이들의 협업은 당시 어진 제작 기술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화원들은 국왕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며 피부의 결 하나까지도 실물과 다름없이 묘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독특한 군복 차림의 선정]
철종은 일반적인 곤룡포 대신 군복인 융복을 입은 모습으로 화폭에 담겼습니다. 머리에는 대사립을 쓰고 가슴에는 홍주의를 입어 무관의 기개와 통치자의 위엄을 동시에 자아냈습니다. 이는 국왕이 군사권을 쥔 최고 통수권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파격적인 구성이었습니다.
어진 속 철종은 주황색 소매의 홍주의를 입고 호수(범의 수염)를 꽂은 화려한 전립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융복 차림은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철종의 서민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세련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었습니다.
다른 국왕들의 어진이 주로 정무복 차림인 것과 대비되어 철종 어진만의 독보적인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상징적 기물들의 정교한 묘사]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허리에 칼을 찬 모습은 어진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연출입니다. 모든 기물은 치밀한 필치로 그려져 당시 왕실 공예와 복식의 수준을 완벽하게 증명합니다. 인물의 자세와 배치된 사물 하나하나에 통치자의 철학이 투영되었습니다.
오른손에 쥔 접부채는 왕의 여유로운 모습과 함께 당시 제작 시기의 계절감을 암시하는 미학적 요소입니다.
허리에 찬 칼과 손에 든 등채(지휘봉)는 왕이 군대를 통솔하는 엄격한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세부 묘사들은 철종 어진이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조선 왕실의 권위를 시각화한 상징물임을 입증합니다.
[선원전 공식 봉안]
완성된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에 소중히 봉안되어 국가적인 관리 체계에 들어갔습니다. 선원전은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 어진은 그 자체로 국왕의 현신으로 대우받았습니다. 매년 정기적인 제례를 통해 선대왕의 덕을 기리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선원전에 모셔진 어진은 전문 관리에 의해 습도와 조명이 철저히 조절되는 환경에서 보존되었습니다.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 앞에서 고하는 의식이 치러질 정도로 그 상징성이 컸습니다.
철종 어진은 구한말의 격동기 속에서도 선원전을 지키며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았습니다.
1950
[전쟁의 포화와 부산 피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왕실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어진들을 급히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국보급 유산들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긴박한 결정이었습니다. 부산의 관재청 창고는 어진들이 화마를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온전하게 머물렀던 안식처였습니다.
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궁궐에 남아있던 어진들을 궤짝에 넣어 급히 이송했습니다.
부산은 당시 임시 수도로서 국가의 핵심 문화 자산들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철종 어진은 이 과정에서 다행히 직접적인 전투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피란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54
[화면의 3분의 1 소실]
불길로 인해 화면의 오른쪽 부분이 타버려 전체의 3분의 1가량이 영구적으로 사라졌습니다. 다행히 국왕의 얼굴과 상반신의 핵심적인 부분은 소실을 면해 철종의 용안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손상된 흔적은 전쟁과 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역사적 흉터로 남았습니다.
타버린 부위에는 오른쪽 팔과 어깨 일부, 그리고 배경의 기물들이 포함되어 전체적인 구도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탄화된 비단 조각들은 부스러지기 쉬운 상태였으며 화재 당시의 그을음이 전체 화면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왼쪽의 정교한 묘사는 이 작품이 지녔던 원래의 높은 예술적 수준을 짐작게 합니다.
[부산 창고 대화재의 참변]
어진이 임시 보관되어 있던 부산의 창고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수많은 유물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조선 역대 국왕의 얼굴들이 영구적으로 손실되는 국가적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철종 어진 역시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재는 관리 소홀과 우발적인 사고가 겹쳐 발생했으며 한국 문화재 역사상 최악의 손실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영조, 정조 등 수많은 어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철종 어진은 기적적으로 일부가 남았습니다.
화재 직후 수습된 어진은 열기에 의해 비단이 갈색으로 변하고 곳곳이 갈라진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1987
[과학적 보존 처리의 실시]
훼손된 어진의 추가 부식을 막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체계적인 보존 처리를 시작했습니다. 현대적인 보존 과학 기술을 총동원하여 약해진 비단 결을 강화하고 오염 물질을 정밀 제거했습니다. 소실된 부분을 억지로 그려 넣기보다 현재의 상태를 완벽히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특수 수지를 사용하여 열에 의해 바스러진 비단 섬유를 하나하나 고정하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훼손된 경계면을 정리하여 추가적인 찢어짐을 방지하고 전통적인 표구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보강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철종 어진은 더 이상의 훼손 없이 안전하게 전시와 연구가 가능한 상태를 회복했습니다.
2006
[국가 보물 제1492호 지정]
국가는 철종 어진의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독창성을 공식 인정하여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조선 후기 왕실 회화 연구와 복식사 연구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료로 평가받았습니다. 화면의 일부 훼손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원형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문화재청은 이 어진이 1861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시기와 화원을 알 수 있는 매우 드문 사례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융복이라는 특수 복식을 착용한 유일한 어진으로서 조선의 군사 복식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보물 지정을 계기로 철종 어진은 국가 차원의 엄격하고 과학적인 관리 시스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