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 (기관)
고려시대 기관, 조선시대 기관, 세곡 운송, 물류 시스템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9:45
조창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의 세곡을 수납, 보관, 운송하던 중요한 창고 시스템입니다. 992년 고려 성종 때 정비되어 국가 재정의 핵심 역할을 했으며, 주로 해상 및 강변에 위치했습니다. 왜구 침입 등으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운영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점차 그 기능이 약화되고 민간 운송의 비중이 커지면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각 지역의 특성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조창들이 설치되고 폐지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992
[조창 제도 정비 및 공식화]
고려 성종 대에 세곡 운송 및 보관을 위한 조창 제도가 공식적으로 정비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고려 정종 때 이미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992년 고려 성종 때 조창 제도가 정비되며 국가의 주요 물자 운송 및 보관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일각에서는 이보다 앞선 고려 정종 때 이미 조창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조창은 세곡의 수납, 보관, 운송의 세 가지 핵심 기능을 담당했다.
1350
고려 후기인 14세기 후반 무렵, 왜구의 침입이 전국적으로 극심해지면서 해안가에 위치한 조창들의 안전이 위협받았다. 이로 인해 세곡의 수납, 보관, 운송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거나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1392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조창 제도는 계속해서 유지 및 발전되었다. 이는 국가 재정 및 물자 조달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년) 한강 남쪽 강변에 경창이 설립되었다. 이곳은 경기도와 강원도 평강, 철원에서 거둔 세곡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세곡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중심 조창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광통교 부근에는 군자감, 풍저창, 광흥창 등의 본창이 설치되어 각기 군량미, 정부 경비, 관리 녹봉을 담당했다.
1400
[조선 초, 조창 시스템 재활성화]
고려 후기 왜구 침입으로 위축되었던 조창의 기능이 조선 초기에 다시 활성화되면서 국가 물류 시스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일시 정체되었던 조창 시스템은 조선 건국 후 안정화 시기에 접어들며 다시금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안정적인 재정 확보와 물자 운송에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1428
[덕성창, 물길 문제로 이전 및 개칭]
전라북도 용안 금두포에 있던 덕성창은 물길이 막히는 문제로 전북 함열 피포로 옮겨졌으며, 이때 성당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428년 세종 때 전라북도 용안 금두포에 위치했던 덕성창은 물길이 막히는 문제가 발생하여 함열 피포로 이전되었고, 명칭 또한 성당창으로 변경되었다. 이 조창은 전라북도 지역의 세곡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1455
[가흥창, 세조 대 현재 위치 및 명칭 확정]
충주에 있던 조창은 고려 덕흥창, 조선 초 경원창 등을 거쳐 세조 때 가흥역 근처로 이전하며 가흥창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에 위치한 조창은 고려시대에는 덕흥창, 조선 초기에는 경원창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세종 때 다시 덕흥창으로 불렸다가, 세조 때 가흥역 근처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흥창'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곳은 경상도와 충청도 음성, 영동 등지의 세곡을 관리했다.
세조 때 충청남도 아산에 공세곶창이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창고 시설 없이 연해안 포구에 세곡을 쌓아두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충청도 서산, 한산 등 40여 고을의 세곡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72
[덕성창, 용안으로 재이전 후 명칭 회복]
1428년 함열 피포로 이전되었던 성당창(구 덕성창)은 성종 때 다시 용안으로 옮겨지며 덕성창 또는 득성창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1472년 성종 때, 함열 피포에 있던 성당창은 다시 용안으로 이전되며 원래의 덕성창 또는 득성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전라북도 지역 세곡 관리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였다.
1512
1512년 중종 때 덕성창은 옥구 군산포로 최종적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군산창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잦은 이전과 명칭 변경은 조창 운영의 효율성과 지역 물류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었다.
[영산창 폐지 및 법성창으로 업무 이관]
전라남도 나주에 있던 영산창은 조운선의 침몰이 잦아 중종 때 혁파되었고, 그 업무는 법성창으로 이관되었다.
1512년 중종 때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했던 영산창은 조운선 침몰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영산창은 폐지되었고, 그 기능은 인근의 법성창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안전상의 문제와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결정이었다.
1523
[공세곶창, 창고 마련 후 공진창으로 개칭]
충청남도 아산에 있던 공세곶창은 창고 없이 세곡을 보관하다가 중종 때 비로소 80칸 규모의 창고를 마련하고 공진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조 때 설치된 충청남도 아산의 공세곶창은 초기에는 창고 시설 없이 연해안 포구에 세곡을 쌓아두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1523년 중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80칸 규모의 창고가 건립되었고, 이와 함께 명칭도 공진창으로 변경되었다.
1592
[임진왜란 이후 조창 기능 쇠퇴 시작]
16세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 통제하의 조창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사선에 의한 세곡 운송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래, 국가 주도의 조창을 통한 세곡 운송 시스템은 전쟁의 혼란과 함께 그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민간 선박인 사선(私船)을 이용한 세곡 임운(賃運)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운송은 경강상인의 경강선과 훈련도감의 도감선이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1655
1655년 효종 때 황해도 배천 금곡포에 금곡포창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 조창은 황해도 해주와 풍천 등지의 세곡을 수납하고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예성강에서 한강으로 세곡을 운송하는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1713
[금곡포창, 조운선 침몰 잦아 폐지]
예성강에서 한강으로 세곡 운송 중 조운선 침몰이 자주 발생하여 1713년 숙종 때 금곡포창이 폐지되었다.
1713년 숙종 때, 황해도 배천 금곡포에 위치했던 금곡포창은 예성강에서 한강으로 세곡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조운선 침몰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운영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결국 안전상의 문제와 효율성 저하로 인해 금곡포창은 폐지되었다.
1750
[영조 대, 남해안 지역 조창 신설]
조선 후기 영조 재위 기간에 진주 가산창, 밀양 삼랑창, 창원 마산창 등 3개 조창이 남해안 지역에 추가로 설립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이르러 경상남도 해안 지역의 세곡 운송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진주의 가산창, 밀양의 삼랑창, 창원의 마산창 등 세 개의 새로운 조창이 설립되었다. 이는 변화하는 물류 환경에 대한 대응이자 지역 세곡 관리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