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정치 사상, 외교 정책, 군사 침략론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7:30
19세기 말 일본에서 조선 정벌을 주장한 정치 사상.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내부 문제 해결 및 국력 신장을 목적으로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초기에는 조선과의 외교 갈등을 빌미로 무력 침공이 논의되었으나,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후 내치 우선론에 밀려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며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조선 멸망을 기원하는 형태로 재등장했다.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의 중요한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1868
[메이지 유신 전후 정한론의 태동]
일본 내 혼란 해결 및 국외로의 시선 돌리기 위해, 막말부터 메이지 초기 사이고 다카모리 등 정부 수뇌들이 조선 정벌 정책인 '정한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당시 정부 수뇌인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에 의해 무력을 이용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책이 주장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부터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 주장, 고쿠가쿠 등의 사상을 통해 존왕양이 운동의 정치적 주장으로도 이용되었다.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 내 문제 해결 및 성장의 방법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1870
[조선 국서 거부와 정한론의 부상]
메이지 정부의 국교 교섭 시도에 조선 흥선대원군 정부가 쇄국정책과 외교 문서 문제로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사신 접견을 거부하며, 정한론이 일본 내에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섬을 개입시켜 조선에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는 국교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집권 하의 조선 정부는 쇄국 및 척왜정책을 지향하며 외교문서가 고종을 격하하는 등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며 개수를 요구하고 사신 접견을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으며, 사다 하쿠보가 조선 방문 후 강경하고 구체적인 정한론 건백서를 제출했다.
1872
[일본 사신단의 군함 파견과 조선의 반발]
하나부사 요시모토 외무대신이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조선 측은 군함 파견을 문제 삼아 수개월간 교섭에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고, 수개월간 체류했으나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고,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했다.
1873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사절 파견 결정과 이와쿠라 사절단의 반대]
메이지 정부는 8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조선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9월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이 내치 우선을 주장하며 반대하여 10월에 파견이 중지되었다.
8월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결국 10월에 사절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정한론 중단에 따른 정치적 혼란]
정한론 파견이 중지되자 이를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인사들이 하야(메이지 6년 정변)했고, 이는 사쓰마 번 무사들의 사족 반란(1874년 사가의 난, 1877년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져 일본 내 정세가 격변했다.
정한론이 중지되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야(메이지 6년 정변)했다. 이때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쓰마 번 무사들이 사족 반란을 일으키며 1874년의 사가의 난부터 1877년의 세이난 전쟁까지의 반정부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신정부군의 우세에 의해 참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패전 도중에 자결했다.
1880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조선 개혁 지원론]
1880년대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자유주의자들이 조선의 개혁과 계몽을 일본이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1880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부국강병론과 신분 제도 타파 등을 역설했으며, 김옥균, 서재필 등의 청년들이 조선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1881년 조선 신사유람단이 파견되고 일본 신문에 조선 소식이 자주 소개되며 일본 대중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고전 작품들을 일본에 소개하며 개혁과 계몽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2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 개화를 위한 무력 사용 시사]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개한 조선을 깨우치고 진보를 돕기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점진적인 개화 지원에서 강경한 태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국은(…) 미개하므로 이를 유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인민 정말로 완고하고 고리타분하므로 이를 깨우치고(…) 끝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갑신정변이 터지자 잠수함에 일본 민병대라도 지원하자고 일본 조정에 건의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84
[갑신정변 실패가 촉발한 조선 멸망론]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 정부의 관련자 및 가족에 대한 혹형과 연좌제 시행에 크게 분노한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의 멸망을 기원하는 강경한 정한론으로 전환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정변 관련자와 그 일가족에 대한 연좌제, 혹형 등이 시행되자 후쿠자와 유키치 등은 크게 분노하여 조선의 멸망을 기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일부 개화파 인사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고 가족들이 연좌제로 처단당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에 대한 기대감을 경멸과 증오로 변모시켰다. 1885년 8월 13일 지지신보 사설을 통해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 어떤지를 논할 때는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다",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1885
[일본의 아시아 이탈 선언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가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하여 일본은 아시아의 악습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국과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일본의 대외 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갑신정변 관련자들의 처형과 도피 직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했다. 1885년 3월 16일에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했다.
[오사카 사건 (조선 정벌 미수) 발각]
김옥균의 처소를 드나들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서 조선 토벌을 위한 무장 집단 파견 음모를 꾸미다 발각된 사건. 이는 김옥균에게 누명을 씌우고 일본 사회에 정한론을 재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말 김옥균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 모여서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이들의 조선 정벌 주장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했다. 김옥균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청나라까지 이 소식이 전해져 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
1894
[김옥균 암살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 여론 악화]
김옥균 암살과 그의 시신에 대한 조선 정부의 부관참시 조처가 외국 언론에 보도되자, 일본 지식인층은 조선의 야만성과 비인도성을 맹렬히 비난하며 정한론에 다시 힘을 실었다.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이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외국 기자들에 의해 보도되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러한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와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했다.
[김옥균 추모 열기와 조선 정부 규탄]
김옥균 암살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김옥균 추도회와 기념회가 조직되었으며, 4월 21일 '김옥균 사건 연설회'와 23일 '대외경파간친회'를 통해 조선 정부의 야만성이 대대적으로 성토되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가졌다. 4월 21일 간다니시키정의 금휘관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했다. 4월 23일에는 일본 정계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 아사쿠사 혼간지에서 '대외경파간친회'를 개최하는 등 대단한 성황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