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아나키스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5:50
이회영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또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흑색공포단 등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일제에 맞섰다. 1932년 일제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사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67
[개방적 성격과 개화 사상 수용]
소년 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으로 집안 노비를 자유민으로 해방하고, 타인의 노비에게도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그의 개화 사상 수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단히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우당 이회영 출생]
조선 한성부 저동에서 이유승과 동래 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 명문가의 10대손으로, 후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우당 이회영은 1867년 한성부 저동에서 이유승과 동래 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6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이시영과 여동생 2명, 이복 동생으로는 이소영, 이호영이 있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바로 밑의 동생이었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로, 그의 가계는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 대대로 문무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조선 선조 때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이었다. 외가 역시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
1885
1885년에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1907년 1월 중순에 사망하였다. 첫 부인 달성 서씨는 판서를 지낸 서신보의 딸로, 할아버지 서유상(徐有象)은 참판, 증조부 서영수(徐英修)는 사어를 역임했으며, 외할아버지는 보국숭록대부와 이조판서를 지낸 연안이씨 이풍익(李豊翼)이었다.
1896
[의병 자금 마련을 위한 삼포농장 경영]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여 항일 의병 자금을 조달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1896년(고종 32년) 항일 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경기도 개성부 인근 풍덕 지방에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농장의 수익금으로 의병들의 자금을 후원하였다.
1905
[을사 보호 조약 반대 투쟁 시작]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형제들과 함께 조약 철회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나인영 등과 함께 조약 체결에 가담한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했으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조정의 고관이었던 이상설과 당시 대한제국 외무부 교섭국장인 친동생 이시영 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 철회, 무효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로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조약 체결에 가담한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
[노비 해방과 기독교 개종, 독립운동 기지 계획]
아버지 이유승 사망 후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유교 사상에서 기독교(감리교)로 개종했다. 이상설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 군사기지 설치 계획을 수립하고 용정촌에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했다.
그 뒤 이회영은 결혼식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고, 여성의 재가를 꺼리는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은 거짓으로 부고를 낸 뒤 다시 결혼시켰다. 그 뒤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이 사망하자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 해방시켰다. 양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그는 본래의 유교사상에서 기독교사상(감리교)으로 개종한다. 1906년 이상설,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이동녕(李東寧), 유완무(柳完懋) 등과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수립한 후 만주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1907
[신민회 결성 및 헤이그 특사 건의]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하여 교육, 계몽 활동을 했다. 또한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강압성을 폭로할 것을 건의했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1907년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회의 정치·경제·교육·문화 분야 등에 관여하였다. 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 늑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대한제국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는 1885년에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1907년 1월 중순에 사망하였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다.
1908
[만주에서 이상설과 독립운동 방책 협의]
헤이그 특사로 갔다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비밀리에 만주에 다녀와 독립운동 방책을 협의했다. 이상설은 국외 활동을, 자신은 국내 활동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 뒤 헤이그 특사로 갔다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1908년초 비밀리에 만주에 다녀왔다. 1908년 이상설과 운동방책을 협의하여 이상설은 국외에서 활동하고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 각 학교에 파견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한국 최초 신식 결혼 중 하나]
경성부 상동교회에서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신식 결혼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은숙은 후에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를 남겼다.
1908년 10월 18일 경성부의 상동교회에서 한산 이씨 이은숙(李恩淑)과 재혼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신식 결혼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후일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를 남기기도 했다.
1909
[신민회,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결의]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 이동녕 등 신민회 간부 총회의를 소집하여 만주 류허 현 삼원보의 추가가를 후보지로 결정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결의했다.
1909년 그는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 이동녕, 주진수(朱鎭洙), 안태국,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李昇薰),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도희(金道熙) 등과 함께 신민회 간부 총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1910
1910년 7월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남만주 시찰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고 되돌아왔다.
[일가 6형제와 함께 전 재산 처분 후 만주 망명]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6형제는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으며, 노비들까지 해방하여 자발적 동행을 허락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12월, 6형제는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였던 이회영이라 한다.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였으며, 대가족이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이상룡, 허위의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온 가족이 독립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때까지도 남아있던 가솔과 노비를 해방하였으나, 수행을 자청한 일꾼까지 합하여 40여명도 그들 일가족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
[재만한인 자치기관 경학사 조직]
만주 퉁화현 광화진 합니하 강가에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가 양성 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이후 간도 용정촌에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만주 퉁화현 광화진의 합니하 강가에 일시 정착하며,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주변 황무지를 개간하며,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활동 등을 하는 등 독립운동가 양성 기지 건설에 매진했고, 1911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2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설립]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이는 훗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 된다.
1912년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1917
[고종 망명 계획 시도 (첫 시도)]
아들 이규학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하는 기회를 엿보아 고종 망명을 시도했다. 민영달로부터 5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았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17년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신부례를 올리는 기회를 엿보아 고종 망명을 시도하였다. 비록 망국이기는 하나 궁중의 신부례는 매우 장엄하고 절차가 복잡하여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기회를 틈타 고종과 비밀리에 접촉하는데 성공했고 민영달은 이 거사에 5만원의 자금을 내 놓았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1918
[신흥무관학교 운영 난항으로 국내 잠입]
고국에서 가지고 온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 신흥무관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게 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에게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고종 망명 계획 (두 번째)]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받아 오세창, 한용운 등과 만나 고종의 중국 망명을 다시 계획했으나,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실패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 소식을 접하고 자극, 이때 국내·외에서의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이상재(李商在) 등과 만나 밀의한 뒤 고종의 망명을 계획한다. 그는 시종원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승락을 얻었으며 그 뒤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1919
[경학사 해산 및 신흥무관학교 개명]
3.1운동 이후 경학사를 해산하고,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여 독립군 병사 양성을 도모했다. 그러나 흉작으로 학교를 해산하고 국내로 돌아와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만주 퉁화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겼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이름을 변경해 독립군 병사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해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탈퇴 및 베이징으로 이동]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견 차이로 임시정부를 떠나 베이징으로 건너가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결국 의견의 차이로 상하이(上海)를 떠나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그해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내 지휘를 놓고 서로 다투거나 분쟁이 일어날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1921
[임시정부 내분 조정 및 아나키즘 사상 접촉]
상하이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때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의 저술을 읽고 아나키즘 사상에 감명받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해 4월에 유자명은 이회영을 만났는데, 이미 이회영은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저술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였다. 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그는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3
[한중합작 이상농촌 건설 추진 실패]
중국 후난성 한수이 현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 건설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192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했다.
1924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베이징에서 정화암 등 동지들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립하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했다.
1924년 4월 20일에 베이징에서 화암 정화암(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25
1925년에는 비밀 결사 조직인 다물단을,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합작으로 독립 운동 단체인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행동대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활동,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1927
[김종진과의 사상적 교류]
북만으로 떠나기 전 톈진에서 김종진을 찾아가 사상적인 담화를 나누었다. 이 담화를 통해 김종진은 김좌진 장군을 설득하여 신민부와 아나키스트와의 연대를 받아들였다.
1927년 9월 하순, 시야 김종진(김종진)은 북만으로 떠나기 전 톈진에서 이회영을 찾아가 사상적인 담화를 하였는데 그 대담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 대담에서 크게 감화를 받은 김종진은 그의 사촌인 백야 김좌진 장군을 설득하여 신민부와 아나키스트와의 연대를 받아들였다. 김좌진 장군은 철저한 대종교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이므로 아나키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8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결성]
상하이에서 이을규, 정화암 등 동지들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간하며 아나키즘을 적극 전파했다.
1928년 5월 상하이에서 이을규, 이정규(정규) 형제 및 정화암, 류기석 등의 동지와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1928년 6월 1일에 정의공보를 복간하는 의미로 탈환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고 더 적극적으로 아나키즘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 독립운동 지원 호소]
아시아 각국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1928년 7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30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
유자명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만주사변 이후 이회영 등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 4월 20일에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만주사변 이후에 이회영, 정화암(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1931
[남화한인청년연맹과의 연대 활동]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만주사변 발발 후에는 항일구국연맹 의장에 피선되었다.
이회영은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공격,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항일구국연맹 결성 및 흑색공포단 조직]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일본 측 기관 기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행동 조직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지휘했다.
1931년 9월 이회영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金性壽), 그리고 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 일본인 출신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 일본명 佐野), 오수민(吳秀民, 일본명 伊藤) 7인과 함께 상하이의 어느 건물 지하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일본측 기관 기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였다.
1932
[흑색공포단 톈진 일본 시설 파괴]
흑색공포단 단원들을 톈진에 파견하여 톈진 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하고, 톈진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설을 파괴했다.
1932년 1월 흑색공포단원을 톈진에 파견, 이들은 톈진 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톈진 앞바다에서 폭파시키고, 톈진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영사관 건물과 시설 일부를 파괴시킨 뒤, 한명도 잡히지 않고 도주했다.
[중국 동북부 거점 확보 및 일본군 사령관 암살 계획]
중국 국민당 요인들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 대장 암살 계획을 수립하고 북행을 결정했다.
9월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증(李石曾), 오유휘(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대장 암살 계획을 정하고 북행을 결정하였다.
[일본 밀정의 밀고로 다롄 항구에서 체포]
만주 연락 근거지 확보와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을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이동하던 중, 조선인 밀정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로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1월 만주의 연락 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이동을 결심하였다. 당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어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주위의 동지들이 말렸으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조선인들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로 이동 중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었고,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다롄 항구에서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일본 측은 자살로 발표했으나 고문 치사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11월 17일 이때 이미 노인이었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다롄 수상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 사망 당시 일본 영사관 당국은 체포된 노인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둘러 그의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수상한 정황 때문에 고문 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의 유해에는 '안면에 선혈이 낭자하고 타파오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 중국 항일 운동가인 김소묵의 보고서에 의하면 1932년 11월 17일에 일제가 뤄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이회영을 교수형에 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2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5
[부인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 출간]
그의 부인 한산 이씨 이은숙이 탈고한 《서간도 시종기》가 출간되어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이자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1966년 그의 부인인 한산 이씨 이은숙이 탈고하고 1975년 출간된 《서간도 시종기(西間島始終記)》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면을 주체적 입장에서 기록하여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사서(史書)인 동시에, 전통적 양반집 부인에 교양과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고, 일조각에서 수여하는 '월봉저작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