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우 (영화 감독)
영화 감독, 영화 촬영기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5:28
이필우는 한국 영화사의 선구자적인 인물입니다.
* 한국 최초의 영화 촬영기사이자 발성 영화 기술을 도입한 개척자로, 한국 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영화 기술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 뛰어난 기술력으로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변화하는 영화계 흐름 속에서 부침을 겪기도 했습니다.
1897
[이필우 출생]
서울 중구 을지로 지역에서 시계포를 하던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영화 기술인이 된다.
1897년 11월 27일, 현재의 서울 중구 을지로 지역에서 시계포를 하던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
[영화 기술 원리 터득]
아버지의 시계포를 물려받아 사진 재료와 축음기를 판매하면서 사진, 환등기, 활동사진 기계를 접하고 그 원리를 독학으로 터득하며 영화 기술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시계포를 물려받았다가 사진 재료와 축음기를 들여놓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사진과 환등기, 활동사진 기계를 접하면서 그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1913
[우미관 입사 및 일본 유학]
우미관 영사기사의 조수로 들어가 영화 관련 실무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데이코쿠키네마에 입사하며 촬영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다.
1913년에 우미관 영사기사의 조수로 들어가 일을 배우다가 일본에 건너갔다. 여러 지역에서 실무를 익히며 촬영 기술을 배운 뒤 데이코쿠키네마에 입사하여 촬영기사로 일했다.
1923
[귀국 후 영화 촬영 활동]
간토 대지진 발생 후 귀국하여 《전성여자정구대회》, 《장화홍련전》, 《쌍옥루》 등 여러 영화의 촬영을 담당하며 한국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간토 대지진으로 귀국한 뒤 《전성여자정구대회》, 《장화홍련전》, 《쌍옥루》 등을 촬영했다.
1935
[조선 최초 발성 영화 《춘향전》 제작]
다시 일본에서 녹음 기술을 배워와 조선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의 촬영과 녹음을 담당했다. 이 작품은 동생 이명우 감독과 협력하여 제작되었으며, 한국 영화 기술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이후 발성 영화 촬영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에 가서 녹음기술을 배워와 조선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1935)을 내놓았다. 동생인 이명우가 감독을 맡고 촬영과 녹음은 이필우가 담당했다.
1938
[영화계 세대 교체와 만주 방랑]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파 감독들이 등장하며 영화계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고, 이필우는 신진 세력과의 갈등 끝에 이러한 흐름에서 뒤처져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 지역을 떠돌며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영화 감독들이 세대 교체 흐름을 주도하면서 이필우는 이러한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신진 세력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 지역을 떠돌며 소일하였다.
1945
[미 공보원 영화 기술 관리]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돌아와 미군 502대 부대와 미 공보원에서 영화 기술 관리 역할을 맡으며 한국 영화계 재건에 기여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 지역으로 돌아와 미군 502대 부대와 그 후신인 미 공보원에서 영화기술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0
[한국 전쟁기 활동과 복귀]
한국 전쟁 초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국립영화촬영소 남조선지부 책임자를 맡아 인공 체제에 협조했으나, 인민군 후퇴 후 다시 미 공보원으로 복귀했다.
한국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인공 체제에 협조하여 국립영화촬영소 남조선지부 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나, 인민군이 후퇴한 뒤 미 공보원에 복귀했다.
1958
[《생명》 녹음 참여]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의 녹음에 참여했으나,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하며 그의 마지막 공식적인 영화 관련 이력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가 흥행에 실패한 《생명》(1958) 녹음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이력이다.
1978
[이필우 별세]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이필우가 1978년 10월 20일 별세하며, 그의 오랜 영화 인생이 막을 내렸다.
1978년 10월 20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