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1917년)
조직폭력배, 정치인, 경찰, 씨름 선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4:19
이정재는 1917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씨름 선수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경찰이었습니다. 해방 후 동대문 상인연합회 회장이 되어 '동 카포네'라 불리며 자유당과 결탁, 정치 깡패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사사오입 개헌, 야당 집회 방해, 장충단 공원 테러 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주도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1917
[출생 및 학창 시절]
경기도 이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창 시절 씨름을 잘하여 전국 씨름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습니다.
경기도 이천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정재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습니다. 신흥대학 국문과를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출생연도와 대학 개교연도(1949년)를 비교하면 신뢰성이 낮습니다. 씨름 실력이 뛰어나 고향 이천에서 열린 전국 씨름 대회에서 소를 10마리나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1941
[경찰 특채 및 해방 후 활동]
태평양 전쟁 중 일제의 강제징용장을 받고 경성으로 상경, 근로보국대인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 서기로 일했습니다.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에 특채되었고, 해방 후 경찰에 복직하여 좌익 세력과 대립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 강제징용장을 받고 경성으로 상경한 이정재는 근로보국대인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 서기를 맡았습니다. 이후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 특채되어 경찰이 되었고 김두한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경찰에 복직하여 고향 후배 곽영주가 경찰에 합격하도록 도왔습니다. 좌우대립 시기 좌익들과 싸우며 체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제주 4.3 사건에도 참여했습니다. 그의 싸움 실력에 흠모한 조열승, 임화수, 김기홍 등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1949
[반민특위 활동과 경찰 사직]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노덕술에게 고문당한 뒤 경찰을 사직하고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체되었고, 이에 이정재에게 체포당했던 노덕술이 풀려나 그를 고문했습니다. 결국 이정재는 경찰을 사직하고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1950
[한국 전쟁과 주먹 세계 투신]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과거 경찰 경력 때문에 북한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김기홍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임화수의 부탁으로 새로운 조직을 세우고 두목이 되어 주먹 세계에 투신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습니다. 과거 경찰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생사의 위기에 처했으나, 김기홍이 공산군으로 위장하여 도움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처남 매제 지간이 됩니다. 부산에 도착한 이정재는 임화수의 부탁으로 새로운 조직을 세우고 두목이 되면서 주먹세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했습니다.
1953
[동대문 상인연합회 회장 취임]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며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동 카포네' 또는 '말렌코프'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이기붕, 곽영주 등 자유당 인사들과 연을 맺어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주먹세계에 투신하여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 관리하기 위해 이기붕과 연을 맺어 자유당의 감찰부 차장 등 당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던 곽영주와도 개인적인 친분 및 동향 선배로서 손이 닿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대문의 알 카포네 일명 '동 카포네', 그리고 소련의 수상 말렌코프를 닮았다고 하여 '말렌코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시라소니 린치 사건 및 위기]
당대 최고 주먹 시라소니를 린치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이로 인해 명동패와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후 김동진의 배신으로 폭행당하고, 야당 요인 테러 지령을 폭로한 뒤 단성사 저격 사건을 겪는 등 위기를 맞았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호형호제하던 당대 최고의 주먹 황제 시라소니를 동대문패의 김기홍, 임화수, 조열승, 이석재, 김사범 등이 비열한 계략으로 유인하여 흉기로 린치를 가하는 이른바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정재는 자유당 일로 바빠 김기홍을 보내 명동패와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명동패가 이 소식을 듣고 동대문패와 싸움을 벌였고, 김동진은 동대문패에 실망하여 이정재 제거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동진의 계략으로 이정재는 정양원과 KLO대원들에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야당 요인들에 대한 테러 및 암살 지령 계획을 언론에 폭로하고 잠적했다가 단성사에서 이석재의 총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회복 후 조폭계를 은퇴했습니다.
1954
[정치 깡패 활동 및 테러 주도]
자유당 이기붕과 깊이 연루되어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 방청객 난동을 주도했으며,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 대통령 선거 야당 집회 방해 및 테러, 1957년 장충단 공원 정치 테러 사건 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자행하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자유당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이기붕이 제안했던 사사오입 개헌 개입을 승낙하며 김기홍과 결별했습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 방청객 난동,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 집회 방해 및 테러, 1957년 장충단 공원 정치 테러 사건을 저지르는 등 정치테러의 주요 인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는 정치에도 큰 야망을 보여 고향인 이천에서 1958년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했으나, 이기붕에게 선거구를 양보하고 동대문 상인연합회 회장 자리를 임화수에게 넘긴 뒤 은퇴하여 북악산 쪽에 주택을 짓고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0
[4.19 혁명 이후 체포와 석방]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정치테러 원흉으로 지목되어 검찰에 자진출두하여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후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에서 다시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습니다.
4.19 혁명 후인 1960년 4월 28일 검찰에 자진출두하여 정치테러의 원흉으로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후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1961년 2월 10일 석방되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이후 재체포]
5.16 군사정변으로 다시 정변 세력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량이 가벼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임화수가 '화랑동지회'라는 범죄단체 조직에 관한 내용을 폭로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다시 정변 세력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시라소니는 린치 사건을 부인하며, 이화룡과 김두한도 그를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형량이 가벼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임화수가 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화랑동지회'라는 범죄단체 조직에 관한 내용을 폭로하면서 다른 폭력조직의 증언까지 이어져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혁명재판 사형 선고 및 교수형 집행]
임화수의 치명적인 거짓 증언으로 인해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같은 날 임화수, 신정식 등과 함께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사형 직전 유언을 남기며 가족들의 화목을 당부했습니다.
혁명재판이 열리자 김동진은 암살지령사건과 단성사 앞 저격사건으로 증인으로 나와 증언했고, 김기홍도 증인으로 나와 시라소니 린치, 정치테러, 부정선거, 고대생습격사건 등 이정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임화수는 살기 위해 시라소니 린치, 배우 상습폭행, 김희갑 구타사건, 모든 정치테러 지시, 고대생습격, 부정선거 등 모든 것을 이정재가 지시했다고 치명적인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임화수, 유지광, 곽영주, 최인규, 신정식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여러 폭력조직원들과 함께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 임화수의 거짓 증언으로 인해 교수대로 끌려갔고, 사형당하기 전 '내가 키우다시피 한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 없는 증언으로 나를 무고했다. 섭섭한 일이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니, 모두들 자식들이 있는 몸들이니 이 일로 인해 아들대에 가서 절대로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다'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나이는 44세였습니다. 형 집행 전 가족들과의 면회에서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매부 김기홍이 수습하여 가족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고, 고향인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 산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