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1564년)

조선 문신, 학자, 외교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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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학자, 외교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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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 시인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국난 극복에 기여했으며,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 해결에 탁월한 문장력으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선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좌의정에 오르고도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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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이정구 출생]

이정구가 태어났다. 그의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엎드려 있다가 그가 태어난 뒤에 돌아가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이정구(李廷龜)는 1564년에 태어났다. 그의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모두 신기해하며 군자가 태어나 문명을 밝힐 상징이라고 여겼다. 본관은 연안 이씨이다.

1585

[진사 급제]

15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5년(선조 18) 진사에 급제하였다.

1590

[문과 급제]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1592

[임진왜란 중 선조 몽진 동행]

임진왜란 발발 직전, 광해군의 세자책봉 숙직 중 급서한 장인 권극지의 장례를 급히 치르고, 처자와 부친, 장모, 처제를 데리고 선조를 따라 몽진길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나기 전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위해 숙직을 하던 장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급서하여 몽진길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이정구는 급히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쓴 뒤 처자와 자신의 부친, 장모, 처제를 데리고 왕을 쫓아 따라갔다.

1593

[대명 외교문서 작성자로 초계]

명나라에 보내는 중요한 글을 작성할 제술 문관 중 한 명으로 이정구가 초계되었다. 이항복은 그를 '작문을 잘하는 사람으로 이정구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평가했다.

선조 26년 11월 2일(1593년) 명으로 보내는 글이 중요하여, 제술 문관 중 하나로 이정귀가 초계되었다. 이항복은 "내 생각으로는 현재 작문을 잘하는 사람으로 이정구보다 나은 자가 없다. 그의 글을 보건대 마음 속에 있는 뜻을 남김없이 표현하는데 곡진하고 간절하며 함축성이 있고 우아 장중하니, 이는 참으로 글을 잘 짓는 선비이다."라고 평했다.

1598

[《조선 기행록》 저술]

명나라 사신 접대 및 방문 중,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을 저술하였다.

이정구가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그는 그 후에도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며 말벗이 되었다.

[정응태의 무고 사건 해결]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이정구는 이 오해를 풀기 위한 사신단의 부사로 파견되어,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그를 파직시켰다.

1598년(선조 31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큰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고사하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이정구의 문장력이 이때 빛을 발하여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선조실록 권102, 31년 7월 4일 ; 권104, 31년 9월 21일 ; 권105, 31년 10월 21일)

1599

[진주사 파견, 대명 불신 해소]

이항복과 함께 진주사로 파견되어, 중국 내부에 조성된 조선에 대한 불신 여론을 다시 바꾸고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정응태 사건 이후 이정귀는 어전통사가 되어 대명외교에 있어 적임자로 부각되었으며, 이항복과 같이 진주사로 파견되어, 중국 내부에서 조성된 조선에 대한 불신여론을 다시 바꾸고 오는데 성공한다. (선조실록 권112, 32년 (윤)4월 13일)

[광해군 세자책봉 주청사 참여]

광해군 세자책봉 주청사로 참여하며 대명 외교에서 활약하였다.

선조 32년 (윤)9월 26일에 광해군 세자책봉 주청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608

[정운원종공신 1등 책록]

광해군 즉위 직후 발생한 유영경의 옥사 해결에 기여하여 정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

[김제남 옥사 연루]

광해군 5년, 김제남 옥사에 연루되어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광해군 즉위 후에도 외교정책에 참여했으나, 광해 5년 김제남 옥사에 연루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권66, 5년 5월 17일)

1617

[폐비 문제 관련 입장 표명]

광해군 9년,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 논의에서 예매한 입장을 보여 대북 세력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해 9년 11월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논의할 때 예매한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인해 대북세력들의 주요 목적이 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권121, 9년 11월 25일)

1618

[폐모론 정청 불참]

폐모론을 주창하는 정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아 대북 세력의 지속적인 탄핵 상소를 받았다.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창할 때 끝까지 정청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대북세력들의 주요 목적이 되었다. 이정귀를 비롯한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을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권123, 10년 1월 4일)

[대명 외교 갈등 재고조]

명나라 도사가 조선이 왜적과 소식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을 재점화하여, 이정귀는 다시 복귀되어 사신으로 파견될 상황에 놓였다.

광해 10년 (윤)4월 15일 중국의 도사(都司)가 왜 사은사는 오지 않느냐며, 정응태 사건처럼 왜적과 소식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다시 의심하였다. 이때 이정귀는 폐모에 대한 처벌을 도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복귀되어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권127, 10년 (윤)4월 15일)

1619

[대명 외교 전략 제시 및 성공]

진주사로 복귀하여 명나라에 만연한 조선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고, 국경에 군사를 배치해 노추(후금)의 공격을 막는 전략과 군량 확보 방안을 제시하였다.

진주사로 복귀한 이정귀가 비밀로 올린 차자에는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고 분하지만 현재 중국에 만연하게 퍼진 조선에 대한 의심이 서광계에 의해 조성되어 많은 대신들이 그 뜻을 같이하고 있어, 직접 부딪히는 것보다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군사작전에서 직접 참여보다 국경에 군사를 배치해 명과 함께 양면에서 대치하는 것이 노추로 하여금 섣부른 공격을 불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군량에 대한 계책도 세세하게 준비하여 호남, 호서의 군량미를 팔고 하사받은 은 1만 냥을 의주로 보내 중강에서 쌀을 사면 3~4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으며 운송 걱정도 없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이러한 대처가 있었기에 중국을 방문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황제의 졸기와 칙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로써 서광계를 비롯한 그 일파의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권145, 11년 10월 13일)

1624

[이괄의 난 및 정묘호란 시 국난 극복 기여]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셨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로 모시며 화의에 반대하는 등 국난 극복에 적극 기여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시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시었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1630

[조선 4대 문장가 선정]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신흠, 장유 (조선), 이식 (1584년)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음에도 삶은 검소하고 질박했다고 전해진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우의정 및 좌의정 역임]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최고위직인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당대 명망 높은 문신으로 활약했다.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 말기까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1635

[조선 최초 3대 대제학 배출]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로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는 문형의 길을 열어 명문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정구는 큰아들 이명한, 큰손자 이일상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3대 대제학이라는 문형의 길을 텃다. 그의 후손들은 조선 말기까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정구 사망]

조선의 문신이자 4대 문장가 중 한 명인 이정구가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635년(인조 13)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그의 묘 및 삼세신도비가 있으며, 이는 1984년 9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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