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정 (1622년)
조선 문신, 외교관, 작가, 서예가, 시인, 남인 주요 인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3:58
이원정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 시인, 서예가이다. 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며 대사간, 이조판서 등 요직을 거쳤다. 호조판서 시절 윤휴와 조세 제도 개선에 힘썼고, 청나라 외교관으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경신환국 때 서인의 공격으로 장살당했으나, 기사환국 때 복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후 정국 변동에 따라 복권과 추탈을 반복하다 정조 때 최종 복권되었다.
1622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출생하다]
이원정은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신동이라 불렸으며, 한강 정구와 미수 허목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시를 짓는 능력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져 대신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이원정은 162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이암(耳巖)에 살았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아버지는 부응교 증 의정부 좌찬성 이도장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시양의 딸이다. 숙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이담명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선비들이 그를 신동이라 칭송했으며,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허목, 윤휴 등과 교류했다. 성인이 되자 자는 사징, 호는 귀암이라 했고, 별호로는 고향 성주의 별칭인 경산이라 했다. 글을 읽을 때 한눈에 여덟 줄씩 읽고 배우는 대로 외웠다고 전해지며, 청나라 대신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1648
[사마시 입격과 증광문과 장원 급제]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1652년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상의원 직장에 임명되었다. 과거 급제 후 문묘 인사가 막히자 동방인들과 함께 항의 연명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문묘에 인사를 하지 못하자 동방인들과 함께 항의 연명 상소를 올렸다. 갑과 장원 급제로 권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에 임명되었다. 이 연명 상소로 인해 좌의정 김육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으나, 훗날 당색을 초월하여 대동법을 지지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1657
[사헌부지평 사직 상소 사건]
사헌부지평으로 재직 중 왕족 낭선군 이우의 종 관련 사건으로 동료들이 해임당하자, 이원정은 왕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동료들의 징벌이 과하다고 주장했으나 효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3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된 이원정은 왕족 낭선군 이우의 종과 사헌부 관리 민유중의 부하가 싸운 일로 장령 오두인과 지평 민유중이 해임당하자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는 동료들이 죄에 따라 징벌을 가한 것이 직분일 뿐이며, 체직될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효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3월 25일 집의 권대운과 함께 다시 항의성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1660
[청나라 사은사 서장관 파견 및 동래 부사 재임]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사헌부 장령, 장성 부사 등을 거쳐 1661년 동래 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쓰시마섬의 화재 구호 요청을 국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절한 일은 기록적인 사실로 남았다.
1660년(현종 1) 1월, 사은사(謝恩使) 홍득기가 청나라에 파견될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같은 해 5월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장성 부사를 거쳐 1661년(현종 2) 3월 동래 부사가 되었다. 동래 부사 재임 중 10월 왜차(倭差)를 영접하고, 12월 쓰시마섬에 화재가 발생하여 구호를 요청했을 때는 조선의 흉년을 이유로 거절하고 이를 조정에 장계로 보고했다. 동래에서의 선정은 진휼어사 남구만의 보고로 조정에 알려져 말 한 필을 상으로 하사받기도 했다.
1663
[의주 부윤 파면]
의주 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장성 부사 재직 시 관곡 남용과 동래 부사 재임 시 업무 처리 미숙을 이유로 민정중의 탄핵을 받아 임명 3일 만에 파면되었다. 그러나 구휼 어사였던 남구만이 그를 두둔하기도 했다.
1663년(현종 4) 11월 24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장성 부사로 있을 때 관곡(官穀)을 남용하고 동래(東萊)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민정중의 탄핵을 받고 3일 만에 파면되었다. 12월 초,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진휼 어사로 밀파되었던 남구만이 그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
1664
[숙경공주 집 건축에 도방군 징발 비판]
동부승지로 재직 중 숙경공주의 집 건축에 도방군을 사사로이 징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소했으나, 현종은 이를 오래된 관례라고 하며 징발을 강행했다. 이원정은 이로 인해 공격을 받았으며, 과거 지방관 시절의 미곡 처리 실수가 다시 문제되어 의금부에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으나, 영의정 등의 건의로 면제되었다.
1664년(현종 5) 6월 동부승지가 된 이원정은 도방군을 숙경공주 집 건축과 같은 사사로운 일에 징발하는 것은 법례가 아니며 군인들의 원망이 클 것이라고 비판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새로운 규정이 아닌 오래된 관례라고 하며 징발을 강행했다. 이후 지평 민시중의 공격을 받았으며, 병으로 숙직을 하지 않은 이조 좌랑 이유상을 보고했다가 오히려 추고당하고 하옥되었다. 이전 지방관 시절의 미곡 처리 실수가 문제되어 의금부에서 장 80대와 도형 2년형을 결정했으나, 영의정 정태화 등의 건의로 장 80대는 면제되었다. 같은 해 8월 호조 참의를 거쳐 9월 전주 부윤으로 나갔다.
1666
[충청도 관찰사 탄핵 면직]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했으나, 장성 부사 재직 시 미곡 처리 잘못을 이유로 좌상 홍명하에게 탄핵받아 한 달 만에 면직되었다. 이후 대간을 두둔하거나 삼정승에게 내리는 돈유문을 대신 지으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666년(현종 7) 10월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으나, 장성을 맡았을 때의 일에 대해 대간이 논핵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논핵이 중지되었음에도 부임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좌상 홍명하로부터 이전 장성 부사 시절의 미곡 처리 잘못을 탄핵받아 한 달만인 11월 18일 면직되었다. 같은 해 11월 승지가 되었고, 1667년 1월 대간 해임 관련 인피 문자를 삭제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원만리 등을 두둔했으나 실패했다. 1월 말 우승지가 되고 2월 초 왕명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은 삼정승에게 내린 돈유문을 대신 지었다. 그러나 이 돈유문 내용 중 대관을 배척한 말이 문제되어 결국 승지직을 사직했다.
1667
[광주 부윤 파직]
광주 부윤으로 재직 중, 자기 아버지를 도적이라고 고발한 사람이 강상죄로 참수형당하자, 이원정 역시 인심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67년(현종 8년) 5월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 사람 김선립(金先立)이 자기 아버지 김막금(金莫金)을 도적이라고 고발했다가 강상죄로 참수형당하자, 10월 9일 부윤이던 이원정 또한 인심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70
[진하 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활약]
진하 겸사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로 청나라 외교관들의 찬탄을 받았다.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하여 외교 업무를 원만히 수행했고, 그가 지은 시는 '화인문초'에 실리기도 했다. 귀국 시 청나라 학사들로부터 열두 폭 화폭을 선물 받았다.
1670년(현종 11년) 6월, 청나라에 진하사와 사은사가 파견될 때 진하 겸사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중국어와 한자에 능통했던 그는 청나라 외교관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를 선보여 찬탄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외교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가 지은 시들은 청나라의 유명한 시와 함께 '화인문초'라는 책에 실려 전해진다. 귀국할 때 청나라 학사들로부터 중국의 열두 달 풍속을 그린 열두 폭 화폭을 선물로 받았고, 이는 훗날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20일 귀국 후 11월 형조참판이 되었다.
[아들 과거 시험 합격 개입 논란]
과거 시험 고시관으로 재직 중 아들 이담명의 답안지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합격시키려 개입하여 논란이 되었다. 대사간 남이성 등 서인계 언관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왕의 하교로 무마되었다.
1670년(현종 11년) 11월, 과거 시험의 고시관 한 사람으로 시험을 주관했다. 이때 전시 합격자 이담명(李聃命)의 답안지 대책문(對策文)에 규격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으나, 시관인 이원정이 자신의 과거 경험을 들어 증명하자 이담명은 합격했다. 이에 대사간 남이성, 우의정 홍중보, 이단하, 김석주 등 서인계 언관들이 이를 문제 삼아 맹렬히 탄핵했다. 이익상은 이원정을 직접 탄핵하기도 했으나, 1671년 2월 왕의 하교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서인계 언관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의 개입 문제를 공격했고, 1671년 7월 이원정은 양주 목사로 나갔다.
1675
[경연에서 송시열 처단 주장 및 예송 논쟁 주도]
경연 특진관으로 재직 중 2차 예송 논쟁 당시 윤휴, 허목 등의 남인 논리를 지지하며 송시열을 처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송시열은 유배형을 당하게 되었고, 이원정은 남인 유생들을 독려하여 송시열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남인 집권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675년(숙종 1년) 1월, 경연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서 《서경》의 말을 인용하여 송시열을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김석주가 지나치다고 문제 삼기도 했으나, 결국 논란이 격화되면서 송시열은 유배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원정은 직접 출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남인 유생들을 독려하여 2차 예송 논쟁에서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왕에게 상소하도록 사주했으며, 대사간 남천한의 상소 초안을 잡아주거나 대신 작성하여 송시열을 공격하는 등 남인 집권기의 핵심 인물로서 활약했다. 같은 달 지의금을 거쳐 비변사 당상이 되었고, 2월에는 모친상으로 형조판서 물망에서 취소되었다.
1677
[대사간 임명 및 비변사 개선, 송시열 고묘 논쟁 주도]
대사간에 임명된 후, 비변사 상황 개선과 군사훈련 변통에 대한 10조목을 숙종에게 상정했다. 이후 송시열의 고묘 여론이 나오자 적극 찬성했으며, 효종을 서자로 만들었다며 송시열의 고묘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숙종은 그의 주장을 물리쳤다.
1677년(숙종 3) 4월 대사간이 된 이원정은 5월 비변사의 상황을 개선하고 군사훈련계책 10조목을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적당히 답변했다. 같은 해 5월 말 숙종이 죄수들을 석방시키려 하자 반대하였고, 송시열의 고묘 여론이 나오자 적극 찬성했다. 서인의 반발이 강하자 윤원형의 고사를 들어 고묘하고도 처형하지 않는다고 옹호했다. 6월 5일 대사헌, 6월 8일 승지가 되었으나, 고묘 옹호론 문제로 정지화 등의 지적을 받자 사직했다. 7월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어 7월 말에는 효종을 서자로 만들었다며 송시열의 고묘를 강하게 주장했으나 숙종은 그의 주장을 물리쳤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9월 대사성, 10월 형조판서, 12월 겸 대사성이 되었다.
1678
[노비 종부법 개선 건의]
평민이 굶주림으로 노비와 결혼하여 양반 노비가 되는 현실을 보고, 노비의 자식이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양인이 되게 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도체찰사부 복설을 주장하는 등 정책 활동을 이어갔다.
1678년(숙종 4) 고시관으로 증광문과를 주관했다. 이후 비변사의 유사당상으로 회의에 참석했으며, 평민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노비와 결혼하여 양반의 노비가 되는 일이 발생하자 같은 해 4월 노비의 자식이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양인 여성의 소생은 도로 부역(父役)을 따르게 했다. 이후 도체찰사부 복설을 다시 주장하여 숙종이 동조했으며, 강화부유수가 조정 내직을 겸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주장했다. 10월 말 부사직이 되어 병조 판서 김석주와 함께 강화도를 답사하고 지도를 그려 숙종에게 보고했다.
[한성부 판윤 및 호조판서 역임, 도체부 설치 역설]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9월 대사헌을 거쳐 12월 25일 호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 재임 시 윤휴 등과 함께 도체부 설치와 조세 제도 개선, 인재 양성을 강력히 역설했으나, 서인과 남인 당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78년(숙종 4) 7월 4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9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2월 25일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으며, 호조판서로 있을 때는 윤휴(尹鑴) 등과 함께 도체부(都體府)의 설치와 조세제도의 개선, 인재 양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반대 외에 같은 남인 당수였던 허목 등의 강한 반대로 체부 설치는 무산되었다.
1679
[이조판서 역임과 파직, 복직]
이조판서 홍우원이 사임하자 이조판서직을 대리하다가 바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1월에는 홍문관 제학이 되었으나, 비변사 인재 천거 과정에서 인사에 반대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가 12월 이조판서로 복직했다.
1679년(숙종 5) 2월 역마 사사로이 탑승 문제로 공초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4월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했다가 5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6월에는 무신들의 사사로운 위계서열과 국사 논평을 규탄했으며, 이조판서 홍우원이 사임하자 이조판서직을 대리하다가 바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1월 윤의제와 과거 시험을 주관했고, 11월 7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이후 비변사 당상으로 회의에 참석하며 인재를 추천했으나, 11월 말 비변사 인재 천거 과정에서 유상운의 인사를 반대하다 숙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영의정 허적이 구명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의 노여움은 오래 갔다. 12월 이조판서로 다시 복직했다.
1680
[숭정대부 승진 및 경신환국으로 삭탈관작, 유배]
약방제조를 거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고, 3월 숭정대부로 승진하여 겸 판의금에 올랐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3월 경신환국으로 체찰부 복설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당하고 문외출송되었다. 이후 4월 초산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1월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거쳐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3월 숭정대부로 승진하여 겸 판의금(判義禁)이 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3월 이조판서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3월 29일 왕의 친국을 받은 뒤 체찰부(體察府)를 복설해 군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당하고 문외출송되었다. 그러나 서인 언관들의 맹공격을 당한 뒤 같은 해 4월 '처음에는 체부를 반대하다가 나중에 체부 설치를 적극 찬성한 점이 해괴하다' 하여 초산(楚山)에 유배되었다.
[국문 중 장살당하며 최후를 맞이하다]
유배지로 가던 중, 허적, 윤휴 등이 사사당한 뒤 소환되어 오정일의 형제 숙질과 친하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았다. 결국 장형을 받던 중 장살당하여 생을 마감했다. 아들 이담명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이후 송시열, 김수항 공격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1680년(숙종 6) 윤 8월 21일, 유배지로 가던 도중 허적, 윤휴가 사사당한 뒤 소환되어 오정일(吳挺一)의 형제 숙질과 친하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였다. 결국 장형을 받던 중 장살(杖殺) 당하였다. 이때 그를 따라 초산으로 향하던 아들 이담명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은거하였으나, 뒤에 거듭된 권고로 조정에 나와 송시열, 김수항 공격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귀암집》 6권, 《경산지》 2권, 《완부결송록》 1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익이다.
1689
[기사환국으로 복관 및 영의정 추증]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되어 복관되었다. 아들 이담명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11월 우의정 김덕원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이 치제했다.
이원정의 죽음 이후 그의 작품 대부분은 서인들에 의해 불에 탔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어 2월 복관되었다. 2월 28일 아들 이담명이 아버지 이원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11월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숙종이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정국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추탈(追奪)되었다.
1694
[갑술옥사 후 추탈과 복권 반복]
갑술옥사로 추탈되었다가 1697년에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후 1712년에 삭직되었으나, 손자 이세원의 격쟁으로 관직이 다시 회복되는 등 정국의 변화에 따라 복권과 추탈을 반복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다. 1712년(숙종 38) 삭직되자 그의 손자 이세원(李世元)이 대궐에 징을 들고 담을 넘어 잠입해 격쟁(擊錚)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여 관직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후 사헌부에서 다시 관작 추탈을 건의했으나 숙종이 듣지 않았고, 1713년 양사가 합계하여 삭탈을 청했지만 왕은 계속 물리쳤다.
1722
1722년 노론의 집권 후 다시 추탈당했다.
1795
[정조 때 최종 복권 및 시호 추서]
정조 집권 후 최종적으로 복권되었으며, 1871년(고종 8년) 문익(文翼)의 시호가 추서되고 불천위로 지정되었다. 사후 200년 만에 그의 저서와 작품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795년(정조 19년) 정조 집권 후 다시 복권되었다. 경상북도 영천군 대창면 신광리(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안장되었다.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신도비가 설립되었으며 정조 때 번암 채제공이 비문을 지었다. 1871년(고종 8년) 최종 복권되어 문익(文翼)의 시호가 추서되었고 이후 불천위로 지정되었다. 사후 200년 만에 최종 복권되어 그의 저서와 작품들이 모두 출간되거나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