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교육자, 시인, 화가, 북인 당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52:55
조선 중기 문신, 정치가, 성리학자, 시인, 화가.동인-북인의 핵심 인물로 격동적 당쟁 주도.정여립 사건, 세자 건저 문제 등 주요 사건에 깊이 관여.명종-광해군 3대에 걸쳐 영의정 등 최고위직 역임.임진왜란 중 실각, 유배되기도 했으나 광해군 즉위 지지하며 복귀.당대 최고의 문장가, 명필, 현실 풍자적 시를 남긴 예술가.
1539
[한성부에서 출생]
한성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꿈에 산해관에서 잉태하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산해관의 산해에서 따서 이산해라 지었습니다. 작은아버지 이지함은 그를 기특하게 여기며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아계 이산해는 1539년(중종 34년) 한성부에서 9월 2일(윤 7월 20일)에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현감,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이지번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조언수의 사위이다. 그의 아버지가 꿈에 산해관에서 잉태하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산해관(산하이관)의 산해(山海)에서 따서 이산해라 이름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처음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오'라 했다.
1545
[을사사화 피난 및 이지함에게 학문 수학]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하여 피신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했으며, 명종 임금에 의해 총명함이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명종 임금에 의해 회자화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장안의 명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1558
[진사시 합격]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었으나,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했습니다.
명종 13년(1558년)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한다.
1560
[명종 주관 제술 시험 1등]
성균관 유생으로 재학 중, 명종 임금이 친히 주관한 성균관 제술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며 바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자격을 얻어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21살 때는 명종에게 그 학문의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며, 1560년(명종 15) 4월의 명종이 친히 주관한 성균관의 제술에서 1등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될 자격이 주어졌다.
1561
[식년 문과 병과 급제]
23세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승문원 권지에 보임되었고, 글씨를 잘 쓴다는 평을 받아 홍문관 정자가 되었으며 경복궁 대액의 글씨를 쓰기도 했습니다.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에 보임되었다. 1562년 글씨를 잘 쓴다 하여 추천을 받아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그해 명종의 명을 받고 경복궁(景福宮) 대액(大額)의 글씨를 썼다.
1563
[이량 탄핵 상소]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교리 최옹, 고경명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당시 세도가였던 이량을 탄핵했습니다. 이 일로 이량의 측근 이감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역으로 이감이 탄핵받아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해 7월 26일 홍문관 저작(著作)을 지냈다. 그해 8월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 교리 최옹·고경명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이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0월 이량의 측근인 사헌부 대사헌 이감(李戡)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이감은 기대승, 윤근수, 윤두수, 이문형, 이산해, 허엽 등이 당파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가 역으로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축출되면서 그는 위기를 모면했다.
1575
[아버지 상 당하여 사직 및 동인 당 결성]
아버지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간 상복을 입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의 이기이원론에 분개하여 류성룡, 정온 등과 함께 동인 당을 형성했습니다.
1575년 아버지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남명 조식과 이퇴계의 문하생이며 서경덕계열이기도 한 그는 이이가 스승들 중 한사람인 이황의 학설인 이기이원론을 정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는데, 류성룡, 정온, 박승임,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東人) 당을 형성했다. 이후 그는 서인 저격수가 되어 서인계 인사들과 친지들의 비리와 의혹을 집중 부각, 공격하였다.
1578
[윤두수·윤근수 탄핵 및 파직]
사간원 대사간으로 재직 중, 진도군 이수의 뇌물 사건을 계기로 윤현, 윤두수, 윤근수 세 사람의 죄악을 파헤쳐 서인 거물인 윤두수와 윤근수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습니다. 이는 동인과 서인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1578년(선조 11년) 사간원 대사간으로 재직 중 진도군 이수의 뇌물 사건을 접한 뒤 그는 윤현·윤두수·윤근수 세 사람의 죄악을 파헤쳐 마구 공격하였다. 결국 서인(西人)의 거물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비리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88
[의정부 우의정으로 발탁]
의정부 우의정 유전의 사직으로 인해 의정부 우의정으로 특별 발탁되며 정승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신뢰를 바탕으로 좌의정, 영의정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1588년 11월 20일 의정부 우의정 유전이 북경에 있을 때 습증(濕症)을 얻어 걷지 못하므로 사직하면서, 그가 의정부 우의정으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를 두고 서인들은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11월 25일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전의 관직인 좌찬성을 칭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노수신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부득이 출사하였다.
1589
[정여립 사건 및 기축옥사 관련]
정여립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선조는 그에게 정여립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좌의정으로서 정여립 사건 심문에 참여했으나 소극적 태도를 보였고, 정철이 위관으로 임명되면서 동인 세력을 숙청하는 기축옥사가 발생했습니다. 이산해는 정철과 서인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됩니다.
1589년 정여립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올라온 날 밤 열린 중진회의에서 선조는 그에게 정여립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물었다. 고변 내용을 몰랐던 영의정 유전과 좌의정 이산해는 알지 못한다고 했고, 우의정 정언신은 그가 '독서인임을 알 뿐'이라고 말했다. 정여립의 옥사 심문 때 그는 정승의 한사람으로 형장에 참여하였다. 정철과 서인 세력은 정여립의 난을 동인 세력을 타도할 절호의 기회로 삼아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정언신, 정개청(鄭介淸), 백유양(白惟讓), 이발(李潑), 이길 등 많은 동인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그는 위관인 정철이 동인을 몰살시키려 했다고 판단했고, 그 배후로 성혼을 지목했다.
1590
[영의정 취임 및 북인 당수]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서훈되고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습니다. 같은 해,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의 처벌을 두고 동인 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질 때, 그는 정철의 사형을 주장하며 북인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590년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4월 신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그를 불러들였다. 1590년 8월 종계변무의 공으로 수충 공성 광국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 3등에 서훈되고, 토역의 공으로 추충 분의 협책 평난 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에 서훈되었다. 이산해는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다. 정철을 살려두면 다시 음모를 꾸며 동인(政治)|동인]]을 일망타진하려 들 것이니, 이번 기회에 정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이라 불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의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북인이라 불렀다. 후에 북인은 선조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이산해는 대북의 편에 섰다.
1591
[세자 건저 파동과 정철 실각 주도]
세자 건저 문제에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신성군을 세자로 지지하며, 광해군 옹립을 주청하려던 정철을 모함하여 파직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 세력을 숙청하고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으며, 동인 내 남북 분당을 주도했습니다.
선조의 병환이 잦은 데다가 그의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후사를 빨리 정해야 된다는 공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류성룡, 대사헌 이해수, 이성중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산해는 비밀리에 인빈 김씨의 친정 오빠인 김공량에게 사람을 보내 정철 일파가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모해하려 한다고 고하였고, 김공량은 다시 인빈 김씨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찾아가 정철이 자신의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면서 울면서 궐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진노한 선조는 그자리에서 정철을 파직하고,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의 관직을 강등하고 외지로 쫓아냈다. 1591년 아들 이경전(李慶全)을 시켜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실각에 성공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밖의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내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후 파천 주장 및 유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의 파천(몽진)을 주장하여 조정 대신들의 대부분이 반대했으나 이를 강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로 서인계 언관과 유생들의 맹공격을 받고 삭탈관직되었고, 평해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시와 서예,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조정의 파천을 놓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으나 과거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말하여 주변에서는 웅성대더니 그 책임을 이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이후 그는 임진왜란이 터진 뒤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로 서인계 언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맹공격을 받고 파직당한다. 선조가 피난하다가 개성에 이르러 잠깐 머무를 때였다.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상소하기를, 김공량이 궐내와 통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죄를 다스릴 것을 청했다. 또한 이산해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박하며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 이후 5월 3일 양사에서 그를 유배보내야 된다고 탄핵하였으나 선조(조선)|선조]]는 삭탈관직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양사는 5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 합계하여 그를 공격하였고 5월 17일 중도부처의 명이 떨어졌다. 사직하고 백의(白衣)로 왕을 수행하던 중 평양에서 다시 서인계 언관들의 집중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595년 다시 해곡(海曲)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시와 서예, 그림 등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다.
1595
[석방 및 정계 복귀]
선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관작을 되돌려받았습니다.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돈녕부사 및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며 다시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북인의 당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북 세력을 지지했습니다.
1595년(선조 28년) 1월 11일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석방되고 관작을 돌려받았다. 서인들은 그가 임진왜란 초 파천을 주장했음을 지적하며 석방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석방되었다. 1595년 1월 24일 돈령부 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상소를 읽고 다시 출사하게 하였다. 이후 출사하여 파천한 조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 9월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5년 10월 천도한 조정에서 열린 비변사 회의에서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인 걸퇴소(乞퇴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선조가 다시 부르자 장문의 사직 상소인 걸면본직병사대제학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사양하였다.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다시 서인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대를 견뎌내고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한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1596
[이몽학의 난 관련자 국문 참여]
이몽학의 반란이 진압되자, 류성룡, 윤두수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하는 추관으로 참여하여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596년(선조 29년) 6월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를 거쳐 6월 19일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고, 비변사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7월 이몽학의 반란이 진압되자 류성룡, 윤두수,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윤자신(尹自新),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유영경(柳永慶), 우승지 이광정(李光庭) 등과 함께 이몽학의 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국문장의 추관이 되었다.
1599
[영의정 재임명 및 대북 지지]
겨울에 다시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며 정계 최고 요직에 복귀했습니다. 이 시기에 북인 내 대북과 소북의 분당이 심화되었으나, 그는 광해군 지지 세력인 대북의 편에 서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1599년 겨울에 다시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599년(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문제로 다시 갈등이 생긴다. 당론이 앞서면 진실을 외면하듯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과 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됐다. 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소북의 유영경과 경쟁하면서 골북과 육북은 다시 대북으로 통합된다.
1602
[영의정 사임 및 광해군 세자 책봉 건의]
영의정직에서 사임한 뒤 영중추부사로 전임하고 아성부원군을 겸했으며,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대신들과 함께 광해군을 정식으로 세자 책봉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여 그의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602년(선조 34년) 영의정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뒤 영중추부사로 전임한 뒤 아성부원군을 겸하였으며 그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이후 영중추부사와 기로소대신이라는 직함으로 계속 조정에 출사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대신들을 이끌고 계속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1602년 10월 12명의 대신과 사위 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3백 68명, 무관 변양걸(邊良傑) 등 2백 45명 등 625명의 서명을 받고, 광해군이 임진왜란 극복에 힘쓴 점을 들어 광해군을 정식으로 세자책봉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 1603년 영중추부사직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아성부원군과 기로소 당상의 자격으로 조정에 출사하였다.
1605
[청난원종공신 책록 및 대북 지지]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후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습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5년(선조 38년) 이후 다시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다.
1608
[선조 사망 후 광해군 즉위 주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하고 옥새를 탈취하려는 소북 계열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뒤 광해군에게 옥쇄를 넘겨주며 광해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했고 옥새를 탈취하려는 소북계열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뒤 광해군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
1609
[향년 70세로 사망]
병석에 누웠다가 향년 70세로 사망했습니다. 광해군은 그의 죽음에 애통함을 표하며 현임 대신의 예에 따라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했습니다.
1609년봄 둘째 손자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상심이 컸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해 있다가 1609년 음력 8월 병석에 누웠다. 병세가 악화되자 왕이 친히 어의를 내려보내 진맥하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해 음력 8월 23일에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항년 70세였다.
1819
[신도비 건립]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내에 그의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8대손 이정명의 부탁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인당원 채제공이 신도비문을 작성했습니다.
1819년(순조 19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내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그의 8대손 이정명(李鼎溟)의 부탁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인당원 채제공이 그의 신도비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