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광 (후량)

황제, 군주, 창업군주, 오호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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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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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군주, 창업군주, 오호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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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의 초대 천왕. 전진의 장수로서 서역을 평정하며 명성을 얻었다. 전진의 혼란을 틈타 양주를 장악하고 독립하여 후량을 건국했다. 국호를 대량으로 정하고 천왕에 즉위했으나, 말년에는 내부 반란과 세력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태자에게 양위한 뒤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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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여광 탄생]

후량의 초대 천왕 여광이 저족 출신으로 약양(略陽)에서 태어났다.

오호 십육국 시대 후량의 초대 천왕이자 군주인 여광(呂光)이 약양(略陽) 출신의 저족(氐族)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진의 중신이었던 여파루(呂婆樓)이다.

383

[서역 원정 임명]

전진의 장수 여광이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섰다.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활약하던 여광은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로 임명되어 서역 원정에 나섰다. 이 시기 전진은 비수대전 패배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쿠처 점령 및 서역 평정]

서역에 도착한 여광이 쿠처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했다. 중원에 이름이 알려진 불승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했다.

서역에 도착한 여광은 쿠처(龜玆)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역 일대를 평정하였다. 또한 전진 황제 부견의 명령에 따라 중원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불승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신병을 확보했다.

385

[서역 귀환 및 양주 장악]

구마라습의 권유로 중원으로 귀향하던 여광이 고창에 도착하여 양주자사 양희를 무너뜨리고 양주를 장악했다.

전진의 혼란으로 인해 서역 평정 이후 추가적인 명령을 받지 못하던 여광은 구마라습이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385년에 귀향길에 올랐다. 고창(高昌)에 도착한 그는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양주를 장악하여 자신의 세력 기반을 마련했다.

386

[장대예 반란 발생]

과거 전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가 독발부, 흉노 등의 세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다.

386년 초, 과거 전량(前凉) 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독발부(禿髮部), 흉노(匈奴) 등 여러 세력의 개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다. 이 반란은 여광에게 큰 곤란을 주며 2년여를 끌었다.

[독립 정권 수립]

여광이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태안으로 개원하며 주천공을 자칭, 독립 정권을 세웠다.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렸다. 이후 부견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위해 연호를 태안(太安)으로 개원하고, 뒤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며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387

[장대예 반란 진압]

여광이 장대예의 반란을 진압하여 하서회랑 일대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387년 말, 여광은 2년여를 끌던 장대예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하서회랑 일대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세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389

[삼하왕 칭호 사용]

여광이 주천공보다 강력한 칭호인 삼하왕을 자칭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여광은 독립 정권을 수립한 지 몇 년 후인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며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더욱 격상시켰다.

396

[대량 건국 및 천왕 즉위]

여광이 국호를 대량으로 정하고 천왕에 즉위하며 정식 국가를 선포했다.

여광은 396년에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며 정식으로 국가를 건국했다. 그는 독발부, 흉노 등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키고 양주를 평정하며 확고한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397

[서진 공격 및 금성 점령]

여광은 걸복부의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현재 간쑤성 란저우)을 점령했다.

양주를 평정한 여광은 걸복부(乞伏部)의 서진(西秦)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397년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금성(金城 : 현재 간쑤 성 란저우)을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후량 분열 시작]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부 독발오고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고, 단업, 저거몽손 등이 하서회랑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량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금성 점령 직후, 후량에 복속해 있던 독발부의 독발오고(禿髮烏孤)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며 이탈했다. 뒤이어 장액(張掖), 건강(建康) 일대에서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면서 후량은 급격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398

[수도 반란 진압과 지방 불안정]

수도 고장에서 곽논이 일으킨 반란을 여찬을 불러들여 진압했으나, 지방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후량의 분열이 시작된 후,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논(郭黁)이 반란을 일으켜 동원성(東苑城)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서평(西平)의 양궤(楊軌)의 반란과 독발오고의 지원까지 받으며 1년여간 지속되었으나, 여광이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398년 6월 경 곽논 등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며 수도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반란은 여전히 진압하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399

[태자에게 양위 및 사망]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이 태자 여소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으며, 곧이어 병사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여광은 399년에 태자 여소(呂紹)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를 자칭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다. 그의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의무황제(懿武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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