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시인, 작가, 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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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참여 저항 시인이자 민족시인. 1959년 등단 후 4.19 혁명에 참여하며 사회 현실을 직시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껍데기는 가라』, 서사시 『금강』 등이 있으며,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사후에도 문학상, 문학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정신과 문학이 계승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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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충남 부여에서 출생]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부 신연순과 김영희 부부의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지도를 받아 글을 배우고 독서에 매진했습니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부친 신연순은 성격이 차분한 아들에게 6살 때부터 글을 가르치고 책과 붓을 마련해주며 학업을 지원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독서에 힘쓰며 아나키즘이라는 자신만의 생각을 키워갔습니다.

1944

[부여국민학교 수석 졸업 및 전주사범학교 입학]

부여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가 지원을 받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신동엽은 같은 해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시기에 독서에 힘쓰며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받았습니다.

1948

[동맹 휴학 참여로 학교 퇴학]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파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하여 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초기 사건입니다.

1948년 11월, 신동엽은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파 미청산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하여 학교에서 퇴학 조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그의 문학에서 드러나는 사회 비판적 시각과 저항 정신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49

[교사직 사임 후 단국대 사학과 입학]

부여 주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3일 만에 그만두고,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949년, 사범학교에서 퇴학되었음에도 교원 자격이 있었던 신동엽은 부여 주변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며 학문의 길을 택했습니다. 당시 부친은 아들의 학비를 위해 밭을 내놓는 등 학문에 대한 아들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1950

[한국 전쟁과 민청 선전부장 활동]

한국 전쟁 발발로 고향 부여로 내려갔습니다. 이후 인민군 점령 하에 부여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으로 일했으나,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가 아닌 무정부주의에 가까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7월 15일 인민군이 부여를 점령하자, 동엽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식을 활용하려는 인민군의 요구로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주청년동맹(민청) 선전부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실제 사상은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국민방위군 징집과 간흡충 감염]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해체 후 귀가하다 굶주림으로 게를 먹고 간흡충에 감염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1950년 말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신동엽은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 해체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귀가 도중 굶주림 때문에 게를 먹은 것이 원인이 되어 간흡충에 감염되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1953

[단국대 졸업과 헌책방 개업, 부인 인병선과의 만남]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돈암동에 헌책방을 열었고, 이 시기에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처음 만났습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신동엽은 제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에 지원했지만 발령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에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이 헌책방에서 이화여고 3학년이던 미래의 부인 인병선을 만나게 됩니다.

1957

[인병선과 결혼 및 고향 낙향]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 부여로 낙향했습니다. 인병선은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가난한 시인과의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1957년 신동엽은 인병선과 결혼했습니다. 인병선은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중퇴를 감행하며 가난한 시인과의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고향 부여로 낙향했습니다.

1958

[교사직 사임과 요양]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폐결핵을 앓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했습니다.

1957년 고향으로 낙향한 신동엽은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아내와 자녀들을 서울 처가로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전념했습니다.

1959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 데뷔]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던 신동엽은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시키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60

[4.19 혁명 참여 및 《학생혁명시집》 집필]

건강을 회복하여 서울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4.19 혁명에 온몸으로 참여하며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했습니다. 이로 인해 '4.19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 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으며,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인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문인들이 그를 '4.19 시인'으로 평가합니다.

1961

[명성여고 교사로 취업]

명성여자고등학교 야간부 국어 교사로 취업하여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시작(詩作)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1961년 신동엽은 명성여자고등학교(현재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1963

[시집 《아사녀》 출간 및 미공개 시 발굴]

시집 《아사녀》를 출간했으며, 동인지 '시단' 2집에서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太陽 빛나는 蠻地의 詩'와 간결한 '十二行詩' 등 미공개 시 두 편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2009년 그의 40주기를 맞아 1963년 7월 발행된 동인지 '시단(詩壇)' 2집에서 신동엽 시인의 미공개 시 두 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수록된 시는 분단의 민족적 아픔을 절절하게 노래한 '太陽(태양) 빛나는 蠻地(만지)의 詩(시)'와 12행으로 이뤄진 간결한 시 '十二行詩(십이행시)'입니다.

1964

[건국대학교 대학원 졸업]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며 학업을 마무리했습니다.

1964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며 문학에 대한 깊은 학문적 탐구를 이어갔습니다.

1966

[〈그 입술에 파인 그늘〉 국립극장 상연]

그의 작품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국립극장에서 상연되었습니다.

1966년 신동엽의 작품인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국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습니다.

1967

[장편 서사시 《금강》 발표]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967년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민족의 역사와 염원을 담은 대서사시로, 신동엽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같은 해 1월에는 그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껍데기는 가라'가 《52인 시집》에 수록되었습니다.

1968

[오페라타 〈석가탑〉 드라마센터 상연]

오페라타 〈석가탑〉이 드라마센터에서 상연되었습니다.

1968년 오페라타 〈석가탑〉이 드라마센터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습니다.

1969

[38세의 나이로 간암으로 사망]

간암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69년 4월 7일 간암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부인 인병선과 2남 1녀를 남겼습니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안장]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되었습니다.

1969년 4월 9일, 신동엽은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되었습니다.

[묘비 건립]

파주에 안장된 그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1969년 12월 14일, 경기도 파주 월롱산 기슭에 위치한 신동엽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1970

1970.04.18 사후 1년

[고향 부여에 첫 시비 건립]

문인들의 노력으로 고향인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시비 〈산에 언덕에〉가 건립되어 그의 문학 정신을 기렸습니다.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뒤 구상 시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신동엽 시비 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문인, 동료, 제자 등 1백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1970년 4월 18일, 고향인 부여읍 동남리 백제교 옆 백마강 기슭에 그의 시 〈산에 언덕에〉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1975

[《신동엽 전집》 사후 출간]

그의 모든 작품을 모은 《신동엽 전집》이 사후에 출간되어 그의 문학적 유산을 정리했습니다.

신동엽 사후인 1975년에 그의 작품들을 총망라한 《신동엽 전집》이 출간되어 그의 문학적 유산을 후대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82

[신동엽문학상 제정]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동엽창작기금이 조성되었고, 매년 우수한 작품에 수여되는 신동엽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1982년 신동엽의 뜻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신동엽창작기금이 조성되었으며, 이 기금을 바탕으로 매해 우수한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신동엽문학상이 제정되어 그의 문학적 영향력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985

1985.05 사후 16년

[부여 생가 복원]

유족과 문인들의 노력으로 부여읍 동남리에 있던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습니다.

1985년 5월, 유족과 문인들이 충청남도 부여읍 동남리 294번지에 위치했던 신동엽의 생가를 복원했습니다. 이 생가는 목조 초가지붕의 단층 기념관과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89

[시 〈산에 언덕에〉 중학교 교과서 수록]

그의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많은 학생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1989년 신동엽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인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에게 그의 문학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0

1990.04 사후 21년

[단국대학교에 시비 건립]

고 신동엽의 24주기를 맞아 그가 문학의 꿈을 키웠던 단국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건립되었습니다.

1990년 4월, 고 신동엽의 24주기를 맞이하여 시인을 흠모하는 단국대학교 교수, 재학생, 동문 그리고 문단의 뜻을 모아 그가 문학의 꿈을 키우던 단국대학교(당시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시비는 2007년 단국대학교가 죽전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현재 죽전캠퍼스 상경대학 1층 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93

1993.11 사후 24년

[묘소 고향 부여로 이전]

경기도 파주에 있던 묘소가 고향 부여 능산리 고분 건너편 산으로 옮겨와 안장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신동엽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에서 고향인 부여로 옮겨와 부여 능산리 고분 건너편 산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1999

[부여초등학교에 시비 건립]

신동엽의 30주기를 맞아 그의 모교인 부여초등학교 교정에 시비가 건립되었습니다.

1999년 신동엽의 3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모교인 충남 부여군 부여초등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높이 약 2미터의 이 시비에는 그의 장편 서사시 〈금강〉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2001

2001.05.15 사후 32년

[전주사범대학에 시비 건립]

모교인 전주사범대학에 시비가 건립되어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2001년 5월 15일, 전주사범대학에서 제막식을 가지고 신동엽 시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사범과 3회 동기생들은 졸업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동기생이자 한국 시단을 빛낸 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시비를 세웠습니다. 가로 2미터, 세로 2.3미터의 검은색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시비에는 시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의 일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2003

2003.02.19 사후 34년

[생가 부여군에 기부]

그의 아들 신우섭이 생가의 영구 보존을 위해 부여군에 생가를 기부했습니다.

2003년 2월 19일, 신동엽의 아들 신우섭은 그의 생가가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생가를 부여군에 기부했습니다. 기부된 생가 터는 274m²에 목조 초가지붕 단층 기념관 33.60m²와 부속건물인 목조 초가지붕 단층 관리사 24.76m²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003.10 사후 34년

[은관문화훈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아 그의 문학적 공로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으며, 그의 문학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10

2010.09.10 사후 41년

[신동엽학회 설립]

신동엽을 사랑하는 문인들의 모임인 신동엽학회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사무실을 열고 공식 출범했습니다.

2010년 9월 10일, 신동엽을 사랑하는 문인들의 모임인 신동엽학회(회장 구중서)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사무실을 열고 공식 출범했습니다. 이 학회는 이민호, 고명철, 정우영 등이 참여했으며, 2010년 신동엽이 지향하던 “온전한 인간”이라는 뜻의 '전경인(全耕人)'을 넣어서 학술지 《전경인 어문연구》 창간호를 냈습니다.

2013

2013.05.03 사후 44년

[신동엽문학관 개관]

부여군에서 생가 뒷편에 연면적 800m² 규모의 신동엽문학관을 개관하여 그의 삶과 문학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3년 5월 3일, 부여군에서는 신동엽 생가 뒷편에 연면적 800m² 규모의 신동엽문학관을 개관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전시하고 기념하며 후대에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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