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진 (기업인)

기업인, 회장, 창업주, 제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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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진은 불모지에 가까웠던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입지전적인 기업가입니다.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대우자동차 임원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나, 외환위기로 인한 그룹 해체라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후 5,000만 원으로 창업한 셀트리온을 통해 세계 최초의 항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를 성공시키며 글로벌 제약 시장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경영 일선 퇴진 후 복귀를 결정하며 통합 셀트리온의 출범을 이끄는 등 현재까지도 쉼 없는 도전 정신으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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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충북 청주에서의 탄생]

대한민국 바이오 신화를 써 내려갈 서정진 회장이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매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가풍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고향 청주에서의 유년 시절은 훗날 그가 기업가로서 지녀야 할 끈기와 기초적인 소양을 닦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학업에 열중하며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청주에서 보낸 학창 시절은 그에게 고향에 대한 깊은 애착과 향후 기업가로 성장하기 위한 인간적 유대를 선사했습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여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976

[청주고등학교 졸업]

지역 명문인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 진학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고교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과 리더십을 보이며 주변의 기대를 모았던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포부를 다졌습니다. 이는 지역 인재에서 전국구 인재로 도약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습니다.

청주고 시절 맺은 인맥들은 훗날 그가 사업을 운영하며 위기에 처했을 때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학교 생활을 통해 논리적인 사고와 체력적인 강인함을 동시에 길렀다고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하며 본격적인 상경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77

[건국대학교 입학]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하여 공학적 지식과 효율적인 시스템 설계에 대해 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시절 그는 단순히 전공 공부에만 그치지 않고 경영과 경제 등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두며 식견을 넓혔습니다. 이 시기 습득한 산업공학적 사고방식은 훗날 바이오 공정 효율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등 자립심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동기들 사이에서 추진력이 좋은 학생으로 통했으며 학생회 활동 등을 통해 조직 관리의 기초를 경험했습니다.
건국대학교와의 인연은 졸업 후에도 이어져 훗날 모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기부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1983

[산업공학 학사 취득]

성실한 대학 생활 끝에 건국대학교에서 산업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습니다. 공학도로서의 전문 지식을 완비한 그는 곧장 산업 현장에 뛰어들어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학위 취득은 그가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공식적인 자격 증명이었습니다.

졸업 당시 우수한 성적뿐만 아니라 실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을 마무리하며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일꾼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졸업 직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샐러리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전기 입사]

대학 졸업 후 삼성전기에 입사하여 대기업 시스템 내에서 실무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업무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 상사들의 눈에 띄었으며 빠른 업무 습득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삼성에서의 경험은 철저한 품질 관리와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산 현장에서 공정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제안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삼성이라는 조직 안에서 글로벌 기업이 지녀야 할 규율과 혁신 정신의 중요성을 직접 체감했습니다.
비록 재직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대기업의 생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985

[생산성본부 전문위원]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겨 국내 기업들의 공정 개선과 컨설팅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위원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업 현장을 방문하며 각 산업군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그는 대한민국 산업 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생산성본부 시절 그는 수만 장의 리포트를 작성하며 분석적 사고 능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눈에 띄게 된 것도 컨설턴트로서 보여준 탁월한 통찰력 덕분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그가 훗날 직접 기업을 경영할 때 필요한 경영 진단 능력을 배양한 황금기였습니다.

1991

[대우차 최연소 임원]

대우자동차에 영입된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에 기획재무부문 상무이사로 발탁되었습니다. 당시 재계에서 대기업의 최연소 임원 등장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며 그의 능력을 방증하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그룹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대우차에서 글로벌 시장 진출과 구조조정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습니다.
특유의 몰입력으로 밤낮없이 근무하며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의 화려한 경력은 훗날 그가 '대우맨'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된 원천이 되었습니다.

1999

[대우그룹 해체와 퇴사]

외환위기의 여파로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탄탄대로였던 임원 생활을 마감하고 야인이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실직자가 되었지만, 그는 좌절하기보다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동료들과 머리를 맞댔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함께 퇴사한 대우자동차 동료 5명과 함께 명동 근처의 작은 사무실에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당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전국을 돌며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샐러리맨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2000

[넥솔 설립과 창업]

자본금 5,000만 원을 들고 동료들과 함께 넥솔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초기에는 뚜렷한 아이템 없이 시작했으나 생명공학이 미래의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바이오의 '바'자도 모르던 공학도가 제약 산업에 도전장을 내민 무모한 시작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바이오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지식을 구걸하다시피 하며 공부했습니다.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를 수차례 넘겼습니다.
이 설립은 훗날 셀트리온이라는 거대 기업이 탄생하는 모태가 된 역사적인 출발이었습니다.

2002

[셀트리온 공식 출범]

인천 송도에 셀트리온을 설립하며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미국 바이오 기업 벡스젠과의 기술 협력을 이끌어내며 글로벌 수준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기지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송도 갯벌 위에서 시작된 이 도전은 대한민국 바이오 신화의 서막이었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거는 결단력을 보였습니다.
바이오시밀러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는 성공 가능성을 믿고 연구 인력을 대거 영입했습니다.
인천 송도가 현재의 바이오 클러스터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설립이었습니다.

[벡스젠과 합작투자 계약]

미국의 벡스젠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계약을 통해 셀트리온은 선진적인 생산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신생 기업이 글로벌 파트너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당시 그는 에이즈 백신 개발을 추진하던 벡스젠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여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비록 이후 백신 개발은 실패했으나, 이 과정에서 구축한 생산 설비는 셀트리온의 핵심 자산이 되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그의 경영 철학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초기 계약 사례입니다.

2005

[제1공장 준공 완료]

인천 송도에 대규모 바이오의약품 생산 시설인 제1공장을 성공적으로 준공했습니다. 최첨단 설비를 갖춘 이 공장은 연간 대량의 항체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연구소를 넘어 실제 생산력을 갖춘 제약사로 거듭난 순간이었습니다.

준공식 당시 그는 한국 바이오 의약품의 세계화를 선언하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미국 FDA의 기준을 충족하는 엄격한 설계로 글로벌 위탁생산(CMO) 시장 진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대규모 투자가 결실을 본 첫 번째 하드웨어적 성과였으며 송도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2007

[수출 1억불 탑 수상]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과 기술 수출을 통해 단기간에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으로서 이례적인 수출 실적을 기록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는 셀트리온의 사업 모델이 해외 시장에서 통하고 있음을 증명한 상이었습니다.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역의 날 행사에서 수출 탑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며 조만간 우리 브랜드의 약을 전 세계에 팔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이 상은 그가 임직원들과 함께 고생하며 일궈낸 첫 번째 국가적 공인 지표였습니다.

2008

[한서제약 인수 계약]

국내 중견 제약사인 한서제약을 인수하며 케미컬 의약품 시장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이 인수는 훗날 셀트리온제약으로 변모하여 그룹의 내수 시장과 케미컬 포트폴리오를 담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이오와 케미컬을 아우르는 종합 제약 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인수에 그치지 않고 한서제약의 생산 설비를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여 품질을 높였습니다.
바이오시밀러뿐만 아니라 일반 의약품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그의 공격적인 경영이 돋보였습니다.
이후 셀트리온제약은 간장약 고덱스 등을 히트시키며 안정적인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코스닥 우회상장 성공]

오알켐과의 합병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우회상장하며 자본 시장의 중심부로 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규모 투자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기업의 공신력을 높였습니다. 상장 이후 셀트리온은 코스닥 시장의 대장주로 군림하며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우회상장 결정은 당시 자금 압박을 해결하고 글로벌 임상을 가속화하기 위한 그의 승부수였습니다.
상장 초기에는 여러 의구심 어린 시선을 받았으나 투명한 경영과 성적으로 이를 정면 돌파했습니다.
투자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대한민국 바이오 주식 열풍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2009

[램시마 대규모 임상 개시]

세계 최초의 항체 바이오시밀러인 '램시마'의 글로벌 임상 시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비용과 리스크가 따르는 대규모 임상이었으나 그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추진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환자들에게 저렴하고 품질 좋은 의약품을 공급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전 세계 수백 개의 병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임상은 한국 제약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였습니다.
그는 임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임상 과정에서 나타난 뛰어난 효능 데이터는 향후 글로벌 허가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2011

[건국대 명예박사 수여]

모교인 건국대학교로부터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으며 학문적 성과와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공학사 출신으로서 실전에서 보여준 탁월한 경영 혁신 사례들이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된 결과였습니다. 모교와의 깊은 신뢰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수여식에서 그는 '배움을 멈추지 않는 기업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밝혀 참석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학위 수여 이후 그는 모교 발전을 위해 거액의 장학금을 쾌척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이 명예박사 학위는 그가 샐러리맨 신화를 넘어 교육계에서도 존경받는 리더임을 증명했습니다.

2012

[램시마 국내 품목허가]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세계 최초 항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의 국내 품목허가를 획득했습니다. 이는 다국적 제약사의 독점이었던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 한국 기업이 처음으로 깃발을 꽂은 쾌거였습니다. 이 승인으로 인해 그는 10년 가까이 이어온 집념이 헛되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국내 허가 소식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었으며 제약업계의 지각 변동을 예고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의 바이오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증명했다'며 벅찬 소회를 밝혔습니다.
램시마의 탄생은 고가 약가로 치료를 포기했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2013

[유럽 EMA 램시마 승인]

유럽의약품청(EMA)으로부터 램시마의 최종 판매 승인을 얻어내며 전 유럽 시장 진출의 길을 열었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럽의 검증 절차를 통과함으로써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글로벌 시장에서 공인받았습니다. 이는 셀트리온이 글로벌 빅파마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모멘텀이 되었습니다.

유럽 승인 직후 글로벌 마케팅 파트너들과 협력하여 공격적인 시장 점유율 확대를 추진했습니다.
기존 오리지널 의약품 대비 합리적인 가격 정책을 통해 유럽 각국 정부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주장해온 바이오시밀러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는 역사적 이정표였습니다.

2015

[램시마 유럽 전역 출시]

독일,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 램시마를 본격적으로 런칭하고 판매를 개시했습니다. 현지 대형 병원들과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오리지널 의약품의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제약사가 만든 항체 의약품이 유럽 환자들에게 처방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는 직접 유럽 현지를 방문하여 영업망을 점검하고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경쟁 전략을 지휘했습니다.
램시마의 성공적인 안착은 후속 제품인 트룩시마와 허쥬마의 유럽 진출에 탄력을 주었습니다.
출시 1년 만에 유럽 시장 점유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며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2016

[미국 FDA 램시마 허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램시마의 판매 허가를 최종 획득했습니다. 이는 한국 바이오 의약품이 미국 본토 상륙을 허가받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텃밭이었던 미국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미국 내 제품명인 '인플렉트라'로 출시되어 화이자 등 글로벌 파트너와 함께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FDA 허가는 램시마의 품질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최종적으로 입증하는 '도장'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셀트리온을 전 세계 제약사들이 경계하는 강력한 플레이어로 성장시켰습니다.

2017

[트룩시마 유럽 승인]

혈액암 치료제 바이오시밀러인 '트룩시마'가 유럽 의약품청으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았습니다. 램시마에 이어 두 번째 글로벌 전략 제품이 탄생하며 파이프라인의 다변화에 성공했습니다. 항암제 시장에서도 바이오시밀러의 파괴력을 입증하기 위한 그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트룩시마는 출시와 동시에 유럽 내 의료진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으며 빠르게 처방을 확대했습니다.
그는 램시마에서 쌓은 성공 노하우를 트룩시마에 적용하여 마케팅 효율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로써 셀트리온은 자가면역질환에 이어 항암제 분야에서도 글로벌 선두 주자로 우뚝 섰습니다.

2018

[코스피 이전 상장]

코스닥 시장을 떠나 대한민국 주식 시장의 본무대인 유가증권시장(코스피)으로 이전 상장했습니다. 주주들의 강력한 요구와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며 코스피 200 지수 편입의 길을 열었습니다. 상장 당일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권에 단숨에 진입하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이전 상장을 통해 기관 및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자금 유입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코스피 대표 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며 한국 증시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상장 기념식에서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허쥬마 유럽 품목 허가]

유방암 치료제 바이오시밀러 '허쥬마'가 유럽에서 품목 허가를 획득하며 '바이오시밀러 3인방' 라인업을 완성했습니다. 램시마, 트룩시마에 이어 허쥬마까지 허가를 받으며 세계적인 바이오시밀러 개발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특정 질환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기술력을 증명한 결과였습니다.

허쥬마는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등한 효능을 입증하여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대폭 경감했습니다.
그는 허쥬마의 출시를 통해 셀트리온이 항암제 포트폴리오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유럽 전역의 주요 입찰 시장에서 승전보를 울리며 한국 바이오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2019

[경영 일선 은퇴 예고]

창업 후 쉴 틈 없이 달려온 그는 조만간 경영권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여 시스템에 의한 운영을 정착시키겠다는 그의 혁신적인 구상이 반영된 결정이었습니다. 재계에서는 자수성가 창업주의 파격적인 은퇴 선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자간담회를 통해 '2020년 말에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스타트업 지원이나 개인적인 소망을 실천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공유했습니다.
이는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새로운 기업인상을 보여주며 대중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2021

[회장직 퇴임 및 명예회장]

약속했던 시기에 맞춰 셀트리온 그룹 회장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20여 년간 일궈온 거대 그룹을 전문 경영인과 가족들에게 맡기고 경영 일선에서 용퇴했습니다. 이는 한국 기업사에서 창업주가 건강한 시기에 경영권을 승계한 모범 사례로 꼽혔습니다.

퇴임식 대신 사내 방송 등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는 퇴임 후 'T-프로젝트' 등 새로운 영역에서의 도전을 계속 이어갈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은퇴 당시 셀트리온은 시가총액 수십 조 원의 글로벌 제약 그룹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EY 세계 최우수 기업가상]

전 세계 비즈니스 리더들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EY 세계 최우수 기업가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습니다. 모나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그의 혁신적인 경영 철학과 바이오 산업에 기여한 공로가 전 세계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한국 기업가의 위상을 글로벌 무대에서 한 단계 높인 쾌거였습니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 창업주들을 제치고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인의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모든 공은 셀트리온 임직원들과 주주들에게 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상은 그가 단순히 한국 내에서의 성공을 넘어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리더임을 공인했습니다.

2023

[경영 일선 전격 복귀]

글로벌 경기 침체와 그룹의 중대한 변화를 앞두고 명예회장에서 다시 경영 일선으로 전격 복귀했습니다. 주주들의 강력한 요청과 위기 극복을 위한 본인의 사명감이 어우러져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야전 사령관'의 복귀 소식에 시장과 임직원들은 큰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복귀 직후 그룹의 합병 프로젝트와 신약 개발 가속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퇴임 전보다 더욱 정력적인 모습으로 전 세계 시장을 직접 누비며 영업 현장을 지휘했습니다.
이 복귀는 책임 경영을 실천하고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그의 승부수였습니다.

[짐펜트라 미국 FDA 승인]

세계 최초의 인플릭시맙 피하주사 제형인 '짐펜트라'가 미국 FDA로부터 신약 판매 허가를 획득했습니다. 바이오시밀러를 넘어 자체 개발 신약으로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승인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컸습니다. 이는 셀트리온이 신약 개발사로 완벽하게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짐펜트라는 환자의 투약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미국 의료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는 짐펜트라의 성공적인 미국 런칭을 위해 직접 현지 보험사와 병원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허가는 그가 복귀 후 거둔 첫 번째 대형 성과였으며 주주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통합 셀트리온 합병 완료]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의 합병 절차를 마무리하고 거대한 통합 법인을 출범시켰습니다. 지배구조의 단순화와 투명성 제고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그의 오랜 숙원이 결실을 본 것입니다. 이로써 셀트리온 그룹은 제조부터 마케팅까지 하나로 묶인 일관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합병 과정에서 주주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수차례 온오프라인 간담회를 열어 소통했습니다.
그는 통합 셀트리온이 2030년까지 매출 수십 조 원을 달성하는 글로벌 빅파마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합병 이후 재무 구조가 개선되고 연구개발 투자 여력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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