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전투, 해전, 정유재란, 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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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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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중 발생한 명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조선 수군이 일본 대규모 함대에 맞서 압도적인 열세(13척 대 330여 척)를 극복하고 거둔 역사적 대승입니다. 울돌목의 험난한 지형과 급류를 활용한 뛰어난 전술로 제해권을 회복하고,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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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및 수군 재건 시작]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수습하고 이후 2척을 추가 확보하여 총 12척의 전선을 재건하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원균의 지휘 아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며 제해권을 상실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품계를 낮춰 지휘 체계에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2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고, 나중에 2척을 더 회수하여 총 12척의 전선을 확보하며 수군 재건에 힘썼습니다. 그는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는 데 전념했습니다.

[일본 소함대 격퇴 및 우수영으로 진영 재배치]

이순신 장군은 어란포에 나타난 일본 전투선을 격퇴한 후,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24일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기며 최종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0월 16일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어란포에 나타난 일본 전투선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1597년 10월 24일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그에 앞서 1597년 10월 16일 조선 수군은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퇴하며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13척뿐인 약한 상대로 오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순신, '필사즉생' 결사 항전 명령]

명량 해전 전날, 이순신 장군은 장병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를 외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독려했습니다. 이 결의는 압도적인 적군에 맞설 조선 수군의 사기를 다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량대첩 직전 날인 1597년 10월 24일,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거듭 말하며,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조류 역전과 철쇄 전술의 위력]

정오 무렵, 울돌목의 조류 방향이 역전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좁은 해협에서 역류에 갇힌 일본 전함들은 서로 부딪히며 혼란에 빠졌고, 여기에 이순신이 설치한 300kg가량의 철쇄가 추가적인 피해를 입혀 일본 수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으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에 1킬로미터가량 떨어져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까지 합세하여 10여 척의 전선이 모두 모인 조선 수군은 당파를 거듭했고, 일본 수군은 조류의 역조(逆潮)와 조선 수군의 당파로 인해 전혀 반격할 수 없었으며, 또한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이미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서 설치된 철사를 엮어 만든 약 300kg가량의 철선에 의해 부수적으로 더 많은 일본 군선이 파손되어 침몰하였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명량 해전 발발, 일본 수군 울돌목 진입]

1597년 10월 26일 새벽, 어란진에서 출발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으며, 적선 선봉대열이 통과하는 시점에 기함의 즉각적인 포격으로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1597년 10월 2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여 척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으로 접근했습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 130여 척으로 진영을 짜고 10여척씩 대열을 맞추며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보고를 받고 즉시 닻을 올리고 울돌목으로 향했으며 이미 적선의 선봉대열이 통과하고 있는 시점에 이순신 상선의 즉각적 포격으로 세키부네 3~4척이 격침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수군 철수, 명량 해전 대승으로 마무리]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 그리고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에 압도당한 일본 수군은 유시(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자신들 쪽으로 불자 이를 이용해 철수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330여 척의 일본 대함대를 격파하는 세계사적인 대승을 거두며 정유재란의 판세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결국 330여 척의 대함대를 10여 척으로 추격하는 형세가 되었고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일본측 잔존 함대는 철수 하였습니다. 전투는 끝났고,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330여 척 중 30여 척(31~33)이 초전에 격침되었으며, 철선과 해류에 휩싸여 침몰하거나 대파한 함선이 격침 함선을 포함하여 320여 척에 달했습니다. 반면 조선군의 전선은 단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순천감목관 김탁과 이순신의 종 계생이 전사하였고, 안위의 전함의 격군 일고여덟명이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무산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순신 기함의 고군분투와 구루시마 미치후사 참수]

일본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조선 수군이 물러서자, 이순신 기함은 홀로 자리를 고수하며 40여 분간 버텼습니다. 이후 이순신의 독려로 김응함과 안위가 합류하여 전투에 나섰고, 격전 중 항왜 준사의 증언으로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식별, 그를 참수하여 조선 수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빽빽히 명량을 채운 적의 기세에 밀려 조선 수군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으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하며 약 40분가량을 버텼습니다. 적의 진격이 소강상태가 되자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매우 다그쳤습니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고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습니다. 격전의 와중에 이순신의 대포와 화공에 맞아 안위의 배를 둘러쌌던 적장선을 포함한 3척의 적선이 격침되었고, 이 광경을 보고있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구루시마로 추정)다"라고 알렸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마다시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고,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1688

[명량대첩기념비 건립]

명량 해전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에 명량대첩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 피해를 입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해방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왔으며,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명량대첩기념비가 1688년(숙종 14년)에 세워졌습니다. 이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습니다.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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