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 (삼국지)

중국 후한 관료, 장군, 지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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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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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 관료, 장군, 지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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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겸은 중국 후한 말기 서주를 통치한 관료이자 장군입니다.혼란한 시대에 서주자사 및 서주목을 역임하며 지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특히 조조와의 대립 과정에서 조조의 아버지 조숭 피살 사건에 연루되어 조조의 서주 침공을 야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임종 직전 유비에게 서주를 위임하며 유비 세력 성장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성품과 행정 능력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지만, 삼국시대 초 서주 지역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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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도겸 탄생]

도겸,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자는 공조로 태어나다.

132년,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자는 공조인 도겸이 태어났다. 그는 단양군 단양현 출신이다.

146

[도겸의 젊은 시절과 관직 시작]

도겸이 젊어서 유생이 되고, 고아가 된 후 14세에 고을 아이들의 추종을 받았다. 이후 옛 창오태수 감공의 사위가 되고, 주와 군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노현 현령, 유주자사, 의랑 등을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단양군 단양현 사람인 도겸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유생이 되었고,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14세에는 고을 아이들의 추종을 받을 정도로 리더십을 보였다. 옛 창오태수 감공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후 주와 군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무재로 천거되어 노현 현령에 임명되었고, 유주자사, 의랑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후한 말 관료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4

[황보숭, 장온과 서강, 한수 토벌]

양무도위가 되어 정서장군 황보숭과 함께 서강의 침략에 맞서 강족을 토벌하고, 거기장군 장온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한수를 토벌하는 데 참여했다.

서강이 후한의 변경을 침략하자 정서장군 황보숭의 부름을 받아 양무도위가 되었고, 황보숭과 함께 강족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거기장군 장온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한수를 토벌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장온과 불화가 있었으나 결국 용서받고 관계를 유지했다.

188

[서주자사 취임 및 황건적 토벌]

서주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서주자사에 임명되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서주의 안정을 도모했다.

후한 말기 전국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확산되던 중, 서주 지역에서도 황건적의 준동이 심해지자 도겸은 서주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주에 부임하여 황건적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지역의 안정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192

[황제 옹립 시도와 서주목 승진]

동탁 사후 이각과 곽사가 조정을 장악하자, 주준 및 여러 명사들과 연합하여 황제를 옹립하고 이각 등을 토벌하려 했으나 주준의 사양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조정에 공물을 바쳐 안동장군, 서주목으로 승진하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동탁이 암살된 후 동탁의 부하 이각과 곽사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자, 도겸은 주준을 추대하고 공융, 정현 등 주변의 명사들과 연합하여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려 했다. 그러나 주준이 직접 조정에 들어가려는 계획으로 이를 사양하면서 도겸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도겸은 조정에 사자를 보내 샛길로 공물을 바쳐 안동장군과 서주목으로 승진하였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당시 서주는 부유하고 미곡이 풍성하여 유랑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도겸은 형벌과 행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간사한 자들을 가까이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입는 문제가 발생했다.

193

[진등 임명 및 농업 발전]

기근이 들자 진등을 전농교위로 임명하여 농업 발전에 힘쓰게 했고, 그 결과 곡식이 풍성히 쌓여 서주의 경제 안정에 기여했다.

서주목으로 재직 중 기근이 발생하자, 도겸은 진등을 전농교위로 임명하여 농업 발전을 총괄하게 했다. 진등의 노력 덕분에 곡식이 풍성하게 쌓여 서주는 기근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손찬과의 연합, 원소 공격 실패]

원술과 원소의 관계가 악화되자, 도겸은 공손찬의 명령에 따라 발간현에 주둔하며 유비, 선경과 연합하여 원소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원소와 조조의 강력한 연합군에 의해 격파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 부친, 조숭 피살 사건 발생]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를 지나던 중 도겸 휘하의 도위 장개가 조숭의 재물을 탐내어 그를 살해하고 도주했다.

이 사건의 책임이 도겸에게 돌아가면서, 조조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서주를 침공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조조의 1차 서주 침공 및 대학살]

193년 가을, 조조는 아버지 조숭의 피살 사건을 명분 삼아 서주를 대규모로 침공했다.

조조군은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팽성에서 도겸군과 맞서 승리한 후 도겸은 담성으로 도주했다.

조조는 담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군량 부족과 청주자사 전해의 구원군 소식에 회군했는데, 퇴각하는 길에 취려, 저릉, 하구 등을 함락시키고 수십만 명의 백성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사수가 막힐 정도였다.

중원 연주지역에 본거를 잡아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인 조조는,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삼아 서주를 침략했지만

사실상 동쪽방향의 리스크를 먼저 소거하려던 대전략으로 해석된다. 이 전략방침은 후에 역사학자 및 군사전문가들에 의해 평가가 크게 갈리는 부분 중 하나다.


[긍정평가]

당시 생산력, 경제력이 뛰어났던 서주지역을 민간인까지 모조리 학살함으로 인해 한동안 서주지역은 제대로된 경제, 군사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이는 후에 유비가 조조를 배신하고 서주를 무단점거했을 당시, 오랫동안 농성하지 못하고 와해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원소군과의 대치상황에서 한 방면의 위험성을 훌륭히 제거했고 끝내 관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측면에서 좋은 선택이라는 평을 받는다.


[부정평가]

반면 장소, 제갈량 등 서주 출신의 걸출한 정치 인재들이 유비, 손권 권역으로 이탈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민간인 학살로 인해 유비 등을 비롯한 반조조세력의 대의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훗날 조조는 서주에 이어 신야 방면으로 다시 한 번 유비를 토벌하게 되는데, 서주대학살의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유비군 군세를 따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훗날 소설 삼국지연의의 재구성에서 '냉철한 실리주의자 조조'와 '백성의 수호자 유비'라는 대립구도를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194

[유비에게 병력 지원 및 예주자사 임명]

조조의 1차 서주 침공 이후, 전해가 데려온 유비에게 단양병 4천을 지원하고 조정에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아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1차 조조의 서주 침공 이후 전해가 이끌고 온 유비에게 단양 정예병 4천을 내어주어 서주 방위에 힘을 보태게 했다. 또한, 도겸은 조정에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서주 동남방의 소패에 주둔하도록 조치하며 유비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손책 및 원술과의 대립]

서주 관할 광릉군 강도현으로 이주해 온 손책의 성장을 경계하여 손책으로 하여금 원술을 섬기게 만들었다.

이후 원술이 서주를 치기 위해 군량미를 빌리려 시도한 것으로 보아 원술과의 제휴 관계도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손책이 어머니를 모시고자 여범을 보냈을 때, 도겸은 이를 원술의 정탐으로 의심하여 여범을 고문하는 등 원술 및 손책과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조조의 2차 서주 침공]

조조가 다시 서주를 침공하여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함락시켰다.

도겸은 단양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조조가 여포의 연주 점거 소식에 급히 회군하며 위기를 넘겼다.  

흥평 원년(194년),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여 낭야와 동해 지역의 여러 현을 함락시키는 등 도겸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도겸은 위기 속에서 단양으로 도주를 계획했으나, 마침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맞아 연주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가 급히 회군하면서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조조는 2차 침공의 회군 길에도 양분현에서 또다시 사람들을 살육했다.  

[도겸 사망 및 유비에게 서주 위임 유언]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별가 미축에게 유비가 서주를 통치하도록 유언하여, 서주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년, 조조의 2차 침공 직후 도겸은 향년 63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병이 깊어지자 별가 미축에게 유비가 자신의 뒤를 이어 서주를 통치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장소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유언은 유비가 서주를 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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