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순

독립운동가, 의사,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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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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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의사,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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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순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신식 교육을 받고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에비슨을 도와 해부학 교과서 등 많은 의학 서적을 번역하며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만주에 망명하여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만주 치치하얼에서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꿈꾸었으나, 일본 특무요원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그의 헌신이 재조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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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김필순 출생]

황해도 장연군에서 김성섬과 안성은의 5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일찍 개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집안 중 하나였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선교사 언더우드 등과 접촉하며 서울에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필순은 1878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김성섬과 안성은의 5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찍이 개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집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 한학을 공부했으나,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기회를 통해 서울에서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899

[제중원 근무 시작]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제중원에서 셔톡스의 통역 및 조수로서 처음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배재학당에서 4년 동안 학업을 마친 김필순은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셔톡스의 통역 및 조수 역할을 맡았으며, 이듬해인 1900년에는 에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에비슨을 도와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06

[의학 서적 번역 재개]

이전에 화재로 소실된 원고에도 불구하고, 해부학 교과서 번역을 필두로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다양한 의학 서적 번역을 다시 시작했다. 에비슨의 도움을 받아 번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졸업 전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도 담당했다.

김필순은 에비슨과 함께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했으나, 불행히도 원고가 화재로 소실된 바 있다. 그러나 1906년 다시 해부학 교과서 번역을 시작하여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다수의 의학 서적을 번역했다. 에비슨은 그의 영어 실력이 번역에 다소 미흡한 점을 고려하여 직접 가르치며 번역 사업을 돕고 완수하게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김필순은 졸업 전부터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다.

1908

[제중원의학교 졸업 및 활약]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김필순은 에비슨 교장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학교 발전과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의학도이자 병원 경영에도 능통하여 장차 세브란스병원의 책임자로 키워질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김필순은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했다. 에비슨 교장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장차 세브란스병원의 책임을 맡아 한국 의학을 이끌어갈 인재로 키우려 했다. 졸업 후에도 에비슨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병실 및 외래 보조 역할 외에도 수년간 병원 경영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1911

[신민회 가입과 중국 망명]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도산 안창호 등 우국지사들과 교분을 맺었고,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등이 조직한 비밀정치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가 임박하자 만주로 피신했다.

김필순은 학교생활에 매진하는 한편, 나라의 위기를 걱정하며 많은 우국지사들과 교류했다. 특히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그를 도왔다.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김구 등이 조직한 비밀정치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가 임박해지자 1911년 말 중국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1916

[치치하얼로 도피 및 이상촌 구상]

만주 통화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독립군 자금을 기부했으나,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1916년 몽골 근처의 치치하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다시 병원을 열고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꿈꾸며 준비했다.

중국 통화에서 병원을 개설하여 얻은 모든 수입금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통화가 점차 일본의 영향권에 들면서 압박이 심해지자, 1916년 몽골 근처의 치치하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다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매입하여 평소 꿈꾸던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시작하려 했다.

1919

[서거 (독살 추정)]

치치하얼에서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일본의 특무요원으로 추정되는 이웃 일본인 의사가 건넨 독이 든 우유를 마신 후 귀가 중 말에서 떨어져 영면했다.

치치하얼에서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꿈꾸며 활동하던 김필순은 일본의 특무요원으로 생각되는 이웃 일본인 의사가 건넨 독약을 넣은 우유를 마신 후 귀가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1919년 영면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

1977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필순은 1977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독립운동과 조국을 위한 헌신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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