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축구 심판)

축구 심판, 축구 행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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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은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이자 국제적인 축구 행정가로, 폭넓은 국제 인맥을 바탕으로 국제 대회를 유치하고 해외 협력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과 부산광역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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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김주원 탄생]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이자 국제 행정가 김주원이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난 김주원은 훗날 한국 축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길 인물이 됩니다.

1952

[부산대학교 입학]

부산대학교에 입학하며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53

[한국 전쟁 참전 및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활동]

한국 전쟁에 참전 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골키퍼로 활동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군에 입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전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골키퍼로 활약했습니다. 1957년 '이승만 탄생 기념 경축 전국 축구대회'에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습니다.

1957

[이승만 탄생 기념 축구대회 준우승]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골키퍼로 '이승만 탄생 기념 경축 전국 축구대회'에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습니다.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소속 골키퍼로 1957년 4월에 열린 '이승만 탄생 기념 경축 전국 축구대회'에서 팀이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1968

[FIFA 국제 심판 선임]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며 국제 무대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68년 7월 13일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어 한국 축구 심판으로서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6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주심 활약]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결승 및 결승전의 주심을 맡아 국제 심판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1969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준결승전과 결승전의 주심을 맡으며 중요한 경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1970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회 위원 활동 시작]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회의 위원으로 포함되어 한국 축구 심판 행정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2월 3일 대한축구협회가 조직한 심판위원회의 위원에 포함되어 국내 축구 행정 분야에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심판 선정]

1970년 아시안 게임 축구 분야에서 대한민국 대표 심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16일 1970년 아시안 게임 축구 종목에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어 국제적인 경험을 쌓았습니다.

1972

[1972년 아시안컵 참가]

1972년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국제 대회 심판 경험을 이어갔습니다.

1972년 4월 8일 1972년 아시안컵에 참가하여 심판으로서의 경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AFC 아시안컵 주심]

1972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란과 크메르 공화국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2년 5월 7일, 1972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란 대 크메르 공화국의 경기에 주심으로 참여했습니다.

[1972년 하계 올림픽 경기 분석 파견]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 경기를 분석하기 위해 이란 테헤란에 파견되어 경기 분석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2년 5월 20일 이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1972년 하계 올림픽 경기 분석을 위해 박경화와 함께 테헤란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넓은 국제적 시야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박대통령컵 주심 (싱가포르 vs 버마)]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싱가포르와 미얀마(버마)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2년 9월 25일,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싱가포르와 미얀마(버마) 경기의 주심을 담당했습니다.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주심]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싱가포르와 버마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2년 9월 26일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싱가포르와 미얀마(버마) 간의 경기를 포함한 여러 경기의 주심을 맡으며 주요 국제 대회의 심판으로서 활동했습니다.

[대한민국-오스트레일리아 친선경기 주심]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친선경기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2년 10월 22일,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친선경기 주심을 보았습니다.

1973

[축구지도자 강습회 강사 활동]

대한축구협회가 주최한 '축구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1973년 1월 9일 대한축구협회가 주최한 '축구지도자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교육 활동에도 기여했습니다.

[주요 국제 대회 심판 배정]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B조와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심판으로 배정되었습니다.

1973년 2월 24일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B조 경기와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아 국제적인 활동 범위를 넓혔습니다.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주심 (이라크 vs 인도네시아)]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이라크와 인도네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3년 3월 16일,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이라크 대 인도네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주심 (이라크 vs 뉴질랜드)]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이라크와 뉴질랜드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3년 3월 24일,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이라크 대 뉴질랜드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4

[1974년 FIFA 월드컵 예비 심판 후보 추천]

197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부문 예비 심판 후보로 추천되며 국제 축구계에서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1974년 3월 16일 197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부문 예비 심판 후보로 추천되어 그의 심판 능력과 국제적 위상을 증명했습니다.

[월드컵 심판 강습회 파견]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월드컵 심판 강습회'에 파견되어 심판 전문성을 강화했습니다.

1974년 5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월드컵 심판 강습회'에 파견되어 최신 심판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197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심판 선정]

1974년 아시안 게임 축구 분야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어 다시 한번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974년 7월 16일 1974년 아시안 게임의 축구 분야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어 국제 경기 심판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1974년 아시안 게임 주심]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이스라엘과 말레이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4년 9월 3일,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 이스라엘 대 말레이시아 경기의 주심을 담당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 1급 심판 승격]

대한축구협회의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서 최고 등급인 1급 심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74년 12월 24일 대한축구협회에서 지정한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 따라 1급 심판에 포함되어 그의 뛰어난 심판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75

[자카르타 기념대회 결승전 주심]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결승전에서 미얀마(버마)와 말레이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5년 6월 18일,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결승전에서 미얀마(버마) 대 말레이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자카르타 기념대회 판정 논란 및 국제 심판 재선임]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결승전 주심 중 판정 논란이 발생했으나, 이후 국제 심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1975년 7월 15일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결승전에서 주심을 맡았으나 판정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로 인해 심판위원회에서 국제 심판 추천이 보류되었으나, 결국 대한축구협회의 개입으로 국제 심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심판 폭행 사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주심 중 판정에 불복한 선수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1975년 7월 21일 한양대학교와 상업은행 축구단 간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경기 주심을 맡았으나, 판정에 불복한 일부 상업은행 선수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관련 코치와 선수들이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축구지도자 강습회 재참여]

대한축구협회 주최 '축구지도자 강습회' 강사로 다시 참여하여 축구 교육에 기여했습니다.

1975년 12월 19일 대한축구협회에서 개최한 '축구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 다시 참여하여 축구 전문가 양성에 힘썼습니다.

1976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심판 배정]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2조 심판으로 배정받으며 올림픽 관련 국제 대회를 경험했습니다.

1976년 1월 15일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2조의 심판으로 배정받아 국제 심판으로서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확대했습니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심판 배정]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되어 아시아 지역의 중요한 국제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1976년 7월 10일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아 활발한 국제 심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7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심판 선임]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1조의 심판으로 선임되어 월드컵 예선이라는 중요한 국제 경기를 담당했습니다.

1977년 1월 15일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1조의 심판으로 선임되며 그의 국제적 심판 역량이 인정받았습니다.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주심 (홍콩 vs 태국)]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홍콩과 태국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7년 3월 5일,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홍콩 대 태국 경기의 주심을 담당했습니다.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주심 (싱가포르 vs 인도네시아)]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7년 3월 9일,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싱가포르 대 인도네시아 경기의 주심을 담당했습니다.

[국제 심판 제외 및 재선임 논란]

규정 미달로 국제 심판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의 압력으로 재추천되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1977년 7월 8일 '심판 태만 및 실적 미달' 사유로 심판위원회의 국제 심판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 측의 압력으로 각서 및 공개 사과를 조건으로 다시 국제 심판 명단에 오르면서 국제 심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78

[대한축구협회 차기 회장 추천]

대한축구협회 회장직 사임 후임으로 박준홍을 추천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1978년 8월 8일 다른 전형위원들과 함께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직에서 사임한 김윤하의 후임으로 박준홍을 추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주심]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쿠웨이트와 북예멘 경기의 주심을 맡았습니다.

1978년 10월 9일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쿠웨이트와 북예멘과의 경기를 포함한 여러 경기의 주심을 맡으며 활발한 국제 심판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1982

[머라이언컵 대한민국 대표팀 단장]

머라이언컵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습니다.

1982년 10월 19일 머라이언컵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아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호주 대표 앨런 데이비드슨과 협의하여 오석재 선수에게 사우스 멜버른 FC 이적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1983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심판 추천 논란]

아시아 축구 협회 심판위원 자격으로 이도하 심판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추천했으나, 선정 과정 논란으로 취소되었습니다.

1983년 4월 15일 아시아 축구 협회 심판위원회의 동북아시아 지역 담당 자격으로 198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이도하 심판을 추천했으나, 대한축구협회 내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으로 초청 자체가 취소되면서 대한축구협회가 비판받았습니다.

[198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 서울 유치 활동]

1984년 하계 올림픽 축구 2차 예선을 서울에서 유치하기 위해 파견되어 국제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983년 10월 28일 1984년 하계 올림픽 축구 2차 예선을 서울특별시에 유치하기 위해 파견되어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1984

[월드컵 예선 경기 일정 변경 문제 적발]

대한축구협회 감사로 활동하며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일정 변경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적발했습니다.

1984년 11월 2일 대한축구협회의 감사로 활동하며 말레이시아 측의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일정 연기 요청이 이사회의 논의 없이 사무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적발하고 언론에 알렸습니다.

1985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 선임]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 축구의 국제 관계를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1985년 1월 24일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으로 선임되며 한국 축구의 국제 교류 및 협력 증진에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의 요청으로 박종환 감독에게 알나스르 감독직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대표팀 해외 출국 동행 및 외유성 출장 지적]

섭외 담당자로 국가대표팀의 해외 출국에 동행했으나, 외유성 출장이 잦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5년 2월 21일 섭외담당자로도 활동하며 국가대표팀의 해외 출국에 동행했으나, 잦은 해외 출장이 '외유성'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5년 AFC U-17 축구 선수권 대회 단장]

1985년 AFC U-17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유소년 축구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85년 3월 15일 1985년 AFC U-17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어린 선수들을 이끌었습니다.

1986

[AFC 상벌위원장 활동]

아시아 축구 연맹 상벌위원장 자격으로 상벌위원회에 참석하여 아시아 축구 질서 확립에 기여했습니다.

1986년 12월 12일 아시아 축구 연맹의 상벌위원장 자격으로 상벌위원회에 참석하여 공정한 경기 운영과 규정 준수를 위한 논의에 참여했습니다.

[1986년 FIFA 월드컵 수익금 전용 사실 폭로]

1986년 FIFA 월드컵 수익금이 부당하게 전용된 사실을 밝혀내 언론에 알렸습니다.

1986년 12월 18일 1986년 FIFA 월드컵의 수익금이 전용된 사실을 밝혀낸 뒤 언론에 알리며 투명성을 요구했습니다.

1987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 유임]

최순영 체제와 이후 이종환 과도 체제에서도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으로 유임되었습니다.

1987년 1월 31일 출범한 최순영 체제의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의 국제위원장으로 유임되었으며, 최순영 사퇴 후 이종환 과도 체제에서도 계속 국제위원장을 맡아 한국 축구 국제 업무의 연속성을 유지했습니다.

1988

[김우중 체제 국제위원장 활동]

새로 취임한 김우중 회장 산하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에서도 국제위원장으로 활약했습니다.

1988년 2월 16일 새로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김우중 산하 집행부에서도 국제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다이너스티컵 창설 기여]

한중일 축구 협회 관계자들과의 공조로 동아시아 국가 간의 중요한 국제 대회인 다이너스티컵 창설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8년 6월 14일 한중일 축구 협회 관계자들과의 공조를 통해 동아시아 축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다이너스티컵 창설에 일조했습니다.

1989

[부산광역시축구협회 회장 취임]

부산광역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1992년까지 지역 축구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1989년 1월 10일 부산광역시축구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1992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하며 부산 지역 축구 발전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FIFA 특별표창기장 수여]

10여 년간 20회 이상의 A매치 주심을 본 공로로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특별표창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89년 1월 28일 10여 년 동안 20회 이상의 A매치 주심을 본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 특별표창기장을 수여받으며 그의 뛰어난 심판 경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90

[AFC 상벌위원 출마]

아시아 축구 연맹의 상벌위원에 출마하여 아시아 축구 행정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1990년 아시아 축구 연맹의 상벌위원에 출마하여 아시아 축구계 내에서의 역할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같은 해 열린 AFC 집행위원회 총회에 상벌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AFC 집행위원회 총회 참석]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 상벌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아시아 축구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1990년 10월 15일 열린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 상벌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아시아 축구의 주요 현안을 논의했습니다.

1992

[AFC 집행위원회 총회 참여]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 참여하여 아시아 축구 발전을 위한 논의에 기여했습니다.

1992년에 개최된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도 참여하며 아시아 축구계에서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1993

[아시안 게임 범시민추진위원회 운영위원]

1993년 출범한 '아시안 게임 범시민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을 맡아 아시안 게임 유치에 힘썼습니다.

1993년 8월 5일 출범한 '아시안 게임 범시민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을 맡아 부산 지역에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96

[동아시아 경기 대회 경기전문위원회 위원장]

1997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의 경기전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국제 경기 운영에 전문성을 발휘했습니다.

1996년 5월 23일 1997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의 경기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며 대회 준비 및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02년 FIFA 월드컵 기획단 참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2002년 FIFA 월드컵 기획단' 명단에 포함되어 월드컵 유치 및 준비에 참여했습니다.

1996년 6월 6일 '2002년 FIFA 월드컵 기획단' 명단에 포함되어 한국의 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초기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습니다.

1997

[부산광역시체육회 자문위원 위촉]

부산광역시체육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지역 체육 발전에 조언을 제공했습니다.

1997년 3월 28일 부산광역시체육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부산 지역 스포츠 정책 및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2002

[2002년 월드컵 조추첨 벡스코 유치 기여]

2002년 FIFA 월드컵 조추첨 행사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되도록 국제축구연맹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시행된 조추첨 행사가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국제축구연맹 관계자들을 설득하며 부산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4

[부산시장 보궐선거 간담회 참석]

오거돈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지역 정치 및 스포츠 발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2004년 5월 30일 오거돈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왔을 당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하며 지역 사회와 정치 현안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부산국제청소년축구대회 참가국 협상]

2005년 부산국제청소년축구대회에 일본과 중국 U-20 대표팀 참가를 위한 관계자들과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2004년 9월 21일 2005년 부산국제청소년축구대회에 일본 U-20 대표팀과 중화인민공화국 U-20 대표팀이 참가할지 여부에 대해 관계자들과 협상을 가졌습니다.

2005

[김주원 사망]

2005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부산광역시 영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부산광역시 영락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어 영면했습니다. 그는 한국 축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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