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가 최고 지도자, 정치인, 군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1:38
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남으로 소련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에 입당했으며,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명된 후 1994년 김일성 사망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7.1 경제개혁조치 등 개혁 시도를 병행했습니다. 2011년 사망 후 김정은에게 권력을 승계했으며, 집권 기간 중 핵무기 개발, 대남 도발 등으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문학과 영화에 깊은 조예를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41
[소련에서 김정일 출생]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구 하마탄 남야영)에서 출생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1942년 백두산 밀영 출생을 주장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김일성 출생년도와의 주기 맞춤을 위한 조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생 당시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의 하바롭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북한에서는 1942년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지만, 이는 김일성 출생년도 1912년과의 30년 주기를 맞추기 위한 조작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당시 김일성 일가는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에 수용되어 있었으며, 김정일은 이곳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이라는 이름으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 부근의 2층 빨간벽돌집이 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관광 코스로 남아있습니다.
1942
[김일성 일가, 뱌츠코예로 이주]
김일성 일가가 소련 극동전선군 제88 독립보병여단 창설에 따라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으로 이주했습니다. 뱌츠코예는 김정일이 유년기를 보낸 중요한 장소 중 하나가 됩니다.
1942년 7월 중순, 김일성 일가는 소련 극동전선군 제88 독립보병여단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남야영(라즈돌노예)에서 하바롭스크 인근의 뱌츠코예 마을 북야영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은 김정일이 출생한 곳은 아니지만, 그의 유년기를 보낸 주요 거점이 되었습니다. 주보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 동지가 7월 19일 보로실로프에서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뱌츠코예 마을 본 숙소에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1945
[광복 후 북한 귀국]
8.15 광복을 맞아 부모인 김일성, 김정숙과 함께 소련에서 북한으로 귀국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김유라'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했으나, 후에 '김정일'로 개명하게 됩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김정일은 부모 김일성과 김정숙을 따라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에도 얼마 동안은 러시아어 애칭인 '유라'를 따서 '김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했으며,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金正日'로 다시 바꾸게 됩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릅니다.
1948
[남산소학교 입학]
북한에서 평양 시내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하여 교육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발발 시 평양을 떠나 간도로 은신하기도 했습니다.
1948년 김정일은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하며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 전쟁 발발 시에는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했으며,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후 귀환했습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 후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고,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의 유년기 교육 과정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까지 일반 교육 코스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3
[김일성장군님 략전연구소조 조직]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한 후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이는 그의 초기 정치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53년 2월 10일, 김정일은 6.25 전쟁 후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했으며, 성적은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1960
[김일성종합대학 입학]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4년 4월까지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젊은 시절 음악, 농업, 자동차 수리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독서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양한 전문 기술 분야의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1960년 9월, 김정일은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한 직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1964년 4월에 졸업할 때까지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고 야외 연구여행을 돕는 등 적극적인 학생 생활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의 관심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으며,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비롯해 기계공학, 농학, 축산학, 사회과학, 문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탐독했습니다.
1961
[조선로동당 정식 입당]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학생당원 신분으로 아버지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 지도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공식적인 정치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입당 초기에는 학생당원 신분이었지만,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의 그림자 아래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는 등 초기부터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조선로동당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습니다.
1964
[조직지도부 지도원 임명]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당 중앙위원회 위원, 비서 등 주요 직책을 거치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습니다.
1964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같은 해 6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당내 경력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직책이었습니다. 이후 1969년 9월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고,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당내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1972년 10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에는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로, 1974년 2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며 권력의 핵심으로 빠르게 부상했습니다.
1973
[3대혁명 소조운동 주도 및 정적 숙청]
천리마 운동에 이어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하고 직접 지도했습니다. 또한 인민대학습당 부지 사저 사건을 파헤쳐 김성애 측근을 숙청하며 김평일을 후계 구도에서 배제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1973년부터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하고 직접 지도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 건설을 위해 확보한 부지에 계모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이 사저를 짓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정일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여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대외적으로도 알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김일성은 김성갑을 숙청했으며, 김성애와의 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김정일은 이 기회를 통해 김평일을 포함한 김성애 가문 구성원들의 비리를 폭로하며 그들을 후계 구도에서 영구히 배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정되는 데 결정적인 공훈이 되었습니다.
1980
[조선로동당 공식 후계자 확정]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며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 지위를 확정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는 김정일의 정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며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를 그가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지정된 시점으로 보는 관측도 많습니다. 또한, 김정일은 이 당대회를 통해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북한 주민들에게 후계자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1981
[남포갑문 개발 사업 착공]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착공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그의 주요 치적으로 선전되었지만, 실제로는 부실 시공과 경제적 비효율성 등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1981년, 김정일은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남포특별시 서쪽 15km에 위치한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착공했습니다. 초기 목표는 3년 내 완공이었으나, 난공사와 낮은 토목공사 기술 수준으로 인해 두 차례 연기 끝에 1986년에야 겨우 완성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내세웠지만, 부실 시공으로 인한 누수와 틈 발생, 갑문 황폐화 등의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또한, 갑문 건설로 인한 간척지 편익보다 대동강 유역 기후 변화로 농업 및 어업 생산량이 감소하는 등 경제적 비효율성이 지적되었습니다. 고위층 탈북자 증언에 따르면 이는 경제적 편익보다 정치적 선전을 우선한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1991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 승계]
당 중앙위 5기 19차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이 40년간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공식적으로 승계받으며 군사 부문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991년 12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1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40년 동안 유지해온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승계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당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넘어 군사 부문의 최고 권력까지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992년 4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 1993년 4월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의 국방위원회 위원장 겸임 조항이 삭제되면서 국방위원장직까지 넘겨받아 군과 국가 안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1994
[김일성 사망 후 최고 지도자 집권]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며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며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자신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했습니다.
1994년 7월 8일,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맞이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며 국가주석직을 사실상 폐지하고, 3년간의 유훈통치를 선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자신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개정하여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1997
[조선로동당 총비서 선출]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며 당의 최고직책에 올랐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년 10월,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면서 당의 최고 직책에 올랐습니다. 이는 김일성 사망 이후 그가 실질적인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권력을 행사해오던 기간에, 당내에서도 명실상부한 최고 수장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그는 군사, 행정, 당의 모든 최고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는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다시 당 총비서에 선임되었습니다.
1999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추진]
경제의 국난 극복을 위해 3차례에 걸쳐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며, 특히 전자공학, 화학공학, 생명공학 위주로 반도체 개발 및 소프트웨어 육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김정일은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공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3차례에 걸쳐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전자공학, 화학공학, 생명공학 분야에 주력했으며, 반도체 개발과 소프트웨어 육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99년에는 주사전자현미경 개발과 광학식 패턴 발생기에서 사선 패턴 노광기술 확립, 알루미늄 배선 기술을 확립한 CMOS 개발 등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독립채산제 도입과 더불어 리소그래피 장비 및 반도체 재료 도입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2000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 개최]
평양에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역사적인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남북 긴장 완화와 교류 활성화의 시금석을 마련했습니다.
2000년 6월 15일, 김정일은 평양에서 당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이 회담의 결과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이는 분단 52년 만에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단이 동시 입장하는 등 교류가 확대되었으며,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입니다.
2002
[7.1 경제개혁조치 실시]
선군경제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했습니다. 이 조치는 계획 메커니즘과 시장 메커니즘을 동시에 수립하여 기업소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시장 기능을 일부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2002년 7월 1일, 김정일은 선군경제노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7.1 경제개혁조치'를 실시했습니다. 이 조치는 계획작성, 가격제정, 자재 공급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전략적 중요 지표 외의 계획은 기업소에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지방 공업 생산품의 가격은 공장 자체 결정이 가능해졌고, 생산물의 일부를 자재용 물자 교류에 사용하거나 사회주의 물자 교류 시장을 허용했습니다. 번수입 지표에 계획 외 수입을 인정하고, 기업소에 소규모 설비 이관 및 폐기 권한을 부여하는 등 유휴 설비 이용률 제고를 도모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업은 노동력을 절약하고 다른 활동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 납부금을 단순화하고 기업이득금을 유동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등 경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004
[룡천 열차 폭발 사건 발생]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대형 폭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김정일의 전용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하여 그에 대한 암살 기도라는 강력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위키리크스 공개 문서에서 그 자신도 이를 암살 시도로 믿었다는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대형 폭발 사건이 발생하여 150여 명이 사망하고 1,30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 이 폭발 사건은 김정일의 전용열차가 룡천역을 통과하기 불과 30분 전에 발생하여, 그에 대한 암살 기도라는 강력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2009년 2월 26일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 전문)에 따르면,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이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 폭발 사건 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으며, 김정일 자신이 열차 통과 시간이 휴대폰을 통해 전해져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고, 이 사건으로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늦춰졌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07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 개최]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습니다. 10월 4일까지 진행된 회담 결과, 남북간 신뢰 구축과 협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10·4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김정일은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이 회담의 공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었으며, 회담의 결과로 남북간 신뢰 구축과 협력 강화를 주요 목표로 하는 '10·4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 시 서울 답방을 약속했으나, 실제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회담은 남북 관계의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외교적 사건이었습니다.
2008
[건강 이상설 증폭 및 뇌졸중 발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불참하며 건강 이상설이 급증했습니다. 이후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80일 만에 공식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2008년 9월 9일, 북한 최대 명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김정일이 참가하지 않으면서 그의 건강 이상설이 증폭되었습니다.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건강 문제가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 총리 아소 다로는 김정일의 입원 사실을 전하며 상황이 좋지 않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 생활을 벗어나 공식 활동을 재개했고, 2009년 3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서는 수척해진 모습이 공개되어 건강 이상설에 더욱 힘이 실렸습니다.
2009
[헌법 개정으로 국가원수 취임]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여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국방위원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던 체제를 공식화한 것입니다.
2009년 4월 9일, 김정일은 헌법을 개정하여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1994년 아버지 김일성 사망 후 '유훈통치'를 선포하고 국방위원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해오던 체제를 법적으로 공고히 한 조치였습니다.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던 이전 체제를 벗어나, 자신이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헌법적으로 확립했습니다.
2010
[화폐개혁 실패 및 당 최고직책 연임]
경제난 극복을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 북한 주민들의 생활에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연임했습니다.
2010년, 김정일은 경제난 극복을 목표로 화폐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패로 평가받으며, 오히려 물가 폭등과 혼란을 야기하여 북한 주민들의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습니다. 같은 해,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 당의 핵심 직책들을 다시 맡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재확인했습니다. 이 시기에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소개하며 후계 구도를 공식화하는 작업도 병행되었습니다.
[5.26 지시 하달, 시장경제 재허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주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 포기 내용을 담은 '5.26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이 지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 복원 시도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 경제를 전면 재허용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난 2010년 5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 사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지시문을 전국에 하달했습니다. 이른바 '5.26 지시'로 불리는 이 문건은 당분간 국가 차원의 식량 해결이 어려우니 로동당, 내각, 국가 보위부 등이 부문별로 자력갱생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급진적으로 추진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 복원 시도의 실패를 시인하고 시장 경제를 전면 재허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종합시장을 옥죄던 모든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고, 장사 24시간 허용, 금지 품목 제한 철폐, 시장 나이 제한 해제 등 파격적인 조치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개인 무역 거래 재허용과 무역 수익금의 일부를 개인이 합법적으로 갖는 것을 보장하는 조치도 강구되었습니다. 이는 시장 통제 정책의 실패를 당국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2011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 안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이틀 뒤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김정일은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 안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사실은 이틀 동안 극비에 부쳐졌다가,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의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고, 12월 28일 평양시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다음 날인 29일에는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습니다. 김정일의 사망은 김정은에게로의 권력 승계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2012
[조선인민군 대원수 칭호 추서]
사망 이후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 칭호에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김일성 주석과 같은 최고 계급으로, 그의 사후 권위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 후, 그의 71회 생일인 2012년 2월 16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 칭호에 추서되었습니다. 대원수는 조선인민군의 최고 군사 계급으로,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가지고 있던 칭호와 동일합니다. 이는 김정일의 사후 권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김정은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적 조치였습니다. 그는 생전에는 '공화국 원수'라는 별도의 계급으로 다른 원수들과 차별화되었으나, 사후에는 '대원수'로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