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가)

소설가, 수필가, 시인,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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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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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유정은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고향의 순박한 정서와 농민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명작을 남기며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비애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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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소설가 김유정의 탄생]

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에서 토박이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잠시 유아기를 한성부 종로방 돈녕계 운니동에서 보냈습니다.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에 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성부 종로방 돈녕계 니동(현 운니동) 토박이 집안의 후손이며, 유아기 일부를 한성부 운니동에서 보냈습니다.

1915

[어머니 청송 심씨의 사망]

만 일곱 살이 되던 해, 김유정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던 어머니 청송 심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유정이 만 일곱 살이 되던 1915년 3월 18일, 김유정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던 어머니 청송 심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17

[아버지 김춘식의 사망]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아버지 김춘식 또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917년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또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김유정은 형 김유근 씨가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되었으나, 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고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923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만 12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에 검정으로 입학했으며, 잠시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만 12세에 강원도 춘천의 에울입월초등학교를 졸업한 김유정은 1923년 4월 9일에 경성휘문고등보통학교(5년제)에 검정으로 입학했습니다.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그는 이름을 잠시 김나이(金羅伊)로 바꾸었다가 3학년 때 다시 본래 이름으로 되돌렸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야구, 축구, 스케이팅, 권투, 유도 등 다양한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등 다채로운 취미 활동을 즐겼습니다.

1928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및 경제적 어려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형 김유근이 서울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고향으로 낙향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21세 때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김유정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형 김유근은 서울에서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했습니다. 형으로부터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은 삼촌집과 누나, 형수의 집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21세 때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또한 휘문고보 재학 시절부터 치질을 앓기 시작했으며, 이후 늑막염과 폐결핵 등 여러 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1930

[고향에서의 농촌계몽운동 시작]

형과의 재산 분배 소송을 위해 고향 춘천으로 낙향했으나, 그곳에서 농민들의 삶을 체험하고 농우회와 금병의숙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김유정은 매형의 부추김을 받아 형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해 고향 춘천으로 낙향했습니다. 그러나 춘천에서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여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농우회는 후에 '금병의숙'이라는 이름으로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경성연희전문학교 중퇴]

휘문고보 졸업 이듬해 경성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두 달 만에 제적당하며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0년 4월 6일, 김유정은 경성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인 6월 24일에 학교에서 제적당하며 중퇴했습니다. 제적 사유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대체로 수업 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됩니다.

1931

[보성전문학교 퇴학과 광업소 경험]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다시 상경하여 경성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퇴학했고, 충청도의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일하며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1931년 다시 상경한 김유정은 경성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도 곧 퇴학했습니다. 첫째 매형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 광부들과 어울려 술만 먹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1932

[첫 작품 〈심청〉 탈고]

고향 실레마을에 머무는 동안, 김유정은 자신의 첫 작품인 단편 소설 〈심청〉을 탈고했습니다. 이 작품은 4년 뒤에야 발표되었습니다.

김유정은 고향 실레마을에서 1년 7개월을 머무는 동안인 1932년 6월 15일에 자신의 첫 작품인 단편 소설 〈심청〉을 탈고했습니다. 이 작품은 4년 뒤인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발표되었습니다.

1933

[서울 재상경과 폐결핵 진단]

형과의 재산 분배 끝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으나, 늑막염이 악화되어 폐결핵 진단을 받으며 건강이 크게 나빠졌습니다.

형 김유근이 고향 춘천에서 가산을 정리한 뒤, 김유정은 '청산된 금액의 1/30'만큼의 돈을 얻어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늑막염이 악화된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폐결핵 진단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장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누나의 히스테리와 누나에게 얹혀 사는 매형에 대한 미움이 겹치며 그의 문학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1934

[초기 단편소설 발표]

『제일선』에 〈산골 나그네〉를 발표하고,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미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인 1934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 등단]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낙비〉가 1등으로, 『조선중앙일보』에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며 비로소 문단에 정식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1934년 말에 김유정은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으로,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문학 인생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1935

[대표작 발표와 구인회 가입]

등단한 해에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등 다수의 대표작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고, 구인회에 가입하여 문학적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문단에 등단한 1935년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애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했습니다. 〈금 따는 콩밭〉, 〈금〉, 〈떡〉, 〈만무방〉, 〈산골〉, 〈솟〉, 〈봄봄〉, 〈안해〉 등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 해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리고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습니다. 또한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하여 이상 등 당대 문인들과 교류했습니다.

[박봉자에게 구애 편지를 보냈으나 실패]

잡지에 실린 박봉자의 글을 읽고 그녀에게 31통에 달하는 구애 편지를 보냈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어 다시 한번 좌절을 겪었습니다.

김유정은 《여성》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의 글을 읽게 된 뒤,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 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가 약혼했으며 곧바로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되어 큰 좌절을 겪었습니다.

1936

[단편소설 〈심청〉 발표]

1932년에 탈고했던 그의 첫 작품인 단편 소설 〈심청〉이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마침내 발표되었습니다.

1932년 6월 15일에 김유정이 탈고했던 첫 작품인 단편 소설 〈심청〉이 4년 뒤인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발표되었습니다.

[폐결핵 악화와 요양]

가을부터 겨울까지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고통받았고, 결국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매형의 집으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193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고생했습니다. 결국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다섯째 매형 유세준의 집으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그는 조카 김진수를 데리고 갈 정도로 조카에 대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1937

[최후의 편지 〈필승전〉 작성]

병세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필승전〉을 통해 삶과 창작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1937년 3월 18일, 김유정은 방 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습니다.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유정은 날로 쇠약해지는 몸에도 불구하고 돈을 구해 병을 치료하고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삶과 창작에 대한 의지를 최후의 순간까지도 놓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소설가 김유정의 요절]

만 29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인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서울 홍제동 화장터로 옮겨져 화장되었습니다.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 김유정은 폐결핵으로 인해 만 29세의 나이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가족에 의해 광주에서 서울 서대문 밖의 홍제동 화장터(현재의 서울고은초등학교 부지)로 옮겨져 화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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