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성 (1890년)
정치인, 언론인, 만화가, 국회의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0:05
대한민국 초창기 언론인이자 정치인, 만화가인 김동성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한국 최초의 4칸 만화를 발표하고 '만화'라는 용어를 정립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초대 공보처장, 제2대 국회의원, 국회 부의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1890
1890년 경기도 개성에서 부유한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구한말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고, 어린 시절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15
개성 한영 서원 설립에 참여한 후, 191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오하이오주립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만화에 영향을 받아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0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언론인이 되었으며,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 작가, 만화가로 활동했습니다.
[한국 최초 4칸 만화 발표]
동아일보에 '그림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4칸 만화를 발표하며 한국 만화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에 ‘그림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4칸 만화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한국 만화의 초창기 선구자적 역할로 평가됩니다.
1923
[태평양 군축 회의 참관 및 임정 취재]
비밀리에 태평양 군축 회의를 참관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 등을 취재하여 국내에 그 동향을 알렸습니다.
1923년에 이승만, 정한경 등이 조선인 대표로 태평양 군축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는 비밀리에 이 회의를 참관했습니다. 또한 비밀리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및 이승만 등을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국내에 임정의 입장을 소개했습니다.
['만화' 용어 및 이론 정립]
《동명》에 〈만화 그리는 법〉을 발표하며 만화 창작 이론의 효시를 세우고 '만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1923년 2월 《동명》에 〈만화 그리는 법〉을 발표하여 만화 창작 이론의 효시가 되었고, 이와 함께 '만화'라는 용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24
1924년 9월, 조선일보 이사로 취임했습니다.
['멍텅구리 헛물켜기' 기획]
《조선일보》에 노수현 화백의 〈멍텅구리 헛물켜기〉 연재를 기획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습니다.
1924년 10월 13일부터 《조선일보》 3면에 노수현이 연재한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기획했습니다.
1930
1930년 4월 잡지 《학생》에 5회에 걸쳐 〈만화 입문〉이라는 만화 강좌를 연재했습니다.
1945
1945년 9월부터 경기도 미군정의 민정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습니다.
1948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임명]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초대 공보처장 역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공보처장을 역임하며 국가 홍보 및 언론 정책을 총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1948년 8월부터 1949년 6월까지 초대 공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공보처장이던 1948년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정한경, 김양천 비서, 이정순 공보국장과 함께 수행했습니다.
[유엔 총회 대한민국 대표단 참여]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대표단 일원으로 참여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대표단들(조병옥 박사, 모윤숙 여사, 장면 박사 등) 중 한 명으로 참여했습니다.
1950
[제5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단 참석]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임병직, 장면, 장택상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195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연합 총회에 임병직(단장), 장면, 장택상, 임영신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1950년 4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경기도 개성시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습니다. 이로써 1950년 5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1952
1952년에 친이승만계 정당인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1952년 5월부터 6월까지 국회 민의원 부의장을 역임했습니다.
1953
1953년 6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습니다. 이때 신익희 등 일부가 뉴델리에 일시 체류했지만, 그는 체류하지 않고 영국으로 도착했습니다.
1960
1960년 10월 18일부터 1961년 6월 10일까지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나, 1961년의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사퇴했습니다.
1969
1969년 8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선영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