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조선)

국왕, 조선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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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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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조선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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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으로, 인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갔으며, 형 소현세자 급사 후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북벌론을 추진하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는 등 민생 안정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김홍욱 장살 사건 등으로 정치적 논란을 겪기도 했으며,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여 예송 논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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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

[효종 이호 출생]

인조와 인열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능양군 시절 왕자로 책봉된다.

조선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본궁에서 인조(능양군)와 인열왕후(군부인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3

[인조 즉위 및 왕자 책봉]

아버지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면서 효종이 왕자로 책봉되었다.

인조 반정으로 아버지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자, 효종은 왕자로 책봉되었다.

1626

[봉림대군 책봉]

왕자로 책봉된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봉해졌다.

왕자로 책봉된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봉해졌다.

1627

[소무원종공신 책록]

이인거의 난 진압 후 특별히 소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인거의 난이 진압되자 봉림대군(효종)은 특별히 소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28

[영사원종공신 책록]

유효립의 역모 적발 후 영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유효립의 역모를 적발하고 영사공신을 책봉할 때 봉림대군(효종) 역시 영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31

[인선왕후와 혼인]

장유의 딸 풍안부부인 장씨(후일 인선왕후)와 혼인하였다.

장유의 딸인 풍안부부인 장씨(훗날 인선왕후)와 이현궁에서 길례(혼인식)를 거행하였다.

1635

[송시열, 윤선도에게 수학]

인조의 명으로 송시열과 윤선도 등이 대군사부에 임명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인조의 명으로 송시열과 윤선도 등이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어 이들을 가르쳤다.

1636

[병자호란 발발 및 강화도 피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림대군(효종)은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다.

1637

[청나라 볼모 생활]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선양에 머물렀다.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가 정축하성을 결행,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삼전도의 굴욕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후 형인 소현세자 및 강경 주전론자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선양에 머물렀다. 봉림대군(효종)은 인질 생활 내내 복수심과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다짐했다.

1645

[소현세자 급사]

청나라에서 먼저 귀국했던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었다.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었다. 이 사건은 효종의 세자 책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볼모에서 귀국]

소현세자가 급사한 후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소현세자가 1645년 4월에 급사하자 봉림대군(효종)은 5월에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왕세자 책봉]

형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세자로 책봉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당시 대다수의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윤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7

[대리청정 시작]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다.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하였으며, 이는 그가 국정을 미리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1649

[인조 승하]

부왕 인조가 승하하였다.

인조가 승하하여, 효종의 즉위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조선 제17대 국왕 즉위]

인조의 뒤를 이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며 조선의 제17대 국왕이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고, 즉위 직후 인조 반정 공신들과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하는 등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1651

[도르곤 사망 및 친청파 숙청]

조선에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을 계기로 친청파 김자점 등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북벌 계획을 본격화했다.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조귀인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1652

[군비 강화 및 대동법 확대]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하고,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이완, 유혁연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에 힘썼으며,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다. 경제 재건을 위해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1653

[대동법 전라도 산군 지역 확대]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전라도 산군 지역으로 대동법 실시를 확대하였다.

부세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대동법의 실시지역을 확대하여 전라도 산군 지역에서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1654

[시헌력 도입 및 인조실록 편찬]

서양 천문학 기반의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인조실록》을 편찬했다.

개정된 역법인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헌력은 서양의 천문학을 토대로 제정한 청나라의 역법이다. 또한 《인조실록》을 편찬하고 간행했으며, 유명무실했던 영장제를 강화하여 지방 군사력 약화를 시정했다.

[경안군 석방 상소 논란]

김홍욱과 홍우원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홍욱과 홍우원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상소를 문제 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특별히 해를 입히지 않았다.

1655

[김홍욱 장살 사건 발생]

황해감사 김홍욱이 소현세자빈 강씨 옥사의 무고를 주장하다 효종의 친국 끝에 장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효종의 정통성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김홍욱은 황해감사로 재직 중,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여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했다. 효종은 이를 문제 삼아 그를 국문했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김육 등 많은 신하가 김홍욱의 사면을 청했으나, 효종은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하여 김홍욱을 장살로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조야에서 나타났다.

[상평통보 주조 및 유통]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 유통에 반대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1656

[군사력 강화 및 사회 윤리 재정립]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게 하고, 〈내훈〉과 〈경민편〉을 간행·보급하여 흐트러진 사회 윤리 재정립을 시도했다.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또한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과 김정국이 지은 〈경민편〉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했다.

1657

[대동법 전라도 연해안 확대 및 실록 개편]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고,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여 부세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하여 역사 기록을 재정비했다.

1659

[갑작스러운 승하]

과로로 인해 어의 신가귀의 진료를 받던 중 침을 잘못 놓아 과다출혈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예송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

5월 초부터 과로로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의 신가귀의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신가귀가 침을 잘못 놓아 과다출혈이 발생, 당일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효종의 사망 당시 계모인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생존해 있었는데,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두고 예송 논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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