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역사, 도시, 수도, 행정 구역

num_of_likes 75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7:33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역사, 도시, 수도, 행정 구역
report
Edit

한성부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1394년 지정되었습니다. 궁궐과 성곽 등 유교 이념을 반영한 도시 계획으로 건설되었으며, 오부 등 세분화된 행정 구역을 가졌습니다. 임진왜란 등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복구되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전차, 전기 등 근대 문물을 최초로 도입하며 동아시아 최초의 현대식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1910년 경성부로 개칭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392

[조선 건국과 천도 결심]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조선왕조를 세우고,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높이고자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개경의 기존 세력에 대한 정치적 불안감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민심 쇄신 등이 천도의 주요 배경이었습니다.

1392년,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면모를 다지고 인심을 쇄신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감, 심리적 갈등, 풍수지리설의 영향, 그리고 민심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무학국사와 하륜 등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한양으로 도읍지를 최종 결정했습니다.

1394

[한양 천도와 신도시 계획 시작]

새로운 수도 한양으로 천도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수도의 도시 계획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양'이라는 이름은 '한수(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394년 11월 21일 (음력 10월 28일), 조선의 수도가 한양으로 천도되었습니다. 천도에 앞서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어 새로운 수도의 도시 계획이 구상되기 시작했습니다. 한양은 '한수(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을 가지며,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한강을 이용한 편리한 조운(漕運)을 고려한 결정이었습니다.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의지로 천도가 단행되었습니다.

1395

['한성부' 개칭과 도시 건설 착수]

새로운 수도의 이름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공식적으로 변경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 원칙에 따라 도시 건설을 시작하고, 9월에는 한성을 둘러싼 성곽과 문루를 완성했습니다.

1395년 6월 6일, 기존의 '한양부'라는 명칭이 '한성부'로 공식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동시에 태조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 도읍 건설을 본격화했습니다. 가장 먼저 사직과 종묘를 완공하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를 배치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약 17km 길이의 성벽과 문루가 완성되어 한성은 견고한 성곽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398

[왕자의 난 이후 개경으로 잠시 천도]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정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혼란 속에 수도를 개경으로 잠시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치였습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정종이 즉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성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잠시 옮기는 일이 있었으나, 2년 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성으로 환도하게 됩니다. 태종은 하륜의 무악천도론을 동전 점으로 물리치고 한성을 고수했습니다.

1428

[한성부 인구 약 10만 명 기록]

조선 초 한성부의 인구가 약 10만 3천여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중 도성 안에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으며, 도성 밖 10리 지역에는 소수의 인구만이 거주했습니다.

세종 10년인 1428년에 한성부의 총 인구는 10만 3,328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 중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의 인구는 불과 6,044명에 불과하여, 대부분의 인구가 도성 안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성 밖에는 서대문, 서소문, 동대문, 남부 등에 6개의 방만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461

[성저십리, 한성부 공식 관할 구역 편입]

인구 증가로 인해 도성 내 모든 인구를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성곽으로부터 사방 10리 바깥 지역인 '성저십리'가 공식적으로 한성부의 관할 구역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한성부의 영역이 확장되었습니다.

도성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성내에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1461년 2월 27일, 성곽으로부터 십 리 바깥까지의 지역을 칭하던 '성저십리'가 공식적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되었고, 한성부의 행정 영역이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발발, 한성부에 큰 피해]

선조 재위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성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들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으로 또다시 피해를 입었습니다.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한성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경복궁 등 주요 궁궐과 도시 시설들이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는 한성부의 역사에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후 1636년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한성부는 다시 한번 피해를 입는 등 도시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피해는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 전면 복구되었습니다.

1865

[한성부 행정구역 개편]

고종 2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동부에 경모궁방이 신설되고 총 47방이 되었습니다. 계(契)의 수도 11개 증가하여 339개가 되면서 도시의 행정 체계가 재정비되었습니다.

1865년(고종 2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면서 전체 방의 수가 47방으로 늘어났고, 계(契)의 수도 11개 증가하여 총 339개가 되었습니다. 이는 변화하는 도시 상황에 맞춰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876

[개항 이후 한성부의 근대화 시작]

1876년 개항 이후 한성부는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새로운 문명 시설이 도입되고 현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풍경과 생활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한성부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외국인에게 문호가 개방되고 새로운 문명 시설들이 도입되면서 도시의 모습과 생활 방식이 점차 현대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898년 이후 전차, 전기 등 다양한 근대 문물이 도입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895

[한성부, 23부 개편으로 지방행정구역화]

고종이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행정 개혁을 단행하면서 한성부가 일시적으로 지방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개편은 1년 만에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1895년 5월 26일, 고종은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는 대규모 행정 개편을 실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성부도 일시적으로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으나, 1년 만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원래대로 환원되어 중앙 관청의 지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1896

[환구단 건립과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환구단을 지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이와 함께 덕수궁을 중심으로 도시의 축을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고종은 1896년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이듬해인 1897년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고종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도시의 축을 변화시켜 새로운 수도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습니다.

1898

[동아시아 최초! 한성부에 전차 개통]

한성부는 동아시아에서 전차, 전기,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세계 최초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어 근대 교통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898년, 한성부는 동아시아에서 전기, 전차,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최초의 도시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면서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등장했고, 이는 시민들의 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근대적인 병원, 학교, 교회, 신문사 등이 세워지며 도시의 현대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1899

[경인선 개통 및 전화 가설]

한성부와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어 물류 및 인적 이동이 활발해졌고, 전화가 가설되면서 통신 환경도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근대 문물 도입의 상징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1899년, 한성부와 인천을 연결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동시에 전화가 가설되면서 원거리 통신이 가능해져 도시 생활의 편리함이 더해졌습니다. 이러한 기반 시설의 확충은 한성부가 근대 도시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00

[한강가교 준공, 도심 연결성 강화]

한강가교(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한강 남북 지역의 연결성이 강화되었고, 이는 도시의 확장과 물류 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0년, 한강가교(지금의 한강철교 일부)가 준공되어 한강을 사이에 둔 도심과 강남 지역의 연결성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경인선 철도와 연계되어 물류 수송의 효율성을 높이고, 도시의 지리적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1910

[한성부, '경성부'로 개칭되며 역사 속으로]

일제강점기, 총독부령에 따라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에 편입되면서,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성부'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총독부령에 의해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었고 경기도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라는 명칭과 행정구역은 5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의 상징성을 지우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