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헬레니즘 왕국, 고대 이집트 왕국, 제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7:06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집트를 기반으로 세워진 헬레니즘 왕국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파라오의 전통을 수용하며 약 300년간 지배했습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쇠퇴를 거듭하며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였습니다. 최후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과 함께 로마에 합병되며 막을 내렸습니다.
BC 4C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침입 및 알렉산드리아 건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이집트를 침입하여 멤피스를 방문하고 아문 신탁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새로운 그리스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고위직에 임명하여 이집트에 헬레니즘 문화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이집트 샤트라프령을 침입하여 멤피스를 방문하고 시와 오아시스의 아문 신탁소에서 아문의 아들이라는 선포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집트 종교를 존중하여 회유하고, 이집트의 고위직에 마케도니아인들을 임명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그리스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세워 이집트의 부를 페르시아 정복에 사용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및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이집트 통치 시작]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후 그의 부관들 사이에 제국 상속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가까운 전우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되어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제국 상속 문제가 부관들 사이에 불거졌습니다. 처음에는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알렉산드로스의 전우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집트의 사트라프로 임명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명목상 공동 통치자로서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되면서 실질적인 지배자로서의 권력을 확립했습니다.
[가자 전투 승리]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바빌로니아의 지배자 셀레우코스와 동맹하여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퇴하며 이집트의 영토를 확장하고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통치 초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계 국가들 간의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집트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제국 재통합을 시도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에게 맞서는 반동맹에 가담했고, 셀레우코스와 동맹하여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퇴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왕위 즉위 및 왕조 건국]
프톨레마이오스가 왕의 직위를 차지하고 자신을 파라오라 칭하며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이는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31년 페르디카스의 침입으로부터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디아도코이 전쟁 기간 동안 이집트와 주변 지역들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305년에 그는 왕의 직위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소테르'(구원자)라 칭하며 약 300년 가까이 이집트를 통치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웠습니다.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달력으로는 기원전 304년에 건국되었다고도 논쟁하지만, 마케도니아 달력으로는 기원전 305년으로 봅니다.
[이프소스 전투 이후 영토 확장]
안티고노스가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코엘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셀레우코스와의 합의 위반으로, 훗날 시리아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반동맹이 기원전 302년에 안티고노스에 맞서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동맹에 가담했으나, 그와 그의 병력 모두 안티고노스가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할 때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코엘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확보했으며, 이는 셀레우코스에게 해당 지역을 양도하기로 합의한 것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장차 시리아 전쟁의 발발을 예고했습니다.
BC 3C
[세계 7대 불가사의, 파로스 등대 건설]
알렉산드리아의 대항구 입구에 파로스 등대가 건설되었습니다. 추정 높이 140m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혔으며,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의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대항구의 입구에는 기원전 280년경에 세워진 등대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파괴되었지만, 유례없는 높이 (140m 추정)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간주되었습니다. 창문이 달린 망루로서, 꼭대기에는 금속으로 된 쇠바구니와 구원자 제우스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왕국의 최전성기]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누이 베레니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제3차 시리아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심장부까지 진격하고 에게해 함대를 통해 트라키아까지 정복하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힘이 최절정기를 맞이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후원자")는 기원전 246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누이인 셀레우코스의 왕비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이 살해당하자, 다른 마케도니아 제국 후계 국가들과의 전쟁을 피하던 전임자들의 정책을 폐기하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제국과 제3차 시리아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멀리는 바빌로니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의 심장부로 진격했고, 반면 에게해에 있는 그의 함대는 북쪽으로는 멀리 트라키아까지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힘의 최절정기라고 평가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즉위와 왕국의 쇠퇴 시작]
프톨레마이오스 3세 사망 후 유약하고 부패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며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토착 이집트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221년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쇠퇴가 시작된 유약하고 부패한 왕이자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재임은 어머니를 살해하면서 시작되었고, 그는 항상 정권을 통제했던 총신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국내 통치의 약점의 신호는 20년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한 토착 이집트인들의 반란이었습니다.
BC 2C
[파니움 전투 패배와 로마와의 동맹]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파니움 전투에서 패배하여 코엘레 시리아를 상실했습니다. 이 패배 이후 이집트는 지중해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와 동맹을 맺으며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10살이라는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섭정들이 나라를 운영하던 시기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협정을 맺었습니다. 기원전 200년의 파니움 전투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셀레우코스에게 코엘레 시리아를 넘기게 했습니다. 이 패배 후 이집트는 지중해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와 동맹을 맺어 로마의 개입과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 증가를 허용했습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집트 침공]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이집트를 침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폐위시키고 허수아비 왕을 세웠습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약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기원전 180년 이전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사망하고 그의 미성년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가 계승했습니다. 기원전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침입하여 필로메토르를 폐위시켰습니다. 필로메토르의 동생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이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졌고, 안티오코스가 물러나자 형제는 자매 클레오파트라 2세와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했으나 곧 사이가 틀어져 로마의 개입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BC 1C
[클레오파트라 7세의 즉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사망 후, 그의 17살 딸 클레오파트라 7세가 10살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멸망을 앞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마지막 시대를 여는 사건입니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하고 왕국을 그의 10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에게 남겼으며, 그는 누이이자 아내인 17살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동 통치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막대한 부를 공물로 지불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왕국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여왕이자 파라오로서 기원전 51년부터 30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집트 방문과 클레오파트라와의 만남]
로마 내전 중 이집트의 내전이 무역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22세의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그녀의 정치적 재능에 매료되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지원하기로 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곡물 공급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내전이 무역에 나쁜 영향을 미치자, 내전 진압을 위해 기원전 48년에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궁전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22세의 클레오파트라를 만났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지원이 있어야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떨어트려 놓을 수 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이후 로마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고 알렉산드리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전투와 클레오파트라의 권력 강화]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패배하고 나일강에서 사망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혼인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며,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습니다.
로마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고 알렉산드리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익사했습니다(사망 정황 불확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혼인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여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함께 나일강을 여행했고, 이들은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기증식과 로마의 분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에게 타르수스, 키레나이카, 크레타, 키프로스, 이스라엘 등의 영토를 위성국의 왕으로서 할양하는 '알렉산드리아 기증'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는 로마인들의 격렬한 분노를 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망 후 로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지지자들로 나뉘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며 연인이 되고 결혼했습니다(로마 법률상 불인정). 기원전 34년 가을, 타르수스, 키레나이카, 크레타, 키프로스, 이스라엘 모두를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안토니우스의 자녀들에게 위성국의 왕으로서 넘긴 '알렉산드리아 기증'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로마인들을 더욱 화나게 했고, 안토니우스의 유서 내용과 함께 옥타비아누스가 그에 맞서는데 사용되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악티움 해전의 패배]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이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패배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가 낮을 때 재빨리 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의 해군은 악티움에서 격돌했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병력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해군을 패배시켰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라고 주장하기 이전에 1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패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사실상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의 이집트 합병]
클레오파트라 7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이집트를 자신들의 속주('아이깁투스')로 선포했습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통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고위직을 로마인으로 대체하고 곡물 공급처로서 이집트를 관리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 사망 이후인 기원전 30년에 로마 제국은 이집트가 자신들의 속주(아이깁투스)라고 선포했습니다. 로마는 원로원의 간섭을 막기 위해 황제가 선정한 관리에 의해 이집트를 감독하게 했습니다.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주요 관심은 로마 시에 믿을 수 있는 곡물 전달이었으며, 이를 위해 고위직에 있던 그리스인들을 로마인들로 대체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통치 체계는 크게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어는 여전히 행정 언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의 개선식에 끌려가는 것을 거부하며 시녀들과 함께 자살했습니다. 이로써 300년에 가까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와 독립적인 파라오의 이집트는 막을 내렸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잔여 병력을 쉽게 패배시키자,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사망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서 전시될 것을 알고 시녀들과 함께 기원전 30년 8월 12일 자살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코브라 독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 또한 처형당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독립적인 파라오의 이집트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