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드 메디시스

프랑스 왕비, 섭정,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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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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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섭정,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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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을 지냈다. 남편 앙리 2세 사망 후 어린 세 아들의 재위 기간 동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프랑스 왕권을 수호했다. 격화된 종교 전쟁 속에서 국가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나, 결국 사위 앙리 4세의 즉위를 통해 프랑스 절대 왕정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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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

[카트린 드 메디시스 출생 및 부모 사망]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와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딸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직후 부모님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였다.

카트린은 1519년 4월 13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출생 직후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지 14일 만에 흑사병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는 어머니 사망 일주일 만에 매독으로 사망하였다.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와 마들렌 드라 투르의 유일한 자녀로서 메디치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였다.

1521

[교황 레오 10세 사망]

카트린의 종조부인 교황 레오 10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카트린의 후견인 계획이 틀어지고 이모부의 보호 하에 자라게 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카트린을 자신이 손길이 미치는 곳에 두기 위해 로마로 데려왔고, 서자인 이폴리토 데 메디치와 결혼시켜 피렌체를 공동 통치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1521년 교황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카트린은 이모부 스코틀랜드의 알바 공작의 보호 하에 고모할머니 루크레치아의 손에서 자랐다.

1523

[클레멘스 7세 교황 즉위]

카트린의 재종조부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하며 카트린은 리카르디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523년 카트린의 재종조부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했고 카트린은 리카르디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527

[로마 약탈과 피렌체 공화주의자 반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일으킨 코냑동맹전쟁 중 로마가 카를 5세 군대에게 약탈당하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당하며 카트린은 수녀원을 전전하며 피난 생활을 겪었다.

1526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대립 중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황제 카를 5세를 상대로 코냑동맹전쟁을 일으켰다. 이탈리아 반도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황령의 수도 도시 로마는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에게 파괴되었다(로마 약탈). 피렌체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시민 반란이 일어나 피렌체의 통치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일족들이 추방당하였다. 피렌체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카트린은 여러 수녀원으로 피해다니며 많은 질곡을 겪었다.

1529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

코냑동맹전쟁 패배 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밀약을 맺고 피렌체를 침공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되찾았고, 카트린은 안정된 로마로 돌아와 신랑감을 찾기 시작했다.

코냑동맹전쟁에서 패배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와 밀약을 맺고 1529년에 피렌체를 침공하여 공화파를 제거한 후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되찾았다(피렌체 공선전). 안정을 되찾은 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트린을 로마로 데려왔고 카트린의 신랑감 찾아주기에 나섰다.

1533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

프랑수아 1세의 의지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 카트린은 프랑스의 앙리 2세와 마르세유에서 결혼했다. 이때 그녀가 데려간 이탈리아 요리사들과 식사 예절, 문화가 프랑스 요리의 시발점이 되고 궁중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수아 1세는 아들 앙리를 카트린과 결혼시켜 밀라노 공작령을 얻으려 했으나, 클레멘스 7세는 그럴 의향이 없었다. 교황은 카트린과 프랑수아의 둘째 아들 앙리와의 결혼을 결정하고, 1533년 마르세유에서 식을 거행하게 했다. 카트린은 1533년 9월 1일 피렌체를 떠났고 10월 11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대부호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이었으나, 카트린이 결혼할 당시 파산에 가까운 상태로, 그녀가 혼수로 가져간 보석들은 교황청의 소유였으며, 지참금도 끝내 지불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당시 카트린이 데려간 이탈리아의 요리사들과 식사 예절은 이후 미식으로 이름난 프랑스 요리의 시발(始發)이 되었다. 피렌체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면서 익힌 이탈리아의 예술적인 감각과 에티켓, 요리 등은 당시 프랑스 궁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538

[앙리 2세 사생아 출산, 카트린의 불임 논란]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카트린에게 남편 앙리 2세가 사생아 디안 드 프랑스를 얻으면서 자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이 카트린에게 있다는 인식이 퍼져 폐위 문제까지 불거졌다.

카트린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 폐위 문제까지 불거졌다. 1538년 앙리가 필리파 두치(Filippa Duci)라는 이탈리아 여자에게서 사생아 디안 드 프랑스를 얻고 난 다음부터는 자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이 카트린에게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1544

[프랑수아 2세 출산 및 다자녀 출산]

카트린은 1544년 프랑수아 2세를 시작으로 샤를 9세, 앙리 3세 등 총 10명의 자녀를 낳아 왕비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카트린은 1544년 태어난 프랑수아 2세를 시작으로 샤를 9세, 앙리 3세, 그리고 마고로 유명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등 모두 10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자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죽거나 어머니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1547

[프랑스 왕비 즉위]

프랑수아 1세 사후 남편 앙리 2세가 즉위하면서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앙리 2세의 오랜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 의해 실권을 갖지 못하고 소외당했다.

프랑수아 1세의 사후, 1547년 앙리 2세가 즉위하면서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 그러나 카트린이 프랑스로 오기 전부터, 남편 앙리 2세는 20세 연상인 노르망디 법관의 아내 디안 드 푸아티에를 정부(情婦)로 두고 있었다. 디안은 앙리의 총애를 등에 업고 사실상 프랑스의 왕비로 행세했으며, 상당한 부정축재를 하는 한편 카트린의 아들들을 빼앗아 가정교사에게 맡겨버렸다. 카트린은 이름뿐인 왕비로 소외당했고, 이러한 상황은 앙리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1559

[앙리 2세 급사 및 프랑수아 2세 즉위]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 축하연 마상시합 중 남편 앙리 2세가 몽고메리 백작과의 사고로 급사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카트린은 평생 상복을 입었으며,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즉위했으나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력하여 실권을 잡지 못했다.

제8차 이탈리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559년 4월에 체결한 카토-캉브레지 조약에 따라 장녀 엘리자베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간에 혼인이 성사되었다. 1559년 6월에 대리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그 축하연에서 남편 앙리 2세는 몽고메리 백작과의 마상시합에서 발생한 사고로 급사하게 된다. 남편을 사랑했던 카트린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검은 상복을 입었다. 같은 해 그녀의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게 되지만,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카트린은 실권을 잡지 못했다.

1560

[프랑수아 2세 사망 및 카트린 섭정 시작]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일찍 죽고, 차남 샤를 9세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카트린은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섭정으로 나서게 되었다.

프랑수아 2세가 일찍 죽고 차남인 샤를 9세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섭정으로 나서게 된다. 이후 샤를 9세마저 세상을 떠나고 앙리 3세가 즉위하게 되며 섭정을 그만두지만, 이후로도 정치적인 힘을 발휘했다.

157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와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 직후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개신교도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이 발생했으며, 카트린이 이를 촉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가장 유명한 딸 마르그리트는 훗날 앙리 4세가 되는 앙리 드 나바르와 결혼했고 이 결혼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개신교도 학살 사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카트린은 독을 이용해 주요 인물들을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특히 잔 달브레를 독살하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촉발했다는 혐의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카트린은 이탈리아 출신의 사악한 악녀로의 혐의를 받게 되나, 외교정책에서 드러났던 그녀의 복잡한 태도를 본다면 이같은 설은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589

[카트린 드 메디시스 사망]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으로서 격동의 시기를 헤쳐나가며 왕권 확립에 애썼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블루아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노력은 사위 앙리 4세의 즉위를 통해 프랑스 왕권의 기초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카트린은 1589년 1월 5일 블루아에서 사망했다. 카트린이 섭정이 된 이래 프랑스는 4번의 내전이 이어졌으며, 왕이 요절하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카트린은 왕권에 도전하는 기즈 가문과 거듭 대립하는 한편, 나바르와 손을 잡으면서 프랑스 왕권 확립에 애썼다. 비록 그녀의 마지막 아들인 앙리 3세는 8개월 뒤 암살당하지만, 사위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강력한 프랑스 왕권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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