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 칸

몽골 제국의 왕족, 군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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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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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왕족, 군주,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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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평생 출생 의혹에 시달렸습니다. 몽골 제국의 초기 정복 전쟁에서 우익 군단을 이끌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고, 시베리아, 금나라, 호라즘 등 광대한 영토 정복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후예들은 킵차크 한국 등 여러 칸국을 건국하며 몽골 제국의 서방 영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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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2

[출생과 평생의 출생 의혹]

칭기즈 칸과 보르테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된 후 9개월 만에 태어나 평생 출생 의혹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이름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를 얻었으며, 동생 차가타이와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그를 장남으로 대우했으나, 후대에까지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1182년 칭기즈 칸과 보르테 카툰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일설에는 1180년 또는 1184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주치의 출생을 둘러싼 의혹은 어머니 보르테 카툰이 1179년 또는 1181년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지 9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손님' 또는 '여행객'을 뜻하는 '주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생 차가타이는 주치를 '메르키트의 사생아'라고 부르며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몽골 제국 내에서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공식적으로 주치를 장남으로 인정하고 혈통 언급을 금지했지만, 소문은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1207

[알타이와 시베리아 정벌]

칭기즈 칸을 대신하여 몽골군 우익을 이끌고 알타이 강 주변, 동부 투르키스탄, 시베리아의 삼림 부족들을 정벌하며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부 부족은 전쟁 없이 항복하여 그의 군사력을 입증했습니다.

1207년, 주치는 몽골군 우익 군대를 이끌고 알타이 강변 주변과 동부 투르키스탄을 공략하여 점령했습니다. 또한 예니세이 강변에 살던 키르기스, 이만족을 포함한 바이칼 호수 서쪽 시베리아의 삼림 부족 정벌에 참여했습니다. 이때 텔렌구트족, 오로스드족 등 일부 부족은 전쟁 없이 주치의 군대에 항복하여 그의 군사력을 입증했습니다. 1207년부터 1217년까지는 몽골 북서부의 오이라트족 토벌에도 참여했습니다.

1213

[금나라 원정과 형제 간의 갈등]

동생 차가타이, 오고타이와 함께 금나라 원정에 참여하여 태행산 동서 지역을 공격하고 산시성을 함락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시기에도 차가타이는 주치의 출생을 문제 삼아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이는 후계자 지명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1213년 7월부터 1214년 10월까지 주치는 차가타이, 오고타이와 함께 몽골에서 남하하여 태행산 동서 양쪽에서 3갈래로 나누어 금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주치는 서부 부대를 이끌고 황하 강 북쪽 기슭에 도착했으며, 군대를 나누어 항하 유역의 부유한 지역을 공략했습니다. 산시성의 중심지인 핑양, 펜저우, 타이위안을 점령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차가타이는 주치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고 면전에서 '메르키트족의 사생아'라 공격하며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갈등은 칭기즈 칸이 후계자를 오고타이로 낙점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219

[서방 호라즘 원정 활약]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에 참여하여 시르다리야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고 오타르를 점령했으며, 호라즘 샤의 6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우르겐치 공성전에서는 동생들과의 전략적 이견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1219년부터 주치는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및 서방 원정에 참여하여 우익군단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시르다리야강 하류 유역 일대를 차지하고 오타르를 점령했으며, 호라즘 샤의 6만 군사를 상대하여 승전했습니다. 1220년 4월까지 시그나크, 잔드, 야나칸트 등을 정복했습니다. 1220년 4월부터는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과 함께 호라즘의 대도시 우르겐치 성을 공략했습니다. 이 공성전에서도 주치는 항복과 협상을 선호했으나, 약탈과 파괴를 주장하는 차가타이와 전략 및 전술을 놓고 불화를 겪었으며,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를 지휘자로 삼아 이들을 통솔하게 했습니다.

1221

[주치 울루스의 형성]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르티시 강 서쪽, 투르가이, 우랄스크 일대를 분봉받아 '주치 울루스'를 형성했습니다. 이후 킵차크 초원으로 진격하여 러시아 공국 군대를 격파하는 등 서북방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며, 그의 후예들은 여러 칸국을 세웠습니다.

1221년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봉할 때 주치는 알타이산맥과 이르티시강 일대, 그리고 킵차크 초원, 투르가이, 우랄스크 등 광대한 서쪽 영토를 분봉받아 '주치 울루스'를 형성했습니다. 울루스의 수도는 이르티시 강 내에 생겨났습니다. 1223년에는 킵차크 초원으로 진격하여 할하 강변에서 러시아 공국 군대를 크게 격파하며 서북방 영토를 몽골 제국에 복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바투가 킵차크 한국(금장 한국)을 세우는 등 주치의 후예들은 여러 칸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1227

[칭기즈 칸과의 불화와 의문스러운 죽음]

킵차크 초원에 잔류하며 칭기즈 칸의 소환 및 볼가 강 도하 명령을 거부하고 병이 들었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다닌다는 소문이 퍼져 칭기즈 칸의 의심을 샀습니다. 결국 1227년 2월 병으로 사망했으나, 암살설, 독살설 등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한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1223년 칭기즈 칸이 몽골로 귀환할 때 주치는 카자흐스탄 초원에 남아 북서쪽 공략을 맡았고, 1224년 볼가 강을 건너라는 칭기즈 칸의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1226년 병이 들어 칭기즈 칸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으며, 정탐꾼들이 그가 건강히 사냥을 다닌다고 보고하면서 칭기즈 칸의 의심과 분노를 샀습니다. 칭기즈 칸은 주치의 반란을 의심하여 토벌을 계획했으나, 주치가 1227년 2월 병으로 사망하면서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동시대 기록에는 그가 칭기즈 칸 암살을 시도했다는 주장과 호라즘 인물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주치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으며, 병사설 외에 사냥 중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쿨란 카툰에 의한 독살설, 칭기즈 칸이 그를 죽였다는 설 등 여러 의혹이 존재합니다.

1946

1946 사후 719년

[유골 발굴과 사망 원인 논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주의 영묘에서 그의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유골은 오른손이 없고 두개골 일부가 파손되어, 칭기즈 칸에 의한 암살설과 같은 의문스러운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되었습니다.

주치의 묘소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6세기 기록에 나타나고, 1946년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주 제즈카즈간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울르타우 산 인근의 영묘에서 소련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유골은 오른손이 없고 파손된 두개골 일부였는데, 이는 칭기즈 칸에 의한 암살설 등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관련하여 다양한 추측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20세기 러시아의 학자가 그가 칭기즈 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을 주장하는 등 혈통 논란도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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