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퀸시 애덤스
미국 대통령, 정치인, 외교관, 변호사, 교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3:20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이자 제6대 대통령. 젊은 시절부터 외교관으로 유럽 각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 국무부 장관 재임 시 '먼로 독트린' 수립에 핵심적 역할. 대통령 퇴임 후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노예 제도 반대 운동에 앞장. 미국 정치 역사상 대통령 이후 다시 의회로 돌아와 주요 역할을 수행한 드문 인물.
1767
1767년 7월 11일, 대영 제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퀸시에서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둘째 아들이자 맏아들로 태어났다.
1778
[부친 존 애덤스의 프랑스 파견]
부친 존 애덤스가 대륙 의회에 참석하고 프랑스 공사로 파견되면서 어린 존 퀸시 애덤스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1770년대에 부친 존 애덤스는 대륙 의회에 참석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가족에게서 떠나있었다. 1778년 미국 의회는 존 애덤스를 프랑스로 보냈다.
1783
[러시아 주재 공사 비서로 경력 시작]
14세의 나이로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의 비밀서기로 일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으며, 이후 부친의 비밀서기를 지내며 외교 경험을 쌓았다.
부친이 외교관으로 지내면서 존 퀸시 애덤스는 파리, 암스테르담, 레이던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에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 프랜시스 데이나의 비밀서기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다. 1783년 부친에 다시 가담하여 부친의 비밀서기를 지냈다.
1787
[하버드 대학교 졸업]
귀국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변호사 실습을 시작했으나, 의뢰인이 적어 정치적 저널리즘으로 전향했다.
귀국 후에 존 퀸시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1787년에 졸업하였다. 애덤스는 3년 동안 법률을 읽고 1790년 변호사 실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뢰인들이 몇명 밖에 안 되어 정치적 저널리즘으로 전향하였다.
1794
1794년 조지 워싱턴은 애덤스를 네덜란드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애덤스가 도착한 지 3일 후에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입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1796
[포르투갈 및 프로이센 주재 공사 임명]
워싱턴 대통령과 부친 존 애덤스 대통령에 의해 포르투갈,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연이어 임명되어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1796년 워싱턴은 그를 포르투갈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으며, 그가 리스본으로 떠나기 전에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에 부친에 의하여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
1797
[루이사 캐서린 존슨과 결혼]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런던에서 만난 루이사 캐서린 존슨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두 아들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애덤스는 1797년 루이사와 결혼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서 4년 이상을 지냈다. 애덤스 부부는 4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 루이사 캐서린, 조지 워싱턴, 존 3세, 찰스 프랜시스. 루이사 캐서린은 유년기에 사망하였고, 맏아들 조지 워싱턴 애덤스는 아버지의 대통령 임기 말기인 1829년에 사망하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존 애덤스 3세는 5년 후에 사망하였다. 찰스 프랜시스는 남북 전쟁 중에 영국 주재 대사를 지냈다.
1802
[매사추세츠 주 상원 선출]
1801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취임 후 귀국하여, 이듬해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에 선출되며 국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애덤스는 곧 귀국하여 1802년 매사추세츠 주의 상원에 선출되었다.
1803
[미국 상원 의원 활동]
연방당원으로서 미국 상원에 진출했으나, 1807년 통상금지법 지지로 당과 갈등을 빚었고 1808년 상원직을 사임했다.
1803년 연방당원들은 미국 상원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애덤스를 선택하였다. 연방당원에 불구하고 그는 가끔 민주공화당과 함께 투표를 하였다. 1807년 미국 의회가 〈1807년 통상금지법〉을 통과시키자 자신의 당을 깨뜨렸다. 뉴잉글랜드의 연방당원들은 영국과 통상을 원하였으나, 전체로서 국가에 이익을 얻는 데 믿었던 엠바고를 지지하였다. 매사추세츠 주의 연방당 지도자들은 애덤스가 자기들을 배신한 느낌이 들었다. 1808년 선거가 열리기 몇달 전에 그들은 다른 이를 그의 상원석을 채우는 데 선출하였다. 애덤스는 즉시 사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사학의 교수로서 경력을 준비하였다.
1809
1809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애덤스를 러시아 주재 공사로 임명하였다.
1814
[헨트 조약 협상 위원으로 참여]
1812년 미영 전쟁을 끝내는 헨트 조약 협상에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미국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신임을 얻었다.
1814년 중순부터 1815년 초순까지 애덤스는 1812년 미영 전쟁을 끝내는 데 영국과 헨트 조약에 협상한 미국의 위원들 중의 하나로 지냈다. 협상은 미국은 물론 외교관으로서 애덤스를 위한 신임을 얻었다.
1815
[영국 주재 대사 임명]
매디슨 대통령에 의해 영국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미국과 캐나다 국경 관계 등 중요한 외교 문제를 논의했다.
매디슨 대통령은 그를 영국 주재 대사로 임명하였다. 런던에 있는 동안 애덤스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오대호 지역에서 요새들과 군함들의 이용을 멈추는 데 동의하였고, 두 나라들의 국경 지방을 무방비로 놔두었다.
1817
[제임스 먼로 행정부 국무부 장관 임명]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 의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오리건 지방 공동 점령, 플로리다 합병 등 미국의 영토 확장과 외교 정책에 기여했다.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애덤스를 자신의 국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다. 애덤스는 영국과 오리건 지방을 공동으로 점령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조용한 스페인이 노스웨스트 준주에 영토를 주장하는 조약을 협상하였고 플로리다주를 합쳤다.
1823
['먼로 독트린'의 첫 선언 주도]
국무부 장관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새로운 유럽의 식민지 설립을 위한 주체가 아니다"라는 '먼로 독트린'의 핵심 원칙을 선언하며 미국의 대외 정책을 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국무부 장관으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먼로 독트린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일이다. 애덤스는 이 정책의 첫 선언을 1823년 7월에 실시했다. 그는 러시아 공사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더 이상 새로운 유럽의 식민지 설립을 위한 주체가 아니다"고 말하였다. 이 선언은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간섭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1824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미국 하원에서 헨리 클레이의 지지를 받아 제6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먼로에게 대패했으나, 1824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4명의 민주공화당원(존 C. 칼훈, 헨리 클레이, 윌리엄 H. 크로포드, 앤드루 잭슨)이 애덤스를 반대했다. 아무도 선거인단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미국 하원이 대통령을 선택해야 했고, 클레이가 자신의 지지를 애덤스에게 던져 애덤스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25
[제6대 미국 대통령 취임]
미국 제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부패 계약' 비난으로 민주공화당이 분열되고 의회의 반대에 부딪히며 국내 향상 프로그램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1825년 3월 4일 완공되지 않은 캐피톨의 상원 의회에서 대통령 취임 연설을 가졌다. 하원이 애덤스를 선출하기 전 잭슨의 지지자들은 애덤스가 자신의 지지를 위해 클레이에게 내각 직위를 약속했다는 '부패 계약'을 고발했다. 애덤스가 클레이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이 비난은 더욱 거세졌고, 민주공화당이 애덤스의 '국민공화당'과 잭슨의 단체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취임 연설과 첫 전갈에서 그는 고속도로, 운하, 기상 관측소, 국립 대학 건설을 포함하는 야심적인 국내 향상 프로그램을 제안했으나, 의회의 다수는 이에 동의하지 않아 많은 정책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1828
['증오의 관세' 통과 및 대통령 재선 실패]
남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오의 관세'가 통과되며 지역 감정을 악화시켰고, 이어진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1828년 수많은 뉴잉글랜드의 주들에서 제조업이 농업을 대신하자, 이 주들은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찬성했다. 그러나 높은 관세는 남부의 농부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안겼고, 남부 지도자들은 낮은 관세와 자유 무역을 원했다. 의회에서 잭슨의 지지자들이 제조품에 높은 관세 의안을 통과시켜 '증오의 관세'라 불리며 남부에서 독한 노여움을 발생시켰다. 애덤스는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에게 178대 83으로 크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1829
[대통령 임기 만료 및 하원 의원으로 복귀]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고향 시민들의 요청으로 1831년 하원 의원에 선출되어 17년간 재직하며, 대통령 퇴임 후 다시 의회로 돌아온 전례 없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1829년 3월 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애덤스는 처음에는 퇴직 생활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퀸시의 시민들은 그가 1830년 의회를 위한 선거에 나가길 원하였다. 1831년 하원에 선출되어 17년 동안 그 직에 있었다. 그는 하원의 외교 정세 위원회와 제조업 위원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당 정치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잭슨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836
['토론 금지령'에 맞서 노예 제도 폐지 주장]
하원 의원 재직 중, 노예 제도에 관한 청원서 토론을 금지하는 '토론 금지령'에 강력히 반대하며 자유로운 연설과 청원의 헌법적 권리를 옹호했고, 1844년 금지령 폐지를 이끌어냈다.
하원 의원으로서 애덤스의 가장 위대한 공동적 역할은 노예 제도에 관한 토론이 열릴 동안에 있었을 것이다. 노예 폐지론자들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주장을 하는 데 의회에 많은 청원서들을 보냈다. 1836년 하원은 청원서들이 바닥에서 읽혀지는 데 "토론 금지령"이라 불리는 결의들 중에 처음을 도입하였다. 애덤스는 이 법률들이 자유적인 연설과 청원의 헌법적인 권리들에 폭력이 가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원에서 토론 금지령을 반대하는 것에 대항 강하게 비난하였으나, 그는 결국 1844년 그것들이 폐지되는 데 성공하였다.
1841
[아미스타드호 사건 성공적 변호]
미국 대법원에서 아미스타드호 사건을 변호하여 아프리카 흑인 노예 반란자들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이는 그의 강력한 노예제 폐지 신념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애덤스는 1841년 미국 대법원 앞에서 아미스타드호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신념을 보였다. 반란자들은 백인 노예상인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된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1839년 그들은 카리브해에서 "라 아미스타드"라고 불리는 배에서 노예사냥꾼을 공격하여 두 명의 백인들을 죽이고 노예선을 장악했다. 흑인 노예들은 살인과 폭동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의 재판은 대법원에서 열렸다. 애덤스 변호사는 강하게 피고를 변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신체의 자유가 있다고 논의하였다. 반란자들은 무죄가 선언되었다.
1848
[하원 회의 중 사망]
1848년 2월 21일 하원 회의 중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는 순간까지 공직에 헌신했다.
1848년 2월 21일 애덤스는 하원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상태가 악화되어 연설자의 방으로 옮겨졌다가 이틀 후에 사망했다. 향년 81세. 그는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퍼스트 유니테리언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